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폴리시] 반도체 협상 카드가 된 대만, 기술 패권의 교차점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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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 반도체 생산이 대만에 집중되며 기술 경쟁의 핵심으로 부상 미국과 일본은 생산망 재편에 나서고, 중국은 견제로 대응 산업과 안보가 맞물린 구조 속 대만이 글로벌 질서의 핵심 변수로 자리
본 기사는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의 SIAI Business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SIAI 또는 그 소속 기관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세계 첨단 로직 반도체의 대부분은 대만에서 생산된다. 이 구조는 현재 국제 질서의 불안정을 가장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다.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첨단 무기체계 등 현대 산업의 핵심이 대만의 생산망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집중은 단순한 산업 구조가 아니다. 미·중 경쟁이 기술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대만은 그 한가운데에 놓였다.
반도체 산업은 이제 무역과 외교, 안보를 동시에 움직이는 전략 자산으로 작동하고 있다. 미국은 자국 내 제조 확대를 위해 관세와 생산 비율 조정을 추진하고, 일본은 경제 안보 정책과 보조금을 내세워 규슈 지역에 공장을 세우고 있다. 반면 중국은 이를 자국에 대한 포위로 받아들이며 맞대응에 나선다. 그 결과, 군사적 억지 논의는 반도체 공장과 공급망 경쟁으로 확장됐다. 각국 정상회의에서도 반도체는 빠지지 않는 의제가 됐다. 산업정책의 범위를 넘어, 반도체는 이제 국가 안보와 직결된 문제로 다뤄지고 있다.
협상 카드에서 정책으로
대만은 외교적 상징에서 정책의 실질적 변수로 바뀌었다. 미국과 중국의 관계뿐 아니라 무역 협상과 동맹 외교에서도 대만의 존재는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2025년 들어 미국은 중국을 상대로 한 관세 정책과 외교 일정을 연계하기 시작했다. 백악관은 무역 협상과 정상회담을 병행하며, 협상 결과에 따라 대만에 대한 지원 수준을 조정할 수 있음을 암시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중국의 양보를 끌어내기 위해 압박 수위를 높였다가, 부분적인 완화 신호를 보내며 협상 여지를 남겼다. 중국의 대응이 강경해지면 다시 압박 강도를 높이는 식의 반복이 이어졌다. 결국 대만 문제는 미·중 간 협상의 주요 변수가 됐고, 시장과 대만 정부 모두 이런 움직임을 긴장 속에 주시하고 있다.
같은 해 10월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에서도 이 전략이 드러났다. 미·중 회담과 동시에 일부 품목의 관세는 완화됐지만, 다른 품목은 그대로 유지됐다. 안보와 무역이 하나의 정책 틀 안에서 동시에 작동하고 있다.

주: 첨단 반도체 생산 비중(X축), 생산 국가-한국, 대만(Y축)
반도체가 정책으로 전환되는 과정
대만을 둘러싼 경쟁은 미국의 반도체 산업 육성법 시행으로 현실화됐다. 반도체 및 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은 공급망 위험을 줄이기 위해 보조금, 세제 혜택, 정부 조달을 제도화했고, 그 중심에는 대만의 TSMC가 있다.
TSMC는 2024년 수십억 달러 규모의 지원을 받아 미국 진출을 본격화했다. 이듬해 1월 애리조나 공장에서 4나노미터 공정의 시생산이 시작됐으며, 2030년까지 미국 내 첨단 생산 능력의 일정 비중을 확보한다는 목표가 세워졌다. 이 전략은 재정 지원, 규제 완화, 동맹 결집을 결합한 구조로 평가된다.
미국은 동맹국에는 생산망 공동 구축의 의지를, 중국에는 기술 우위가 특정 지역에 머물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기업에는 보조금과 관세 체계를 기준으로 공급 계획을 조정하라는 방향을 제시했다.
미국 정부는 최근 반도체의 국내 생산 비중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하도록 하는 ‘생산 비율 규제’를 검토 중이다. 이 조치가 시행될 경우, 대만 기업들은 미국 내 공장을 더 확대해야 한다. 대만 정부는 이를 공개적으로 우려하며, 공급망 이전은 단기간에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업계 전문가들 역시 이런 규제가 비용과 효율성 모두에 부담이 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실제 법제화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이러한 논의만으로도 이미 대만과 관련 기업에는 상당한 압박으로 작용하고 있다.
미국이 자국 내 생산을 확대하고 중국이 무역 장벽을 유지할 경우, 대만은 국내 산업을 유지하면서도 동맹국의 생산 확장을 지원해야 한다. 이중의 과제는 대만의 경제 구조를 압박하고 있으며, 미국이 대만을 대중 견제의 핵심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평가를 강화하고 있다.

주: 국가-중국, 한국, 대만, 미주, 일본, 유럽(X축), 반도체 장비 투자 금액(Y축)
규슈의 조용한 신호
일본은 경제안보를 국가 전략의 핵심에 두고 반도체 산업을 동맹 체제 안으로 편입하고 있다. 목표는 기술 의존도를 낮추고, 공급망을 장기적으로 안정시키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대만 TSMC의 구마모토 1공장을 지원했고, 이어 2공장 건설을 위해 수조 엔 규모의 추가 투자를 결정했다. 대만의 생산 기반 일부를 일본으로 이전해 규슈 지역과 연결하고, 산업 경쟁력과 안보 대응력을 동시에 강화하려는 구상이다. 기시다 후미오 전 총리는 공장 방문 연설에서 반도체 강화가 일본과 동맹국 모두의 과제임을 강조했다. 이런 행보는 중국을 직접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사실상의 방어 체계를 구축하려는 신중한 전략으로 평가된다.
일본이 추진 중인 ‘래피더스(Rapidus)’는 차세대 반도체 공정을 자체 개발하기 위한 핵심 프로젝트다. 미국과 유럽 기업이 참여하는 공동 기술개발 계획으로, 경제 안보법과 산업통상자원성(METI)의 전략 아래 대규모 보조금이 투입됐다. 일본은 단기간의 추격보다 위기 상황에서도 자국 산업이 최소한의 생산 능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기반을 확보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전략은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중국에는 견제의 신호로, 미국에는 책임 분담의 협력 모델로, 대만에는 협력과 경쟁이 공존하는 복합적 관계로 인식된다. 동맹국의 공동투자와 구매는 대만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만, 대만 첨단산업의 구심점인 신주 과학단지 밖에서 생산이 늘어날수록 그 영향력은 줄어든다. 결국 대만의 반도체 산업은 특정 지역의 자산이 아니라, 동맹국이 공동으로 구축하는 국제적 인프라로 재편되고 있다.
의도보다 불확실성의 구조
일부에서는 미국의 관세 조정과 대만 지원 정책을 협상 수단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과도하다고 본다. 미국이 대만을 거래 대상으로 삼을 정치적 이유가 없고, 기존의 억제력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일정 부분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정치적 계산이 없다고 해서 불확실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관세 변동, 납기 지연, 모호한 발언 하나가 자본 흐름과 공급망을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은 의도보다 구조에 있다. 억제 체계가 유지되더라도, 정책이 협상 수단으로 활용되는 순간 시장은 불안정해진다. 각국의 발언과 대응이 실제 정책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생기는 구조적 불확실성이 지금의 가장 현실적인 위험이다. 이 변동을 완전히 막을 수 없다면, 예측하고 대응할 제도적 장치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반도체 경쟁의 균형점
세계 첨단 반도체의 생산 중심은 여전히 대만에 있다. 미국과 일본이 생산 거점을 확장하고 있지만, 이 의존 구조는 단기간에 해소되기 어렵다. 미국은 공급망을 자국 내로 끌어들이며 기술 주도권을 확보하려 하고, 일본은 산업 기반을 재건하며 자국 생산 능력을 강화하고 있다. 반면 중국은 이런 움직임을 자국에 대한 압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재편은 단순한 산업정책이 아니다. 각국의 경제 전략과 안보 구상이 교차하며 경쟁 구도를 만들고 있다. 반도체는 국가 간 이해관계가 맞물린 핵심 영역이자, 국제 질서의 안정성을 좌우하는 주요 변수로 자리하고 있다. 산업정책과 안보 전략이 결합된 지금, 대만은 여전히 세계 반도체 공급망의 중심에 있다. 이 구조가 유지되는 한, 반도체를 둘러싼 경쟁과 불확실성은 글로벌 경제의 지속적인 과제로 남을 것이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The Taiwan Bargaining Chip Is Now Industrial Policy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