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재해 발생 기업, 대출·투자도 옥죈다 “정부 ‘산재 근절’ 강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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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안전 종합대책 금융부문 과제 주금공, 중대재해 기업 'PF보증 제한' "산재 사고 방치 어려워, 정책 방향 긍정적" 평가

앞으로 기업이 사망사고 등 중대재해를 일으키면 은행 한도성대출이 줄거나 정지된다. 중대재해배상책임보험, 건설공사보험, 공사이행보증 보험료도 최대 15% 할증되며, 연간 3명 이상 근로자가 산재로 숨진 기업은 영업이익 최대 5%를 과징금으로 내야 한다. 이에 불황에 짓눌린 건설업계에서는 사망사고 한 건에도 존폐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으나, 일각에서는 더는 사고를 방치할 수 없는 현실을 감안하면 불가피한 방향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기업 ‘마통’격 한도 대출 제한, 책임보혐료는 최대 15% 할증
17일 금융위원회는 지난 15일 개최된 관계부처 합동 '노동안전 종합대책'의 후속 조치로, 금융권 대출·보험, 정책금융, 자본시장 공시·평가 등 전 금융부문을 포함하는 세부 추진방안을 마련해 추진키로 했다고 밝혔다. 15일 정부가 발표한 노동안전 종합대책의 금융부문 세부과제다. 앞서 이재명 대통령도 국무회의에서 "기준을 만들어 대출과 투자에 불이익을 주는 게 효과가 있을 것 같다"고 말했는데, 발언을 현실화한 것이다.
먼저 은행의 대출 심사 때 중대재해 이력을 신용평가와 등급조정 항목에 명시적으로 반영한다. 현재는 대출받는 기업의 내부통제시스템이나 노사협력관계 등을 신용평가 항목에 반영하고, '영업활동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주요한 법적 사실' 등은 신용등급 조정 요인으로 반영하는데 평가 기준이 더 강화되는 것이다. 중장기적으로는 중대재해 기업에 대한 평가 데이터가 축적되면, 관련 항목의 배점 상향도 추진한다. 고용노동부는 금융권의 이 같은 평가 기준 마련을 뒷받침하기 위해, 중대재해 관련 정보를 신용정보원을 통해 전 금융권에 공유할 방침이다.
중대재해배상책임보험 등 보험료를 산정할 때도 중대재해 여부가 반영된다. 지금은 ‘사고 미발생 시’ 할인 요인으로 반영하는데, 앞으로는 3년 내 중대재해 사고 발생 여부, 동일유형 사고 반복 발생 여부 등을 따져 할증도 가능하게 한다. 대신 산업재해 예방 우수기업 인증 등 현장 안전성을 공인받은 회사에 대해서는 보험료 할인을 추진한다. 한국주택금융공사(HF)는 중대재해 기업의 위법행위 수준에 따라 프로젝트파이낸싱(PF) 보증 제한도 할 수 있다.

3명 이상 사망사고 발생 시 최소 30억 과징금, 공공입찰 참가도 제한
반복 사고 기업은 공공입찰 참가도 제한된다. 민자·민간 현장에서 중대재해를 낸 기업도 입찰 제한 대상에 포함하고, 제한 기간을 현행 2년에서 3년으로 늘린다. 낙찰자 평가 시에는 '중대재해 위반' 항목을 신설해 건설공사뿐 아니라 물품·용역 계약에서도 안전 관리 실적이 직접 반영된다. 법인 분할이나 명의 변경을 통한 제재 회피를 막기 위해 제재 승계 규정도 마련한다.
연간 3명 이상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건설사에 대해서는 영업이익의 5% 이내, 최소 30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한다. 공공기관처럼 영업이익이 명확하지 않거나 영업손실이 발생한 곳에는 30억원의 과징금만 적용된다. 정부는 이번 대책을 통해 산업재해 사망 만인율(근로자 1만 명당 사망자 수)을 현재 0.39명에서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0.29명으로 낮추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또한 상장회사는 중대재해 발생이나 중대재해처벌법에 따른 형사 판결이 나면 이를 즉시 공시해야 한다. 중대재해가 발생한 경우 현황과 대응조치 등을 노동부에 보고하고, 당일에 공시하도록 할 방침이다. 중대재해처벌법 위반으로 기소된 사건의 형사법원 판결 결과가 나와도 마찬가지로 당일에 공시를 해야 한다. 사업보고서 등에는 공시대상 기간 동안 발생한 중대재해 현황과 대응 조치 등을 기재해야 하고, 연기금 등 기관투자자들은 중대재해 발생을 투자 판단에 고려하도록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자의 수탁자책임 원칙) 개정도 추진한다.
건설사의 경우 최근 3년간 영업정지 처분을 두 차례 받은 사업장이 다시 사고를 낼 시 등록을 말소해 시장에서 퇴출할 수 있도록 관련 법령을 정비한다. 등록이 말소되면 해당 건설사는 신규 사업 참여와 수주, 하도급 계약 등 모든 영업활동이 중단돼 사실상 시장 퇴출 수순을 밟게 된다. 정부는 이를 통해 안전관리 의무를 소홀히 한 기업에 ‘퇴출’이라는 가장 강력한 제재를 부과하겠다는 방침이다.
건설업계 "건설사들 줄줄이 문닫을 것" 우려
이에 건설업계에서는 정책이 시행될 경우 부담이 과도하게 커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인건비와 원자재 가격 상승에 따른 건설경기 침체가 여전한 상황에서 산업재해 발생에 따른 대규모 과징금까지 부과되면 건설사들이 생존 위기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주요 건설사 영업이익률이 한 자릿수대에 머무르는 상황에서 영업이익 5% 이내 과징금은 정말 충격적"이라며 "하한선이 30억원인데 중견, 소규모 업체는 사실상 영업이익의 대부분을 과징금으로 내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고 토로했다.
실제 일부 대형 건설사는 영업이익의 5%를 과징금으로 낼 경우 수백억원대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GS건설은 지난해 영업이익 2,800억원을 기록했는데 이 중 5%에 해당하는 액수는 140억원이다. 지난해 영업이익 4,000억원을 기록한 대우건설은 200억원에 달한다. 한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이미 건설사들은 매년 안전관리를 위해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고 있고 안전 확보를 위한 방안을 마련하고 있지만 건설현장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고를 막기 힘든 것이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재계에서도 대책에 대한 목소리를 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이날 입장문을 발표하고 "산업안전보건법 등 우리나라 안전보건관계 법령의 사업주 처벌이 이미 최고 수준이며 중대재해처벌법이 제정·시행되고 있으나, 산재감소 효과는 뚜렷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언급했다. 이어 "대책내용이 법제화될 경우, 개별기업은 물론 연관 기업과 협력업체의 경영에까지 미치는 파급력이 크고, 이는 국가경제에도 심각한 악영향을 끼칠 것으로 우려된다"고 덧붙였다.
일부 전문가는 이번 방안이 건설현장 사망사고 감소에 일정 부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봤다. 이은형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정부 정책의 방향성은 긍정적으로 본다”며 “건설 사업 환경이 어렵거나 (당장은) 손실이 발생할 수는 있겠지만, 지금처럼 건설현장에서 산재 사고가 계속 발생하는 상황을 더는 방치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이번 대책에서 적정 공기와 공사비 문제를 함께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장기적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