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파이낸셜] 국경 없는 노동, 새 불평등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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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의 무게중심, 제조업에서 디지털 서비스로 이동 국가 간 격차는 좁아지고 사회 내부의 불평등은 심화 기술과 무역 변화에 대응하는 새로운 제도 개혁의 시점
본 기사는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의 SIAI Business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SIAI 또는 그 소속 기관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경을 넘어 일하는 인력이 급증하고 있다. 2024년 전 세계에서 온라인으로 거래된 서비스 수출액은 약 4조6,400억 달러(약 6,300조원)에 달했다. 상품보다 빠르게 성장한 이 시장은 이미 세계 서비스 무역의 절반을 넘었다. 한국의 프로그래머가 미국 기업의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필리핀의 회계 담당자가 유럽 중소기업의 장부를 관리하며, 인도의 상담원이 글로벌 고객을 응대한다. 일터는 여전히 개인의 책상이지만, 실제로는 세계와 연결돼 있다.
기업들은 비용 절감을 위해 해외 인재를 적극 채용하고 있다. 그만큼 국내 임금은 압박을 받는다. 국가 간 소득 격차는 줄었지만, 한 나라 안에서는 불평등이 확대됐다. 세계화의 과제는 더 이상 개방의 여부가 아니라, 그 이익을 어떻게 사회 안에서 공정하게 분배할 것인가로 옮겨가고 있다.
제조업을 넘어 서비스로 확산된 세계화
세계화가 불평등을 키우는 방식은 변하고 있다. 초기의 충격은 제조업에서 시작됐다. 이른바 ‘차이나 쇼크’로 불리는 현상은 2000년대 이후 중국산 수입품이 미국과 유럽 시장을 빠르게 잠식하면서 공장 폐쇄와 일자리 상실을 초래한 사건이다. 연구 결과, 이러한 충격은 단기적 타격에 그치지 않고 지역 경제의 장기 침체로 이어졌다. 과거처럼 노동시장이 자동으로 회복된다는 가정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이제 변화의 무게는 서비스 산업으로 이동하고 있다. 2024년 전 세계 서비스 교역 규모는 약 8조7,000억 달러(약 1경1,800조원)에 달했으며, 이 중 절반 이상이 온라인으로 거래되는 디지털 서비스였다. 클라우드 관리, 회계, 디자인, 원격 교육 등 컴퓨터와 인터넷만으로 수행 가능한 업무가 급증하면서, 필리핀이나 인도의 전문 인력이 미국·유럽 기업의 업무를 맡는 일이 일상화됐다.
이로 인해 세계 전체의 생산성은 높아졌지만, 각국 내부의 임금 격차는 오히려 벌어졌다. 기업이 더 저렴한 해외 인력을 활용하면서 단순·반복 업무의 임금은 정체된 반면, 기술과 관리 역량을 가진 고숙련 인력의 보상은 빠르게 늘었다. 결국 성장의 과실은 상위층에 집중됐고, 중간층과 저임금 근로자는 상대적으로 뒤처졌다. OECD에 따르면 상위 10%의 소득은 하위 10%의 8배를 넘는다. 세계화가 어떤 지표에서는 성장을, 또 다른 지표에서는 불평등을 보여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 국가(X축), 지니계수(Y축)/생산 이전으로 인해 개도국에서 소득 불평등이 선진국보다 더 크게 악화되었다.
원격근무와 인공지능이 바꾸는 노동시장
세계화의 새로운 중심은 원격근무와 인공지능(AI)이다. 온라인 플랫폼과 협업 기술이 발전하면서 국경을 넘어 수행할 수 있는 업무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옥스퍼드대의 ‘온라인 노동지수(Online Labour Index)’에 따르면, 시차가 다른 국가 간 원격 채용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이는 전문직과 사무직이 포함된 새로운 형태의 국제 교역으로 자리 잡고 있다.
AI 도입 속도도 격차를 키우고 있다. 인공지능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기업은 생산성과 임금이 빠르게 상승하지만, 그렇지 못한 기업은 정체된다. 같은 직종 안에서도 임금 차이가 확대되는 이유다. 원격근무의 확산과 불균형한 AI 활용이 결합하면서 노동시장은 점점 더 경쟁적이고 계층화된 구조로 변하고 있다.
현재 전 세계 서비스 무역의 55%는 디지털 형태로 거래되고 있다. 2024년 성장률은 8%를 넘어 상품 무역을 앞질렀고, 개발도상국의 디지털 서비스 수출은 2023년 처음으로 1조 달러(약 1,360조원)를 돌파했다. 이는 새로운 일자리와 소득이 어디에서 만들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기업은 더 넓은 인재풀을 확보했지만, 반복적이고 대체 가능한 업무는 임금과 고용 안정성이 흔들리고 있다.
국가 내부의 격차 역시 확대되고 있다. 연구 기관과 기술 기업, 투자 인프라가 모인 지역은 고부가가치 일자리를 끌어들이지만, 그렇지 못한 지역은 경쟁에서 밀린다. 과거 제조업이 ‘차이나 쇼크’로 지역 불균형을 남겼듯, 이번에는 지식 기반 산업의 집중이 새로운 격차를 만들고 있다. 정책의 초점은 관세나 보조금이 아니라, 교육·훈련·복지로 옮겨져야 한다.

주: 지니계수 변화(X축), 생산 이전이 미친 영향(Y축)/생산 이전은 각국의 소득 불평등을 높이는 방향으로 작용했으며, 특히 중국·한국·헝가리 등에서는 이전 규모가 클수록 불평등 심화 폭도 함께 컸다.
더 빠르고 공정한 전환을 위한 사회계약
세계화의 이익을 지키려면, 시장을 멈추는 대신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핵심은 ‘일자리’가 아니라 ‘사람’을 중심에 두는 것이다. 일자리를 잃은 근로자가 더 낮은 임금의 새 직장을 받아들일 때 일정 기간 소득을 보전하는 임금 보험, 실제 채용 수요에 맞춘 직업훈련, 일자리가 바뀌어도 복지 혜택이 유지되는 이동형 복지제도가 그 축이다.
이 접근은 이미 효과가 입증됐다. 미국의 무역조정지원(TAA) 제도는 교육, 구직 지원, 소득 보전을 결합해 무역 피해 근로자의 재취업을 지원했다. 산업별 맞춤형 훈련 역시 중·저숙련 근로자의 임금을 장기적으로 끌어올린 것으로 나타났다. 이제는 지원 대상을 ‘디지털 무역으로 인한 일자리 대체’까지 확대하고, 현장 중심 훈련으로 재취업 속도를 높여야 한다.
재원은 성장과 연동돼야 한다. 단기적인 공공투자가 근로자의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진다면, 장기적으로는 재정 부담이 아니라 이익이 된다. 중요한 것은 예산의 크기가 아니라 지속성과 실행력이다. 조정 정책을 위기 대응책이 아닌 사회적 인프라로 운영하는 나라만이 개방과 신뢰를 동시에 지킬 수 있다.
교육이 바꿔야 할 방향
원격근무와 인공지능의 확산은 노동시장을 근본적으로 바꿨지만, 교육과 훈련 체계는 여전히 과거의 틀에 머물러 있다. 새로운 환경에 맞는 인재를 길러내지 못하면, 불평등은 더 깊어지고 성장의 동력도 약해진다.
앞으로의 교육은 실무와 연결된 역량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 시차와 공간의 제약 없이 협업할 수 있는 능력, 명확한 의사소통, 데이터 관리와 보안 감각은 이제 모든 직업의 기본 요건이다. 동시에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능력은 필수적이다. 학생들이 기술을 직접 다루고, 그 작동 원리와 한계를 이해할 때 변화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기회를 잡을 수 있다.
학점이 아니라 능력을 중심으로 검증하는 체계도 필요하다. 단기 과정을 단계적으로 쌓아 산업 자격이나 학위로 이어지는 구조는 직무 전환이 잦은 시대에 유효하다. 대학의 진로 지원 역시 결과 중심으로 재편돼야 한다. 단순한 상담이 아니라 졸업 후 취업률과 초임, 근속기간 같은 구체적 지표로 성과를 평가해야 한다. 의료 기술, 클라우드 서비스, 디지털 산업, 첨단 제조 등 고용 수요가 높은 분야와의 협력은 교육의 현실성을 높이고 임금 수준을 끌어올린다.
직업훈련과 복지, 고용 안전망이 기술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시장의 성장도 지속될 수 없다. 세계화의 이익을 유지하려면 개방과 함께 사람에 대한 투자가 병행돼야 한다. 제도를 현실에 맞게 조정하는 나라만이 그 성과를 지속적으로 공유할 수 있다.
변화를 설계하는 사회
세계화의 중심은 더 이상 항만이 아니다. 디지털 네트워크와 인공지능이 교역의 무대를 온라인으로 옮기며, 불평등의 구조도 함께 바뀌고 있다. 이를 제때 관리하지 못하면 국가 간 격차는 줄어들겠지만, 국내의 균열은 더 깊어진다. 그러나 제도를 미리 설계한다면 변화는 위기가 아니라 성장의 기회가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방어가 아니라 전환이다. 임금 보험과 직업훈련, 이동형 복지, 그리고 원격근무와 인공지능 시대에 맞는 교육은 그 전환을 뒷받침할 최소한의 기반이다. 이는 경쟁을 막기 위한 제도가 아니라, 사람과 기술이 함께 적응하도록 만드는 사회적 장치다. 세계화의 다음 단계는 개방의 폭이 아니라, 변화를 얼마나 정교하게 조정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Globalization and Inequality: A New Compact for the Remote-Work Era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