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미투자 연 200억 달러 상한” 한미 관세협상, 실행 가능한 합의로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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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익 배분·연간 투자상한 구체화 “7월 예비 합의와 판박이” 분석 美 무역 전선 마지막 퍼즐은 중국

한국과 미국이 지난 7월 잠정 합의에 도달한 관세·투자 교환 틀을 실제로 집행 가능한 형태로 묶어냈다. 핵심은 한미 간 관세 부담을 일정 수준으로 고정하고, 한국이 투자 등을 통해 미국 산업 부흥에 협력하는 구조를 공식화했다는 점이다. 이로써 한국은 외환시장 충격을 최소화할 속도 조절 장치를 확보했고, 미국은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과 일본에 이어 한국까지 한 축으로 세우면서 올 하반기 숙원 과제였던 ‘외교 패키지’의 마지막 페이지에 성큼 다가섰다. 외교계에선 이번 합의가 양국의 정치·통상 두 영역의 부담을 동시에 덜어낸 절충형 결과에 가깝단 평가를 내놨다.
시장 충격 최소화에 방점
30일 정부에 따르면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전날 경북 경주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열린 확대 오찬 겸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관세협상의 세부 조항에 최종 합의했다. 양국은 3,500억 달러(약 497조원) 규모의 대미 금융투자를 현금 2,000억 달러(약 284조원)와 조선업 협력 1,500억 달러(약 213조원)로 구성하기로 뜻을 모았고, 상호 관세는 기존 예비 합의에 따라 15%로 인하했다. 조선업 프로젝트는 한국 조선사가 주도해 미국 내 선박·해양플랜트 인프라를 공동 구축하는 구상으로, 단순 투자뿐 아니라 보증 및 금융 지원을 포함한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현금 투자분은 연간 200억 달러(약 28조4,000억원) 상한 내에서 단계적으로 집행한다”며 “외환시장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번 합의는 외환 조달 방식을 국제시장에서 진행하도록 설계해 국내 금융시장에 직접적 부담이 가지 않도록 했다”며 “정부 보증채 발행 등도 대비한 상태”라고 밝혔다. 조선업 협력과 관련해선 “장기 선박금융을 포함해 국내 조선업체의 수주 경쟁력 강화로 이어질 것”이라며 “미국 제조업 리쇼어링(생산시설 국내 이전) 전략과도 맞물린 구조”라고 설명했다.
품목별 세부 조항도 조정됐다. 의약품과 국내 생산되지 않는 천연자원 등은 무관세를 적용받게 된다. 특히 반도체 부문은 대만 등 경쟁국 대비 불리하지 않은 수준으로 조정돼 산업계 불확실성을 크게 줄였다. 농업 분야에서도 쌀·쇠고기 등 민감 품목의 추가 개방이 차단되면서 농민 단체의 우려를 일정 부분 가라앉혔다. 이번 협상과 관련해 산업통상자원부는 “관세 인하 폭은 다소 제한적이지만, 반도체·조선 등 핵심 수출 품목이 혜택을 받게 돼 실질적 수익 효과는 크다”고 말했다.
정치권과 통상 전문가 사이에선 이번 정상회담이 단순한 무역 협정을 넘어 한미 간 전략 산업 동맹의 틀을 재정립했다는 시각이 주를 이룬다. 한국이 대규모 투자를 집행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환율 방어와 재원 안정성 확보를 동시에 달성했다는 평가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이번 협상은 외환시장 안정을 담보하면서 산업별 협력 구도를 구체화한 점에서 사실상 자유무역협정(FTA) 붕괴 이후 첫 실질적 대안”이라며 “관세·투자·산업협력이 결합된 ‘경제안보형 패키지’로 진화했다”고 자평했다.

1차 합의와 큰 틀에서 유사
정부는 이번 합의를 협상의 마무리 단계로 규정했다. 그 배경에는 지난 7월 양국이 먼저 큰 틀의 관세·투자 교환 구조를 만들어 둔 뒤, 100여 일 동안 실무 협상을 이어온 과정이 자리하고 있다. 첫 협상에서 한국은 일본·유럽연합(EU)과 동일 선상에 서는 것을 1차 목표로 삼았고, 미국은 자국 제조업 부흥과 우방국의 투자 참여를 결합한 ‘투자 대 관세 인하’ 공식을 한국에도 똑같이 적용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했다. 이번 합의는 당시 만든 골격을 유지한 채 집행 속도와 외환시장 부담 완화, 조선 협력의 실제 운용 방식처럼 실무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 지점을 구체화하는 형태로 이뤄졌다.
앞선 1차 합의에서 미국은 한국산 제품에 25% 상호관세 부과 방침을 한발 물리고, 자동차·자동차부품을 포함한 상호관세를 15%로 통일하는 대신 한국이 대미 금융투자와 에너지 구매를 약속하는 연계 구조를 요구했다. 이를 두고 우리 정부는 달러를 한꺼번에 투입할 경우 환율이 출렁일 수 있다는 우려를 내비쳤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이 지불할 3,500억 달러는 선불”이라는 발언을 반복하며 우려를 키웠지만, 이번에는 ‘투자 진척에 맞춘 단계적 납입’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는 불과 3개월 사이 우리 정부가 끌어낸 가장 실질적 성과로 평가된다.
정치권에선 이 대통령의 ‘노딜’ 전략이 일부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회담 직전인 27일 기자들과 만나 “미국의 이익이 한국에 재앙이 되어선 안 된다”면서 “EU식 관세 합의도 준거가 된다”고 힘줘 말했다. 이러한 발언은 미국이 요구하는 투자 총량과 관세 인하라는 큰 틀을 그대로 가져가되, 한국이 요구한 집행 방식·속도 조절·원리금 보전 장치는 관철시키겠다는 의도로 풀이됐다. 결과적으로 한국은 7월과 같은 틀에서 더 양보하지 않고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게 됐다.
나아가 우리 정부는 △외환시장 부담 최소화 △투자 중 상업적 타당성 없는 프로젝트 배제 △납입 시기 조정 근거 마련 등 방어 조항을 추가하며 시장 충격을 최소화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동맹국 투자 유치 성과를 빠르게 공개하려는 미국의 국내 정치 일정이 한국에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해석이 제기됐다. 정치·외교적으로 민감한 사안에서 잦은 입장 번복을 보여 온 트럼프 행정부의 전례를 되짚어 볼 때 이번 합의가 추후 변경될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지만, 지금까지 합의된 내용은 한국 경제에 타격을 최소화하는 수준에서 실행 가능하다는 데는 이견이 없는 상황이다.
트럼프식 ‘외교 패키지’ 성큼
미국으로서도 이번 한국과의 합의를 통해 올 하반기 목표로 하던 ‘외교 패키지’ 완성에 한발 다가설 수 있게 됐다. 트럼프 행정부는 최근 아세안, 일본, 한국을 잇달아 돌며 관세 인하와 투자 약속을 묶은 일괄 발표 구상을 추진해 왔다. 아세안에서는 말레이시아와 희토류·핵심 광물 공급망 협정을 체결하고, 태국·캄보디아와는 무역 및 안보를 연계한 합의를 도출했다. 또 일본에서는 4,000억 달러(약 568조원) 규모의 투자 후보군을 확정하고, 희토류 협력각서(MOC)를 공개하며 협력 범위를 넓혔다.
이제 남은 대상은 중국이다.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은 지난 25일(이하 현지시각)과 26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중국과 고위급 무역회담을 진행한 뒤 CBS와의 인터뷰에서 “100% 관세 위협은 사실상 테이블에서 내려갔다(effectively off the table)”고 밝혔다. 해당 발언은 미국이 한국·일본·아세안에 제시한 것과 비슷한 틀을 중국에도 들이밀 수 있게 됐다는 판단 아래 위협 수위를 조절한 것으로 해석된다. 한국과의 합의에서 연간 투자 상한을 정해 외환시장 부담을 덜어준 것처럼 중국과의 협상에서도 품목·시기·규모를 세밀하게 쪼갠 단계적 철회안이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결과적으로 이번 한미 합의는 단순한 양자 간 결과를 넘어 트럼프식 무역 압박 전략의 완결 단계로 평가된다. 아세안과 일본, 한국을 거치며 미국은 관세 완화와 투자 약속을 맞바꾸는 일관된 구조를 만들었고, 이를 중국과의 담판을 위한 전초 작업으로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 전략이 중국에서 좌초할 경우, 지금까지의 합의는 ‘정치적 이벤트’로 퇴색하게 된다. 반대로 중국과의 협상까지 무사히 마무리하면, 트럼프 행정부는 “100% 관세 위협을 철회시키고, 미국 중심의 무역 질서를 재편했다”는 외교적 성과를 내세울 수 있다. 한국과의 합의는 그 퍼즐의 한 조각이자, 미·중 전략 경쟁 속에서 다시 비교 기준으로 소환될 수 있는 불안 요인을 동시에 떠안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