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인매도폭탄·해외투자쏠림에 ‘구두개입 레벨’도 넘어선 원·달러 환율, 산업계 치명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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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 협상 타결에도 거꾸로 오르는 환율 對美 투자 年 200억 달러 부담 작용 근본적 원인은 성장엔진 둔화와 자본유출

한미 협상 타결로 관세 불확실성이 걷혔지만 원·달러 환율은 여전히 1,400원을 훌쩍 넘기고 있다. 외환보유액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정부의 설명에도 달러 수요 증가와 향후 재정 부담에 대한 경계감이 시장 심리를 짓누르는 모습이다. 여기에 서학개미의 해외 주식 투자 확대와 유가증권시장(코스피)에서의 외국인 순매도 증가도 원화 약세를 이끌었다. 이에 시장에서는 저성장 국면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원화 가치를 지탱할 동력도 부족해 고환율이 장기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정부보증채, 재정부담 확대 우려
6일 서울 외환시장에 따르면 한미 협상 타결 소식이 전해진 지난 10월 29일 야간 거래에서 환율은 일시적으로 1,419.6원까지 급락했으나, 이후 반등하며 1,421원에 마감했다. 이후 환율은 상승세로 전환해 오름세를 이어갔으며, 6일에는 1,447원까지 치솟았다. 그런데 당초 시장에서는 협상 타결 이후 원·달러 환율이 최소 20~30원 하락할 것으로 예상했다. 한미 협상 이슈가 불거지기 전 환율이 1,380원대였던 점을 감안할 때, 관세 리스크 해소가 곧 환율 하락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10원 남짓 하락한 뒤 다시 반등하면서, 기대감이 빠르게 식는 분위기다.
전문가들은 환율이 쉽게 하락하지 않는 이유로 정부 외환보유액 증가 폭 제한을 꼽는다. 한국 정부가 현금으로 조달하기로 한 2,000억 달러(약 290조원) 규모가 작지 않다는 점이 우려를 키웠다. 앞서 정부는 매년 최대 200억 달러(약 29조원)씩 10년에 걸쳐 납부하되, 외환보유액을 직접 사용하지 않고 외화자산 운용수익(150억 달러·약 21조원)과 신설되는 정부가 보증하는 투자펀드 기금채(50억 달러·약 7조원)를 활용하겠다고 밝혔다. 외환시장 충격을 최소화하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외화 운용수익 역시 외환보유액에 포함되기 때문에 당장 외화자산이 줄지 않더라도 장기적으로 외환보유액 증가 폭이 제한될 가능성이 크다. 중동의 지정학적 갈등으로 달러가 초강세를 보였던 작년 4월과 같은 상황이 재연된다면 외환당국의 시장 개입 여력을 줄이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기업들의 해외투자 확대도 환율 하락을 제약하는 요인이다. 관세 협상 직후 정부는 우리 기업이 미국 조선업 협력 분야에 1,500억 달러(약 217조원)를 투자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여기에 한국가스공사와 대한항공, 한화오션, HD현대 등 국내 기업들이 이미 예고한 투자 계획까지 반영하면 총 투자액은 더 늘어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에서 관세 협상과 별개로 한국 기업들이 밝힌 투자액이 6,000억 달러(약 868조원)에 달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순대외자산, GDP 55% 수준까지 확대
환율 상승의 더 근본적인 원인은 국내 성장엔진 둔화와 자본 유출 구조의 불균형이다. 수출 확대로 달러 유입 통로를 넓힐 가능성은 갈수록 낮아지는데 미국 주식에 대한 해외투자는 빠르게 늘어 달러 수요가 커지고 있어서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 지표가 우리나라 순대외자산(Net Foreign Asset, NFA)의 변화다.
한국은행이 5일 발표한 ‘순대외자산 안정화 가능성 평가 및 시사점’ 이슈노트에 따르면 순대외자산은 지난해 4분기 처음으로 1조 달러(약 1,147조원)를 돌파했다. 또 올해 6월 기준 국내총생산(GDP) 대비 순대외자산 비율은 55.7%로 역대 2위 수준이다. 국가 전체에서 한 해 벌어들이는 돈의 절반이 넘는 자금이 해외에 나가 있다는 의미다. 미국 등 해외 증시 강세가 이어지면서 한국인은 국내 대신 해외 주식으로 관심을 돌렸고, 순대외자산 증가로 이어졌다. 겉으로는 돈을 벌고 있지만(경상수지 흑자), 그 돈이 국내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해외로 빠져나가는(자본수지 적자) 역설적인 상황이다.
이는 국내 자본시장의 투자 기반 약화와 환율 약세 압력을 높인다. 또한 이러한 자금 유출은 결국 국가 성장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내국인의 해외투자소득에서 외국인의 국내투자소득을 뺀 순해외투자소득 비중은 2000~2008년 0.7%에서 2015~2024년 4.1%로 6배가량 늘었다. KDI는 “순해외투자가 늘어난 것은 국내 생산성이 하락한 영향”이라며 “국내투자가 부진한 가운데 해외투자는 지속적으로 확대되면서, 국내경제 활력이 저하될 수 있다”고 짚었다. KDI에 따르면 생산성이 0.1%포인트 하락할 때마다, 기업의 국내 자본투입이 0.05%포인트 줄어든다. 생산성 저하는 직접적으로 GDP를 낮추는데, 동시에 국내 자본이 줄어 GDP를 한 번 더 끌어내리는 식이다.
연사흘 지속된 외국인 주식 순매도도 환율에 영향을 미쳤다. 지난달까지 2개월 연속 코스피를 순매수했던 외국인은 이달 들어 코스피를 3거래일 연속 팔고 있다. 4일에 이어 5일에도 코스피를 2조원 넘게 팔아치우며, 지난 4월 7일 상호관세발 급락장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고, 6일에도 2조5,180억원 순매도로 증시를 끌어내렸다. 통상 외국인이 국내 주식을 팔고 원화를 달러로 바꿔 나갈 수 있다는 우려는 환율 상승 압력으로 작용한다. 원화 환율이 오르면 외국인 입장에서는 환차손이 생기기 때문에 주식 매도세를 더 자극하는 악순환이 생길 수 있다.
글로벌 달러화 강세도 원화 가치 하락을 부추겼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제롬 파월 의장이 매파적(통화긴축 선호) 발언을 이어가자 글로벌 자금이 다시 달러로 모이고 있다.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도 5일 100.2선까지 오르며 약 3개월 만에 100선을 회복했다. 미 연방정부 셧다운(업무 일시 정지) 장기화로 인한 유동성 부족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내각 출범 이후 이어진 엔화 약세도 달러 강세를 이끌고 있다.
산업계 직격탄에도 당국 개입 여력 제한
주목할 점은 다음 상단이다. 시장 전문가들은 원·달러 환율 상방 압력이 아직 해소되지는 않았다고 본다. 여전히 시장 불확실성이 큰 만큼 환율 하락까지 다소 시간이 걸릴 수 있는 상황이다. 일각에서는 한동안 고환율 기조가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도 제기된다. 특히 원·달러 환율이 1,500원대까지 높아질 수 있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는 분위기다.
이는 국내 산업계에 치명타다. 가뜩이나 트럼프 행정부발 관세로 시름이 깊어지고 있는데 여기에 환율까지 급등하면 조달 비용이 폭등하기 때문이다. 한 가전업계 관계자는 "환율이 오르면 단적으로 수출 경쟁력이 좋아진다고 볼 수 있지만, 수입해야 하는 원자재·부품 비용이 그만큼 오르기 때문에 부담이 커질 수 있다"며 "과거와 달리 해외 생산기지가 다변화한 상태에서 환율을 비롯한 불확실성이 장기화하는 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전했다. 반도체업계도 고환율 장기화를 우려하고 있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원자재 비축 체계를 갖추고 있어 단기적인 영향은 미미하겠지만, 환율이 높은 수준을 이어가면 투자비와 조달 비용 부담이 커질 수 있다"며 "구체적인 조치가 나올 때까지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항공업계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최근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을 중심으로 국제선 여객이 회복세를 보이고 있음에도 환율 압박으로 부정적 영향을 받게 됐다. 항공사는 항공기 리스비, 유류비, 정비비 등 비용의 상당 부분을 달러로 결제하기 때문에 환율이 오르면 이익이 빠르게 줄어든다. 대한항공의 경우 원·달러 환율이 10원 오를 때마다 350억원가량의 외화평가손실이 발생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4분기에도 고환율, 항공운임 경쟁 등으로 실적이 순탄치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며 “소비자 입장에서도 환율이 높아지면 여행 경비에 대한 부담을 느끼기 때문에 여객 수요도 둔화할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이에 업계에서는 외환당국이 즉각 환율 방어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으나, 일각에서는 당국이 개입 타이밍을 보고 있는 것 아니냐는 견해도 나온다. 지난달 외환당국이 1년 6개월 만에 공동 구두개입에 나섰을 당시의 환율은 1,430원 수준이었는데 현재는 당시보다 20원이 훌쩍 뛴 것이어서 당국의 경계감도 그만큼 높아졌지만, 변동성 측면에서 당장 나서긴 어려울 것이란 분석에서다. 1,450원이 심리적으로 중요한 레벨이기는 하지만 글로벌 달러 강세라는 흐름 속에 원화의 상대적 약세가 두드러지는 것이 아니라면 개입을 통한 실익이 크지 않다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일본의 다카이치 내각이 ‘아베노믹스 2.0’을 표방하며 초저금리·엔저 기조를 강화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원화 강세를 유도할 경우 한국 수출 경쟁력의 추가 하락이 불가피하다. 특히 반도체·기계·자동차 등 주요 수출산업의 글로벌 시장점유율이 정체된 상황에서 환율 안정만을 목표로 한 정부 개입은 자칫 자해로 이어진다고 판단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