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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폴리시] 긴장보다 시스템, APEC이 굴리는 아시아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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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months 1 we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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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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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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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과학의 언어로 읽고, 사실 위에 통찰을 더하는 글을 전합니다. 복잡한 현상 속에서 본질을 찾아 독자와 함께 사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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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관과 데이터가 만든 새로운 협력 질서
거시 불균형을 제도로 조정하는 아시아의 흐름
교육과 행정이 맞물린 현장 중심의 협력 구조

본 기사는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의 SIAI Business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SIAI 또는 그 소속 기관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2025년의 아시아·태평양은 정치가 아닌 시스템이 경제를 이끈다. 외교적 합의가 멈춰도 시장은 제도의 작동으로 움직인다. 그 중심에는 APEC의 협력 구조가 있다. 2024년 APEC 회원국의 상품 수출액은 1조 2,200억 달러(약 1,650조 원)에 달해 세계 무역의 절반을 차지했다. 관세 분쟁과 안보 불확실성, 재정 긴축이 이어졌지만 교역은 흔들리지 않았다. 지난 30년간 축적된 통관 간소화, 물류 효율화, 디지털 신뢰 체계가 지금도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스템은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다. 교역 비용을 줄이고, 시간을 단축하며, 기업의 신뢰를 높이는 실질적 인프라다. 경제의 안정성은 초강대국의 외교가 아니라 제도의 축적에서 비롯된다. 이는 아시아·태평양 회원국들이 꾸준히 추진해온 제도 개선의 결과다. 표면의 갈등과 달리 내부의 규칙은 진화하고 있다. 정치가 멈춰도 시스템은 계속 움직인다.

규범이 남긴 성과, 제도가 만든 지속성

APEC의 지속력은 선언이 아닌 실행에서 비롯된다. 정책 합의보다 제도를 강화한 덕분에 협력이 끊기지 않았다. 1999년과 2010년 두 차례 추진된 무역원활화 행동계획(TFAP)은 역내 거래비용을 각각 5% 낮췄다. 이어 2009년부터 2018년까지 시행된 기업 환경 개선 프로그램은 행정 효율을 22.9% 끌어올렸다.

성과의 핵심은 수치보다 구조에 있다. 통관 절차 단축과 행정 문서 간소화 같은 개혁이 누적되며 연평균 1% 안팎의 비용 절감이 이어졌다. 이런 개선이 각국의 행정 시스템에 스며들며 APEC 협력의 뼈대를 형성했다. 복잡한 자유무역협정보다 지속성이 강한 통합 방식이다. 1989년 17%였던 평균 관세율은 2012년 5.7%로 낮아졌다. 단순한 세율 조정이 아니라, 아시아와 미주를 잇는 생산·물류망을 현실로 만든 변화였다. 여기에 원산지증명서 전자화와 위험 기반 통관이 더해졌다.

단일 창구(single window) 시스템의 확산으로 행정 효율성이 한층 높아졌다. 무역에서 ‘시간은 비용’이라는 명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절차의 자동화가 그 답이다. 이 변화는 정책보다 체계의 진화에 가깝다. TFAP의 절차는 이미 각국의 법령과 데이터 시스템에 스며들어 있다. 협정이 끝나도 기능은 남고, 그 기능이 새로운 신뢰를 만든다. 외교가 멈춰도 경제의 톱니는 돌아간다.

APEC 역내 기업환경(EoDB) 개선 추이
주: 2009~2013년 대비 2015~2018년 동안 기업환경 지수가 11.3에서 11.6으로 개선됐다.

이동과 데이터, 실용이 만든 연결망

사람과 정보가 움직일 때 경제는 확장된다. 1997년 시범 사업으로 시작된 APEC 비즈니스 트래블 카드(APEC Business Travel Card·ABTC)는 현재 21개 경제권, 46만 명이 사용하는 제도로 자리 잡았다. 사전 심사 기간은 2006년 119일에서 2019년 17일로 줄었다. 2025년 5월 평가에서도 효율화가 이어졌고, 중소 수출기업과 대학 연구진, 기술이전팀이 직접 성과를 체감했다. APEC 협력의 효과는 통계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데이터의 흐름에서도 같은 구조가 작동한다. 2011년 도입된 국경 간 프라이버시 규칙(Cross-Border Privacy Rules·CBPR)은 2025년 6월 ‘글로벌 CBPR 포럼(Global CBPR Forum)’으로 발전했다. 현재 미국·일본·한국 등 주요국이 이 체계를 함께 운영하고 있으며, 참여 기관은 ‘책임 준수 제도(Accountability Agent)’를 통해 기업과 교육기관의 데이터 이전을 인증한다. 이 절차 덕분에 기업은 중복 규제를 피하고, 각국은 데이터 신뢰 체계를 유지한다.

CBPR은 APEC 협력 방식의 축약판이다. 법적 구속력보다 상호운용성과 검증 가능한 절차를 우선한다. 그 결과 이 제도는 OECD와 EU의 프라이버시 정책과 병행되며 글로벌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이동과 데이터는 이제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된다. ABTC가 이동의 문을 열었다면, CBPR은 정보의 길을 열었다. 인력 이동과 데이터 전송이 동시에 빨라지면서 교역과 연구의 경계가 사라지고 있다. APEC의 협력 구조는 ‘물류 네트워크’에서 ‘지식 네트워크’로 확장되고 있다.

APEC 비즈니스 트래블 카드(ABTC) 사전심사 기간 단축 추이
주: 사전심사 기간이 2006년 119일(핑크)에서 2019년 17일(빨강)로 단축됐다.

불균형의 귀환, 정책 조정의 과제

미시적 성과 뒤에는 거시적 위험이 쌓인다. 2024년 중국의 상품수지 흑자는 1조 달러(약 1,350조 원),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1조 1,000억 달러(약 1,490조 원)로 2000년대 중반 이후 최대 격차를 기록했다. 고금리 환경에서 형성된 이 불균형은 과잉 저축과 부진한 투자가 맞물리며 금융 불안을 키우고 있다. 이 수치는 2008년 금융위기 직전의 경고음을 떠올리게 한다.

APEC은 미·중이 동시에 참여하는 유일한 역내 협의체다. 1989년 출범 이후 자발적 합의와 비구속적 이행으로 운영됐지만, 이제 역할을 확장해야 한다. 무역 논의에 머물지 말고, 재정·통화·환율을 함께 논의하는 정책 협의의 틀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정책 방향은 분명하다. 미국은 GDP 대비 6.4%에 이르는 재정적자를 향후 5년 안에 절반으로 줄여야 한다. 중국은 9분기째 이어진 디플레이션을 끊기 위해 내수 진작과 지방재정 개편에 나서야 한다. 두 나라가 구조적 불균형을 완화하지 않으면 역내 격차는 더 커질 가능성이 높다.

환율 조정도 함께 진행돼야 한다. 위안화, 엔화, 원화 등 주요 아시아 통화의 실질 가치를 점진적으로 재조정하면 무역 불균형 완화에 도움이 된다. 이런 협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정책의 속도와 방향이 일치해야 한다. 플라자합의(Plaza Accord·1985)가 남긴 교훈은 분명하다. 거시 조정은 협정문이 아니라 정책 공조에서 성공한다는 것이다. APEC이 이런 조정을 주도한다면 단순한 무역 협력체를 넘어 ‘지역 안정 메커니즘’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미시적 절차와 거시적 균형이 함께 작동할 때, 아시아·태평양은 진정한 통합에 가까워진다.

인재와 제도의 교차점, 현장에서 완성되는 협력

교역의 마지막 변수는 사람의 역량이다. APEC 교육 전략(2016~2030)은 고용가능성, 디지털 역량, 이동성을 세 축으로 삼고 있다. 2025년 10월 장관회의에서도 구조개혁과 금융 포용, 혁신이 다시 강조됐다. 대학과 공공 훈련기관은 무역과 산업의 변화에 맞는 실무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교육의 방향은 현장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다. 수출 절차, 전자상거래 규정, 지속가능경영 같은 핵심 주제를 중심으로 한 교육 과정이 기업의 즉각적인 경쟁력이 된다. 이런 실무 교육이 체계적으로 자리 잡을 때 중소기업과 스타트업의 성장 속도는 더 빨라진다. 교육과 제도가 맞물릴 때 APEC 협력은 다음 세대의 성장 기반으로 이어진다.

지방정부와 상공회의소의 역할도 커지고 있다. 단일 창구 통관, 전자 원산지 증명, 사전 신고 제도를 확대하면 초보 수출기업의 첫 거래가 앞당겨진다. TFAP의 핵심은 명확하다. 절차를 단축하고 서류를 줄이면 기업의 비용이 바로 낮아진다. 또 RCEP과 CPTPP의 규정을 교육 과정에 반영하면, 수출입 실무와 지역 규제가 함께 연결된다. 정책의 언어보다 실행의 변화가 중요하다. 제도는 사람을 키우고, 사람은 다시 제도를 확장한다. 이 선순환이 지속될 때 협력은 현장에서 완성된다.

시스템으로 굴러가는 협력의 힘

APEC의 경제협력은 여전히 세계 무역의 절반을 떠받치고 있다. 낮아진 관세, 신속한 통관, 신뢰할 수 있는 이동, 강화된 데이터 보호 체계가 그 기반이다. 미·중 간 협정이 성사되면 이 구조는 더 넓게 확장될 것이다. 협정이 지연되더라도 19개 회원국은 제도를 조정하며 통합을 이어갈 가능성이 높다.

성장의 동력은 회담이 아니라 시스템에서 나온다. 뉴스에 오르지 않는 비용 절감, 확대되는 ABTC, 전자무역의 확산, 글로벌 CBPR의 정착, 그리고 실무 교육의 확장. 이 일상의 개선이 모여 세계 교역의 절반을 움직인다. 현장의 변화는 이미 가시화되고 있다. 공항에서는 출장 인력이 빠르게 입국하고, 항만에서는 통관 절차가 단축되고 있다. 중소기업은 전자 서류 한 장으로 수출 절차를 마치고, 대학 연구진은 데이터 이전 규제를 피해 공동 연구를 진행한다. 이런 변화가 바로 APEC 협력의 결실이다. 정치적 환경이 흔들려도 행정과 기업의 시스템은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그 구조가 지역 경제를 지속적으로 움직인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APEC Economic Cooperation Delivers Even Without a U.S.-China Truce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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