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폴리시] 자본을 움직이는 제도, 동남아 국부펀드의 다음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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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에서 제도로의 전환 규칙이 만든 수익 구조 교실과 전력망을 잇는 성장 모델
본 기사는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의 SIAI Business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SIAI 또는 그 소속 기관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동남아의 성장 둔화는 자본의 부족이 아니라 사업의 구조에서 비롯된다. 지난 3년간 이 지역의 청정에너지 투자는 연평균 720억 달러(약 100조 원)에 달했다. 규모는 작지 않지만, 자금의 흐름이 생산적 투자로 이어지지 못했다. 투자 구조의 병목이 성장의 속도를 늦추고 있다. 2030년까지는 전력망 확충과 산업 인프라 전환을 위해 연간 1,300억 달러(약 180조 원) 이상이 필요하다. 자금의 총량은 충분하지만, 이를 흡수할 사업 구조가 부족하다. 규칙과 표준이 정비되지 않으면 자본은 방향을 잃는다.
교육에서도 같은 현상이 반복된다. 동남아에는 여전히 약 1,800만 명의 아동과 청소년이 학교 밖에 있다. 폭염과 홍수, 태풍 등 기후 충격은 수업을 멈추게 하며 학습 격차를 넓힌다. 교실의 불이 꺼지는 순간, 성장의 엔진도 멈춘다. 단기 재정이나 외자 유입만으로는 이 공백을 메울 수 없다. 핵심은 ‘투자 가능한 프로젝트’를 제도화하고, 공공과 민간이 함께 작동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국부펀드는 자본을 쌓는 금고가 아니다. 이제 국가 전략을 실행하는 투자 플랫폼으로 기능해야 한다. 단순한 자산 운용을 넘어, 위험을 관리하고 규칙을 설계하는 역할이 필요하다. 그렇게 전환될 때 자본은 숫자가 아니라 산업과 정책을 움직이는 힘이 된다.
관심의 초점도 바뀌고 있다. 중요한 것은 ‘자본의 규모’가 아니라 ‘자본의 방향’이다. 어느 정부가 자금을 더 보유했는가보다, 그 자본이 어떤 제도와 계약 구조를 통해 사회로 흘러가는지가 핵심이다. 방향이 정립될 때, 동남아의 국부펀드는 단순한 재무 기구를 넘어 교실과 전력망을 잇는 새로운 성장의 통로가 될 수 있다.

질문의 전환, 자본의 방향을 바꾸다
국부펀드는 오랫동안 잉여자금을 운용하는 수단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지금 동남아의 현실은 다르다. 자본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그 자본이 흘러갈 제도적 통로가 부족하다.
인도네시아는 이 전환을 가장 먼저 시도했다. 2021년 설립된 인도네시아투자청(INA)은 공동투자 플랫폼으로 출범했다. 해외 투자자와의 파트너십을 통해 단순한 자본이 아니라 ‘신뢰’를 유치했다. 2025년에는 대형 국부펀드 다난타라(Danantra)가 출범했다. 은행·에너지·통신 등 수익성 높은 공기업 지분을 묶어, 국가 자본의 방향을 직접 관리하는 구조를 구축했다. 필리핀도 같은 흐름을 택했다. 2025년 마할리까투자공사(Maharlika Investment Corporation, MIC)는 국가전력망(National Grid Corporation of the Philippines, NGCP) 지분 20%를 인수했다. 투자 규모는 약 20억 달러(약 2조 7천억 원)로, 장기 현금흐름을 확보하려는 전략이었다. 규제형 자산을 중심으로 수익 구조를 안정시키는 방식이다. 이는 단순한 재무 투자가 아니라, 시장 규칙을 설계하는 시도에 가깝다.
국부펀드의 성격은 여전히 이중적이다. 상업성과 공공성의 균형을 어떻게 잡을지가 논쟁의 핵심이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의 사례는 방향을 분명히 보여준다. 국부펀드는 자본을 운용하는 손이 아니라, 시장의 규칙을 설계하는 손이 되어야 한다. 국가의 재정이 정책을 설계했다면, 이제 국부펀드는 자본의 질서를 설계한다.
전력망과 교실, 자본이 흐르는 새로운 길
전력망은 동남아 산업의 기반이자 자본이 작동할 첫 시장이다. 산업의 확장과 일상 소비를 함께 지탱하며, 규제에 근거한 안정적 현금흐름을 제공한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35년까지 이 지역의 전력·에너지 투자가 연간 1,900억 달러(약 257조 원)로 확대돼야 한다고 분석한다. 현재의 다섯 배 규모다. 전력망 투자는 그중에서도 연 300억 달러(약 41조 원)로 두 배 이상 늘려야 한다.
이 분야는 국부펀드가 진입하기에 가장 적합하다. 요금 체계가 규제에 따라 고정돼 있고, 장기 수익이 예측 가능하며, 위험이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투자청(INA)의 첫 인프라 투자 사례가 이를 보여준다.2025년 6월, 싱가포르의 DBS은행(DBS Bank)과 유나이티드오버시즈은행(UOB Bank)은 인도네시아 바탐(Batam)의 데이터센터 프로젝트에 6조 7천억 루피아(약 5억 달러·7천억 원)를 대출했다. INA는 이 산업단지의 전력 안정성, 냉각 효율, 데이터 보안 인프라를 통합해 ‘수익이 보이는 공공 자산’을 설계했다.
이 모델은 다른 인프라에도 적용된다. 대규모 태양광 발전, 에너지 저장 시설, 항만 전기화 사업이 그 예다. 기술을 금융의 언어로 바꾸는 과정이자, 공공 인프라를 자산으로 전환하는 실험이다. 핵심은 규칙의 명료성이다. 규제가 분명할수록 사업은 투자자산으로 변하고, 사회적 편익은 장기 수익으로 이어진다. 자본은 충분하다. 그러나 계약 절차가 복잡하거나 요금 기준이 불투명하면 투자자는 움직이지 않는다. 인허가가 지연되거나 보증이 불확실하면 자금의 흐름도 멈춘다. 동남아 전력 투자의 과제는 자본이 아니라 제도다.

주: 2021~2023년 연평균 투자액은 720억 달러(약 99조 원)이며, 2030년까지 1,300억 달러(약 179조 원) 이상이 필요하다.
교육을 자산으로, 사회 인프라의 재구성
교육은 오랫동안 ‘비용 항목’으로 인식됐다. 그러나 이제는 인프라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투자가 이루어질 때 교육의 지속적인 변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동남아에서는 여전히 약 1,800만 명의 아이들이 학교 밖에 있다. 2024년에는 전 세계적으로 2억 4,200만 명의 학생이 폭염, 홍수, 태풍 등 기후 재해로 학습이 중단됐다. 교육 격차는 확대되고 있지만, 공공예산만으로는 이를 메우기 어렵다.
해법은 구조화에 있다. 학교와 보건소의 지붕에 태양광 설비를 설치해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것이다. 이후 절감된 전기요금으로 투자비를 상환하는 에너지 서비스 계약(ESCO)을 적용한다. 정부 보증과 지방예산이 결합하면 위험이 줄고, 투자자는 안정적 수익을 확보할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계약 구조는 공공성과 수익성을 함께 담는다.
교육 서비스도 자산화할 수 있다. 정부는 학습 회복 프로그램, 개별 보충수업, 디지털 교재 공급 등을 발주한다. 지급은 성취도 향상이나 학습 격차 완화 같은 지표를 기준으로 이뤄진다. 국부펀드는 서비스 제공자에게 초기 운영자금을 지원하고, 공공 부문은 결과를 검증해 지급을 확정한다. 이 구조가 정착되면 교육의 회복과 일자리 창출이 동시에 나타난다. 에너지 전환과 교육 투자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순환 구조로 연결된다. 전력망이 산업의 기반이었다면, 교육망은 사회 자본의 기반이 된다.

주: 2022년 260억 달러(약 36조 원)로 감소한 뒤 2023년 290억 달러(약 40조 원)로 소폭 반등했지만, 여전히 2015~2022년 평균 320억 달러(약 44조 원)를 밑돌았다.
자금에서 제도로, 신뢰의 구조를 세우다
자본의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제도의 신뢰다. 국부펀드의 수익은 우연이 아니라 규칙에서 나온다. 전력망 확충, 학교 에너지 개선, 결과 연동 계약은 이미 여러 시장에서 안정적인 수익 구조를 입증했다. 문제는 ‘운용 능력’이 아니라 ‘제도화 능력’이다. 해법은 구체적이다. 표준 입찰서 공개, 녹색·사회 투자 영역의 정관 보호, 독립적이고 투명한 투자위원회, 외부 기관의 성과 검증, 공동투자와 회수(엑시트) 규칙 명시, 이 다섯 가지가 기본이다. 이런 구조가 마련돼야 정치보다 시장의 신뢰가 먼저 작동한다.
다자개발은행들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아시아개발은행(ADB)은 2030년까지 전체 대출의 절반을 기후 금융에 배정할 계획이다. 초기 사업의 위험을 흡수하고, 민간 투자자의 학습 효과를 확산시키는 구조다. 인도네시아 투자청(INA)은 자산과 파트너십 규모를 확대하고 있다. 필리핀의 마할리까투자공사(MIC)는 규제 수익이 보장된 전력 인프라에 투자해 첫해 실적을 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펀드가 아니다. 더 깊고 지속적인 프로젝트의 흐름, 즉 파이프라인이다. 학교의 유지보수와 에너지 개선에서 출발해 지역 전력망과 교육 서비스로 확장해야 한다. 성과 데이터는 공유돼야 하고, 성공 모델은 국경을 넘어 재현돼야 한다.
숫자는 냉정하지만, 방향은 분명하다. 에너지 투자는 두 배가 필요하고, 교실 밖 아이들은 여전히 많다. 그러나 제도가 설계되면 변화는 가능하다. 규칙이 갖춰진 계약이 자본을 부르고, 그 자본이 다시 사회적 가치를 만든다. 기후와 성장의 교차점에서 남는 질문은 하나다. 자본이 언제 다시 사람의 삶으로 연결될 것인가. 답은 멀리 있지 않다. 폭우로 수업이 멈췄던 한 교실에 불이 다시 켜지는 순간, 국부펀드는 숫자를 넘어 사람의 시간을 바꾼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From Capital to Classrooms: The Demand Case for Southeast Asia Sovereign Wealth Funds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