[딥폴리시] ‘푸른 영토’ 시대의 권력과 인재
입력
수정
해저 케이블 의존 심화와 세계 경제 충격 파급 미국·중국 중심의 ‘푸른 영토’ 패권 경쟁 가속 전문 인력 부족과 공급망 안정화 시급 과제
본 기사는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의 SIAI Business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SIAI 또는 그 소속 기관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전 세계 국제 인터넷 트래픽의 99%는 해저 케이블을 통해 이동한다. 이 보이지 않는 인프라는 금융거래, 통신, 물류, 에너지 관리까지 현대 경제의 핵심을 떠받치고 있다. 그러나 케이블망은 선박 사고, 자연재해, 군사적 긴장 등 다양한 위험에 쉽게 노출된다.
2025년 9월 홍해 해저 통신선이 절단되면서 아시아와 중동 일부 지역의 인터넷 접속이 중단됐다. 이어 수에즈와 파나마 운하에서도 사고가 발생해 항로 지연과 우회가 잇따랐고, 세계 해상 네트워크의 취약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해저 케이블 절단이나 운하 마비는 단순한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공급망과 시장 안정성을 뒤흔드는 지정학적 충격이다. 바다는 더 이상 배경이 아니라 경제와 안보를 좌우하는 푸른 영토(blue territory)’로 부상하고 있다.

권력 경쟁으로 드러난 해양 현실
전통적으로 해양 권리는 육지에서 파생돼, 배타적경제수역(EEZ)은 해안선으로부터 200해리까지 자원에 대한 특별 권리를 인정한다. 오늘날에도 유엔해양법협약(UNCLOS)이 해양 질서의 기본 틀을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힘의 구조는 달라졌다. 항공모함 전단, 글로벌 물류 거점, 해저 데이터 케이블은 섬이나 해안의 소유 여부와 상관없이 대륙과 대륙을 잇는다. 미국은 태평양과 대서양 전역에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항공모함 11척을 운용하고 있으며, 중국을 비롯한 경쟁국들도 이에 맞서고 있다.
군사력만으로는 해상 권력을 설명할 수 없다. 미 의회조사국(CRS)은 중국 해군이 2020년대 중반까지 400척에 달할 것으로 전망한다. 전체 전력에서는 미국이 여전히 앞서지만, 중국 조선소들은 세계 상선 건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상업 생산 능력을 군사력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기반을 갖췄다. 해상 패권은 무기뿐 아니라 조선 능력, 물류망, 해저 케이블 통제력에서 드러난다.
충돌이 만든 글로벌 파장
이 같은 권력 경쟁은 곳곳에서 실제 충돌로 이어지고 있다. 필리핀은 세컨드 토머스 암초(Second Thomas Shoal)에 주둔 중인 자국 해병대를 지원하기 위해 보급선을 보내지만, 중국 해경이 이를 가로막으며 충돌 위험이 반복된다. 홍해에서는 무력 위협이 커지면서 상선들이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우회했고, 파나마 운하는 가뭄으로 통과량이 제한됐다.
이 사건들은 단순한 지역 문제가 아니다. 항로 지연과 우회는 해운 비용과 보험료, 탄소 배출을 늘리고, 결국 원자재 가격과 생활물가, 에너지 비용까지 끌어올린다. 바다에서 발생한 충격은 곧 세계 경제와 가계 부담으로 전이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해양에 대한 이해와 대응 능력 부족이 국가와 사회 전체의 위험으로 이어진다.
인력 격차로 드러난 취약성
해양 경제는 지난 세대 동안 세계 평균 성장률을 앞질렀다. 유엔 통계에 따르면 1990년대 중반 이후 규모가 약 2.5배 확대됐고, 2023년 해양 상품·서비스 교역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유럽에서는 해운업이 2022년에 618억 유로(약 9조2,000억원)의 부가가치를 창출했고, 2023년에도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그러나 성장은 인력난과 맞물려 있다. 국제해사기구(IMO)에 따르면 2023년 전 세계 선원 부족 규모는 약 2만6,000명에 달했다. 항해사, 선박 관리자뿐 아니라 해저 케이블 엔지니어, 해양 데이터 전문가, 항만 자동화 기술자, 해양 법률 전문가까지 수요를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데이터 인프라도 마찬가지다. 국제 데이터의 99%가 해저 케이블을 통해 이동하며, 2024년 사용 대역폭은 6.4 Pbps를 넘어섰다. 이는 2020년 이후 연평균 32% 증가한 수치다. 2025~2027년 사이 클라우드 기업들이 신규 해저 케이블에 100억 달러(약 13조원) 이상을 투자할 예정이지만, 경로 조사, 장애 수리, 기지 보안, 법적 체계 정비 등 과제는 여전히 산적하다.

그래프(B) 국제 대역폭 사용량(2020년 2.13 Pbps, 2024년 6.4 Pbps)
격차 해소를 위한 산업 전략
인력 부족을 해소하려면 산업 차원의 대응이 필요하다. 유럽연합(EU)의 경우 해운업 부가가치의 0.1%만 투자해도 연간 약 6,100만~6,200만 유로(약 915억~930억원)를 확보할 수 있다. 이 재원은 항만 운영, 데이터 관리, 해양 법률, 케이블 유지·보수 등 핵심 분야의 훈련과 현장 실습에 투입될 수 있다.
전문 인력 양성은 단순한 노동시장 과제가 아니다. 해상 물류와 국제 데이터망을 안정적으로 운영할 능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단일 사고가 세계 경제로 확산되는 충격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인력 격차 해소는 해양 경제 성장뿐 아니라 글로벌 공급망 안전을 지키는 전략 과제다.

주: EU 해운 운송 GVA, GVA의 0.1% (교육 투자 배정분)(X축), 금액(Y축)
정책 전환의 세 가지 방향
‘푸른 영토’는 안보 의제에만 갇혀서는 안 된다. 바다는 국가 안보를 넘어 시민 생활과 인프라 차원에서 다뤄져야 한다. EEZ의 작동 원리, 해양법과 항행 관습의 차이, 해상 전력이 케이블과 항로를 보호하는 실질적 수단이라는 점이 분명히 인식돼야 한다.
또한 해양 경제의 과제와 인력 수급을 직접 연결하는 접근이 필요하다. 수에즈와 파나마 운하 혼란은 운송비와 배출량을 높였고, 해저 데이터 수요는 급증했다. 해운사와 클라우드 기업이 신규 케이블에 투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 인력 부족은 여전히 심각한 병목으로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해양 인프라 장애에 대비한 체계적 대응이 요구된다. 화재·홍수·사이버 공격처럼, 케이블 단절과 운하 봉쇄도 비상 대응 매뉴얼에 포함돼야 한다. 항만과 케이블 거점과의 협력, 현장 프로젝트 정례화 같은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이런 준비가 갖춰질 때 해양 네트워크 장애가 발생하더라도 경제와 사회 시스템의 충격을 줄일 수 있다.
전략적 맥락의 이해
아시아 해역에서 이어지는 긴장은 육지 중심 사고와 해양 현실의 불일치에서 비롯된다. 해군력이나 조선 능력도 중요하지만, 바다를 항행의 공공재로 보느냐, 주권이 미치는 ‘푸른 영토’로 인식하느냐가 국가들의 행동을 규율한다. 이 차이는 외교적 긴장과 군사적 대립으로 직결된다.
국제 데이터의 거의 전부가 해저 케이블을 통해 흐르는 지금, 바다를 누가 지배하느냐의 문제는 추상적 담론이 아니라 구체적인 정책 과제다. 각국이 해운업에서 발생하는 부가가치를 인프라 투자와 인력 확보에 일부라도 돌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EZ 관리, 케이블 보호, 위기 대응 능력은 국가의 지속가능한 성장과 직결되며, 바다의 규율 방식이 곧 지역 안정과 세계 질서를 결정짓는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Who Owns the Water? Educating for Power in the Age of "Blue Territory"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에 있습니다.
- Previous [딥폴리시] 해외 원조의 ‘빛과 그늘’
- Next [딥폴리시] 탄핵이 키운 불확실성 비용, 책임과 민의를 지키는 방법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