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화 곳간 굴린 돈'으로 연 200억 달러 대미투자, 시장 여력 있지만 환율 상승 압력될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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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보유액 운용수입 150억 弗 나머지는 펀드 기금 채권 활용 원화 장기 약세 리스크는 과제

한국이 미국과의 관세협상에서 연간 최대 200억 달러(약 28조5,000억원)씩, 총 2,000억 달러(약 285조원)를 미국에 직접 투자하기로 했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연간 상한(캡)을 씌우고 협상을 타결했다는 점에서 긍정 평가를 내리면서도, 정부가 위험한 투자를 하면 시장이 언제든 불안해질 수 있다는 우려를 내놓고 있다. 일정 부분 빚을 내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환율 상승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전망도 제기된다.
한미 관세협상 세부합의, 對美 투자 연 200억 달러 상한
30일 대통령실은 이날 한미 정상회담 직후 3,500억 달러(약 500조원)의 대미 투자와 관련해 현금 투자 2,000억 달러, 조선업 협력 1,500억 달러(약 215조원)로 구성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브리핑에서 “2,000억 달러 투자는 한 번에 이뤄지는 게 아니라 연간 200억 달러 한도 내에서 사업 진척 정도에 따라 달러로 투자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업이 됐다고 한 번에 돈을 보낼 일이 없다. 사업 진척 정도에 따라 보내기 때문에 처음에는 착수금 정도만 간다”고 전했다.
연납액 200억 달러는 한국은행과 기획재정부가 밝힌 ‘외환시장에 충격을 주지 않고 조달할 수 있는 최대 규모(연간 150억~200억 달러)’의 최상단에 해당한다. 연 200억 달러 조달 방법으로 김 실장은 “우리 외환 시장에서 바로 조달하는 게 아니라 외화 자산의 운용 수익을 활용할 생각”이라며 “이자, 배당 등 운용 수익이 적지 않아서 상당히 많이 활용할 수 있을 것 같고, 만약 그중 일부를 기채(채권 발행)하면 정부 보증채 형식으로 할 듯하다”고 말했다.
투자 프로젝트 선정은 미 상무부 장관이 위원장을 맡는 투자위원회가 하는 구조다. 한국 산업부 장관이 협의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상호 협의하게 된다. 김 실장은 “원리금이 보장되는 상업적 합리성이 있는 프로젝트만 추진하기로 합의하고, 이를 양해각서(MOU) 문안에 명시하기로 했다”며 “상업적 합리성이란 투자 금액을 충분히 환수할 수 있는 현금 흐름이 보장된다고 투자위원회가 선의에 따라 판단하는 투자를 의미한다”고 밝혔다.

수은 30억 달러 추가 조달 여력, 산은도 참여 땐 60억 달러까지 가능
9월 말 기준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은 4,220억 달러(약 602조원)다. 한국은행은 이 가운데 약 90%인 3,600억 달러(약 515조원)를 미국 국채 등 유가증권에 투자해 매년 150억 달러 안팎(약 5%)의 수익을 올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까지는 운용 수익을 시장에 재투자했지만, 앞으로는 대미 투자펀드 재원으로 돌릴 계획이다. 나머지 50억 달러(약 7조원)는 대미 투자펀드 기금채를 활용할 계획이다. 기재부가 한은에서 일정 규모의 외환보유액을 빌려 기금을 조성하고, 이 기금이 정부의 보증을 받는 달러 채권을 발행하는 구조다.
미국과 협상에 앞서 우리 정부는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이 해외에서 조달할 수 있는 자금이 어느 정도 인지 미리 파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먼저 수은은 자체 검토한 결과 추가 발행이 가능한 외화채 규모를 연간 30억 달러(약 4조3,000억원) 수준으로 추산했다. 현재 수은은 채권 발행을 통해 연간 총 42조원 규모의 자금을 매년 조달해 오고 있다. 이 중 외화채권 규모는 약 19조원으로 전체의 45% 수준이다. 시장 수요를 감안했을 때 외화채 발행 규모를 연간 50조원 수준으로 늘려도 큰 무리가 없을 것으로 수은은 보고 있다.
산은의 경우 통상 연 80조~90조원 규모의 자금을 조달하는데 이 중 외화 차입 규모는 12조원 규모다. 이에 정부 안팎에서는 산은도 수은과 비슷한 수준으로 외화채를 추가 발행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 정부 관계자는 “대외 신인도를 고려할 때 국책은행이 해외에서 상당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30일 열린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대미 투자 자금 조달 방식과 관련해 “한국은행 외환보유액 운용수익, 수은·산은 정책금융 조달, 필요시 해외 차입을 병행한다”고 말했다.
원화 약세 리스크 재부상 가능성
시장에서는 이번 대미 투자 협상을 두고 일단 ‘선방’했다는 반응이 우세하다. 30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 거래일보다 5.2원 내린 1426.5원으로 주간거래를 마쳤다. 향후 1,300원대로 낮아질 가능성도 거론된다. 그러나 대형 해외 투자라는 관점에서 보면 중장기적인 영향을 단언하기는 어렵다는 분석도 나온다. 예를 들어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파이프라인 개발 사업처럼 위험이 큰 곳에 투자할 경우 시장이 부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다는 우려다.
대미 투자 자체가 중장기적으로는 환율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신한투자증권은 “해외투자 확대로 최근 감소로 전환된 외화 순공급에 연간 200억 달러 규모의 공급 축소가 더해지면 외화 수급은 간접적으로 악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시티은행도 "한국 기업들의 달러 수출대금 원화 환전 규모가 줄어들어 향후 몇 년간 원화 약세 리스크가 재부상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조선업 협력 프로젝트에서 민간 기업이 직접투자를 진행할 경우 수익을 달러로 받고 다시 미국에서 사용하는 사례가 늘어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대다수 전문가는 한국 경제에 미칠 장기적 영향에 관해서도 판단을 유보했다. 한 경제학자는 “투자 규모, 분납 기간, 투자 방식에서는 우려를 덜었다”면서도 “외채를 발행하더라도 금액이 크지 않다고 했는데, 정부보증채가 국제시장에서 잘 팔릴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또 다른 경제학자도 “정부는 국내에서 외채를 동원하지 않겠다지만, 국책은행 등이 보증을 서는 형태로 외화를 조달하면 결국 외채가 되고, 국민이 갚아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해 구 부총리는 “외환시장 여건에 따라 납입 시기와 금액 조정 여건의 근거를 마련했다”며 “투자 약정은 2029년 1월까지나 실제 조달한 사업의 내용에 따라 장기간에 걸쳐서 하므로 외환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일 전망”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통화스와프 체결이 불발된 것에 대해 “통화스와프를 하게 되면 금리를 4% 정도 지불해야 한다”며 “200억 달러 한도로 투자한다고 했을 때 외환시장에 애로가 있으면 이 한도를 낮출 수 있도록 한 게 오히려 비용이 안 들고 국익에 훨씬 유리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