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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폴리시] 멈춤의 전략, 유럽이 시간을 통제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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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months 1 we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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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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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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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과학의 언어로 읽고, 사실 위에 통찰을 더하는 글을 전합니다. 복잡한 현상 속에서 본질을 찾아 독자와 함께 사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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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화 무역수지 적자 3,045억 유로(약 440조원)
합의보다 실행 가능한 지연
기술·인력·시간이 만든 협상의 힘

본 기사는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의 SIAI Business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SIAI 또는 그 소속 기관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2025년 EU–중국 통상 협상은 멈췄지만 주도권은 유럽으로 넘어갔다. 2024년 유럽연합(EU)의 대중국 재화 무역수지 적자는 3,045억 유로(약 440조원)에 달했고, 대중 수출 비중은 8.3%에 불과했다. 수출이 제한된 구조 속에서 유럽은 불리한 수치를 감수하면서도 협상 속도를 늦췄다. 기다림이 곧 전략이 된 셈이다.

브뤼셀은 지난해 중국산 배터리 전기차(BEV)에 5년간의 보조금 상쇄 관세(상계관세)를 부과했다. 비야디(BYD) 17.0%, 지리(Geely) 18.8%, 상하이자동차(SAIC) 최대 35.3%가 적용됐고, 여기에 기존 10%의 일반 승용차 관세가 더해졌다. 같은 시기 미국은 2025년 4월 글로벌 기준 관세 10%를 도입하며 세계 교역의 기준선을 새로 세웠다. 이러한 조치는 유럽이 협상 밖에서도 방어선을 강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7월 베이징 정상회의는 결과보다 의미를 남겼다. 유럽은 ‘무역의 재균형’을, 중국은 ‘마찰의 안정적 관리’를 주장했지만, 합의는 없었다. 대신 회담은 유럽의 계산된 냉정함과 중국의 조급함을 드러냈다. 유럽은 산업 재편과 공급망 다변화를 통해 실제 영향력을 넓히고 있었고, 중국은 좁아지는 시장 속에서 대응 여력을 잃어갔다. 결국 합의의 공백은 실패가 아니라, 유럽이 선택한 침묵이었다.

협상의 공백, 전략의 연장선

유럽이 ‘합의 유보’를 전략으로 택한 이유는 협상 밖에서 움직일 수 있는 선택지가 넓어졌기 때문이다. 2023년 이후 EU는 공급망 재배치와 통상 방어 규제를 병행해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대중 수출 의존도가 낮은 만큼, 지연은 부담이 아니라 여유였다. 반면 과잉생산에 의존하는 중국은 시간이 갈수록 손실이 커졌다.

이 과정에서 정치적 계산이 작동했다. 유럽의 ‘위험제거(De-risking·경제·안보 위험을 특정 국가 의존에서 분산하는 전략)’ 정책은 이제 선언이 아닌 제도다. 반보조금 조사, 외국 보조금 규제, 디지털 시장 집행 규정(DMA) 등 방어 체계가 정착되면서 단일시장의 신뢰가 강화됐다. 유럽은 더 이상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합의 없음’은 패배가 아니라 확장의 신호였다. 브뤼셀 내부의 시각도 달라졌다. 2025년 회담에서 중국이 ‘관세 철회’를 요구했을 때, 유럽의 반응은 단호했다. “무역 균형 조정 없이 양보는 없다.” 이 원칙이 회원국 공통의 합의로 굳어졌다. 유럽은 시간이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점을 확인했고, 그 시간은 단순한 지연이 아니라 협상의 무기가 됐다.

2024년 EU의 대중국 상품 교역 규모
(x축) 교역 항목, (y축) 금액(십억 유로)/주: 수출 규모는 제한적이지만 수입 의존도가 높아 무역수지가 크게 악화됐다.

숫자가 만든 정치, 협상이 만든 구조

이번 회담의 쟁점은 기술적 타협이 아니라 실행력의 문제였다. 봄부터 논의된 전기차(EV) 가격 약정제(최저 가격과 수출 물량을 미리 정하는 방식)는 설계부터 복잡했다. 모델과 브랜드가 수십 종에 달하는 시장에서 이를 감시하고 집행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

유럽통계청(Eurostat)의 2024년 자료는 유럽의 판단에 명확한 근거를 제공했다. EU의 대중국 재화 무역수지 적자는 3천억유로(약 430조원) 안팎에서 고착됐고, 대중 수출 비중은 8% 초반에 머물렀다. 수출 의존도가 낮은 유럽은 협상 지연에 따른 손실이 제한적이었다. 반대로 중국은 시간이 지날수록 부담이 커졌다. 미국의 10% 글로벌 기준 관세에 더해 인도, 터키, 한국 등 주요 교역국이 시장 진입 규제를 강화하면서 중국의 수출 여력은 급격히 줄었다. 공급 과잉이 누적되자 협상 구도는 유럽 쪽으로 기울었다.

이제 협상의 초점은 ‘가격’이 아니라 ‘신뢰’로 옮겨갔다. 유럽은 가격 조정보다 제도적 투명성과 감독 체계를 우선시했고, 중국은 이를 부담으로 받아들였다. 결국 2025년 회담은 합의 없이 종료됐다. 이 과정에서 숫자는 협상의 논리를 바꾸었고, 정책의 기준은 새롭게 정의됐다.

2024년 10월 EU의 중국산 전기차 상계관세율
(x축) 기업 및 차량 유형, (y축) 관세율(%)/주: 유럽연합은 중국산 전기차에 최대 35.3%의 상계관세를 부과해 수입 비용이 크게 상승했다.

독일 변수, 구조적 전환의 시험대

이번 협상의 가장 큰 변곡점은 독일이었다. 2024년 베를린은 추가 전기차 관세에 반대했고, 2025년에는 정치적 타협을 시도했다. 그러나 EU는 예정대로 보조금 상쇄 관세를 확정했다. 시장은 이미 중국 브랜드의 확대로 반응했다. BYD는 유럽 내 월간 판매 순위에 진입했고, 일부 달에는 테슬라를 앞섰다. 반면 폭스바겐의 중국 내 판매는 2024년에 약 10% 감소했고, 2025년에도 하락세를 이어갔다.

이 변화는 독일 산업 구조의 한계를 드러냈다. 독일 자동차 산업은 여전히 75만 명을 고용하며 EU 제조업의 상징이지만, 통상정책의 주도권은 예전만큼 강하지 않다. 다수 회원국이 중국 산업을 ‘보조금과 과잉설비의 복합체’로 규정하면서 베를린의 완화론은 설득력을 잃었다. 통상 의제의 중심은 이제 ‘단일시장 수호’로 옮겨갔다.

EU 내부 정치도 달라졌다. 특정 산업에만 혜택을 주는 조치는 곧바로 태양광·풍력·의료기기 등 다른 분야의 요구로 이어진다. 그 결과 EU의 통상정책은 산업정책과 방어 정책이 결합된 구조로 고착됐다. 베를린은 여전히 목소리를 낼 수 있지만 방향을 바꿀 수는 없다. ‘하나의 시장, 하나의 원칙’이라는 구호는 이제 규칙이 됐다.

우회로가 만든 여유, 인력이 만드는 지속성

유럽은 이제 중국 중심의 무역 질서를 벗어나 ‘주변부 우선 전략(Periphery-first)’으로 이동하고 있다. 핵심은 러시아를 거치지 않는 카스피해 횡단 회랑(Trans-Caspian Corridor)이다. 중앙아시아를 지나 유럽으로 이어지는 이 경로는 단순한 물류망이 아니라 새로운 통상 축이다. 유럽연합(EU)은 2024년 글로벌 게이트웨이(Global Gateway·EU의 해외 인프라 투자 구상) 아래 100억 유로(약 143조원)를 배정했고, 2025년에는 30억 유로(약 43조원)를 추가 승인했다. 10월 룩셈부르크에서 열린 중앙아시아·캅카스(Caucasus)·흑해 연안국 정상회의는 이 전략이 선언이 아닌 실행 단계로 들어섰음을 보여줬다.

동남아 시장과의 연결도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EU는 이미 싱가포르와 베트남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했고, 필리핀과 태국과의 협상을 재개했다. 말레이시아와의 논의도 탐색 단계에 있다. 이런 움직임은 단순한 ‘탈중국화’가 아니다. 교역의 축을 한 방향에서 여러 갈래로 나누는 균형 확장 전략이다. 시장 접근 경로가 넓어질수록 유럽은 협상을 서두를 이유가 없다. 지연은 약점이 아니라 지속을 위한 시간이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인력이 있다. 내연기관 중심의 기술 인력을 전동화·배터리·열관리·소프트웨어 분야로 전환해야 한다. 대학과 직업학교는 6~12개월 단기 과정을 운영해 재교육을 강화하고, 중소 제조업체와 협력해 현장 중심의 기술훈련 프로그램을 확충해야 한다. 아세안 지역 대학과 공동학위, 중앙아시아 국가와 기술 교류, 물류·통관의 디지털 교육이 그다음 단계다. 유럽의 협상력은 숫자가 아니라 시스템에서 나온다. 합의가 늦어져도 산업과 인력이 움직이면 결과는 따라온다. 유럽의 지연 전략은 멈춤이 아니라 축적이다. 기술과 사람, 경로와 규칙을 쌓는 일이다

데이터의 냉정함 속에서도, 남는 것은 사람이다

2024년 EU의 대중국 수출 비중은 8.3%, 재화 무역수지 적자는 3,045억 유로(약 440조원)에 달했다. 이 냉정한 숫자는 하나의 방향을 가리킨다. 유럽은 시간을 통제하지만, 중국은 시간에 쫓긴다. 전기차 관세는 고정됐고, 미국의 글로벌 관세 체계는 이미 재정비됐다. 유럽의 정치와 산업 구도는 ‘위험감축(De-risking)’이라는 보상 구조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이제 유럽은 협상을 서두르지 않는다. 대신 산업·교육·무역정책을 하나로 묶어 ‘실행 가능한 지연’을 설계하고 있다. 표면은 냉정하지만, 그 속에는 사회를 지탱하는 감각이 흐른다. 공장을 멈추지 않고, 지역의 일자리를 지키며, 다음 세대를 산업 현장으로 내보낼 기회를 만드는 일이다. 결국 협상이란 숫자의 논리가 아니라, 시간을 견디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멈춤의 시간은 다음 질서를 세우는 시간이다. 유럽은 지금 그 시간을 버티는 쪽에 서 있다. 숫자 뒤에 남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No Deal, New Playbook: Why the EU-China Trade Deal Stalled and What Comes Next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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