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폴리시] 시설에서 사람으로, 태평양 기후 재정의 전환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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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은 흘러도 역량이 남지 않는 구조를 바꿔야 하는 시점 회복력은 콘크리트가 아니라 교실에서 만들어지는 현실 0.2%의 지원을 넘어 100%의 주권으로 나아가는 방향
본 기사는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의 SIAI Business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SIAI 또는 그 소속 기관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태평양의 기후 대응은 여전히 현장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2021~2022년 전 세계 기후 적응 자금 중 도서국에 전달된 비중은 0.2%, 약 20억 달러(약 2조 7천억 원)에 그쳤다. 그러나 이 지원의 대부분은 방파제나 배수시설 같은 단기 건설 사업에 머물러 있다. 시설은 복구되지만 운영은 지속되지 않는다. 학교와 병원, 전력망을 관리할 인력이 부족해 재해가 닥치면 학습과 행정이 동시에 멈춘다. 재난의 충격이 곧 시스템의 마비로 이어지는 구조다. 기후 자금이 실질적 효과를 내려면 사람과 제도에 대한 투자가 중심이 돼야 한다. 태평양의 기후 교육 체계를 강화해야 행정이 작동하고, 행정이 살아야 인프라도 기능한다. 지속 가능한 적응은 시설이 아니라 사람에서 출발한다.
프로젝트에서 사람으로
기후 재정(climate finance)의 초점은 여전히 시설에 맞춰져 있다. 예산은 방파제와 배수망 같은 건설 사업에 집중되지만, 이를 운영할 인력과 제도는 함께 성장하지 못했다. 1993년 이후 서태평양의 해수면은 10~15cm 상승했고, 속도는 세계 평균의 두 배다. 같은 기간 해양 열파 발생도 두 배로 늘었다. 위험은 커졌지만, 대응은 여전히 구조물에 머물러 있다.
이 한계는 과거 행정 모델의 유산과 맞닿아 있다. 20세기 초 유럽과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도서국들은 외부에서 도입된 제도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현지 정부가 정책을 설계하거나 기술을 축적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 영향은 지금도 이어진다. 많은 기후 프로젝트가 외부 기술자와 단기 컨설턴트 중심으로 추진되고, 유지관리 단계에서 지역 정부는 다시 외부 지원에 의존한다.
이제 방향을 바꿔야 한다. 기후 적응 정책의 중심은 시설이 아니라 사람이다. 교사 양성, 직업기술교육(TVET), 학교 리더십 훈련은 단기 사업이 아니라 국가 전략의 핵심 축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각국의 교육 예산과 국제기구의 지원을 연계해 지속 가능한 인력 양성체계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기후 적응형 교실 설계, 빗물 재활용, 전력 복구 기술은 현지 인력이 직접 다루는 구조여야 한다. 그래야 외부 지원이 단발성 사업이 아닌 자립가능한역량으로 남는다. 핵심은 기술보다 제도다. 지식과 숙련이 축적되지 않으면 어떤 인프라도 다음 폭풍을 버티지 못한다.

주: 2021~2022년 전 세계 기후 적응 재원의 0.2%만이 SIDS에 배분되었다.
교육이 멈추면 사회도 멈춘다
기후 변화가 학교의 일상을 멈춰 세웠다. 2024년 전 세계에서 약 2억 4천만 명의 학생이 극한 기상으로 수업을 중단했으며, 태평양은 그 피해의 중심에 서 있다. 2023년 남서 태평양의 바누아투(Vanuatu)에서는 열대 폭풍 ‘케빈’과 ‘주디’가 48시간 간격으로 연속 상륙했다. 수백 개의 교실이 파괴돼 학생들은 한 달 가까이 천막에서 수업을 이어가야 했다.
학교가 멈추면 사회도 멈춘다. 교육이 끊기면 행정과 산업의 인력 공급망이 함께 끊긴다. 기상관측소, 수자원공사, 해양연구소의 인력은 모두 교실에서 자란다. 교육의 지속성은 복지정책이 아니라 국가 기능을 지탱하는 기반 인프라다. ‘태평양 교육 현황 보고서 2024’에 따르면, 이 지역의 고등학교 미진학률은 2010년 34%에서 2023년 17.7%로 절반 가까이 낮아졌다. 무상교육 확대와 교사 지원체계 강화의 성과다.
그러나 이 진전은 불안정하다. 태평양의 해수온 상승 속도는 세계 평균의 세 배에 달해, 한 번의 폭풍만으로도 10년의 교육 성과가 사라질 수 있다. 교육은 기후 적응의 출발점이다. 학교가 서야 정책이 움직이고, 배움이 이어져야 사회가 복구된다. 회복력은 콘크리트가 아니라 교실에서 만들어진다.

주: 태평양 지역의 고등학생 미진학률은 2010년 34%(핑크)에서 2023년 17.74%(빨강)로 절반 가까이 감소했다.
학교를 지키는 기후 재정의 기준
기후 재정의 목적은 예산 집행이 아니라 교육의 지속성 확보에 있다. 어느 사회든 수업이 멈추면 행정과 산업의 기반도 흔들린다. 따라서 자금의 효과는 금액이 아니라 학교가 수업을 이어간 기간으로 평가해야 한다. 우선 학교별 경보 체계를 세워야 한다. 현재 도서국의 3분의 1만 다중 위험 경보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교육부와 기상 기관을 연결한 통합 체계를 구축해 위험 수준에 따라 즉시 대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폭우나 열대폭풍이 접근할 때 수업 조정과 임시교실 전환이 신속히 이뤄지는 구조가 필요하다.
다음은 교원 양성 체계의 전환이다. 교원 양성기관과 기술학교는 기후 대응 역량을 필수 교육과정으로 포함해야 한다. 전력 복구, 식수 관리, 교실 온도 조절처럼 현장에서 필요한 운영 기술을 중심으로 교육해야 한다. 이 과정은 단순한 연수가 아니라 재난 이후 수업이 끊기지 않게 하는 실무로 이어져야 한다. 또한 인프라 투자 구조도 바꿔야 한다. 국제개발은행과 다자기구가 지원하는 사업에는 교육 항목을 의무화해야 한다. 시설 예산의 일정 비율을 교원 훈련과 운영 역량에 배정하면 외부 자금이 건물이 아닌 제도로 남는다.
마지막으로 성과 공개 체계를 세워야 한다. 출석률, 복구 기간, 온도와 식수 안전 지수를 통합 관리하는 공개 시스템을 운영하면 자금의 투명성이 높아진다. 성과의 기준은 투입된 예산이 아니라 지켜낸 학습일 수다. 결국 기후 대응의 성공은 건설 규모가 아니라 교육이 멈추지 않는 능력으로 증명된다. 학교가 다시 문을 열고 수업이 이어질 때, 그 사회는 이미 회복력을 갖춘 국가다.
배움을 세우는 태평양의 주권
태평양의 기후 재정은 여전히 외부의 설계에 의존한다. 정책은 밖에서 결정되고, 실행은 안에서 수행된다. 이 구조가 계속되면 자금은 움직여도 지식과 기술은 축적되지 않는다.
이제 지원국의 역할이 달라져야 한다. 탄소 배출국과 개발 파트너는 단순한 재정 지원을 넘어 지식과 제도를 함께 설계하는 협력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 이를 위해 장기 장학 프로그램, 섬 지역 대학의 상설 연구직, 교원 양성 트레이너 제도의 마련이 필요하다. 교육청과 학교 간 조달 체계를 통합해 섬마다 자재 품질의 격차를 줄이는 일도 시급하다. 무엇보다 기후 교육의 설계권은 현지 교육자에게 돌아가야 한다. 지역의 언어와 지식을 토대로 한 정책만이 지속성을 갖는다.
기후 재정의 목표는 벽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세대를 세우는 데 있다. 바다의 상승보다 배움이 빠를 때, 그 사회는 무너지지 않는다. 재난 이후에도 교실이 불을 밝히는 장면은 단순한 복구가 아니라 자립의 회복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선언이 아니라 실행이다. 0.2%의 지원이 아닌 100%의 주권, 그리고 배움을 이어갈 권리다. 교실의 불빛이 꺼지지 않을 때, 태평양의 미래는 생존을 넘어 성장으로 나아간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Pacific Climate Education Is the Missing Pillar of Island Resilience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