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폴리시] ASEAN, '무역금융 단절' 막을 상설기금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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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EAN, 무역금융 공백 대응 위해 ‘지역 안정기금’ 설립 논의 본격화 중소기업 유동성 위기 반복, 기존 다자협력 구조 한계 명확 유럽식 상설기금 모델 참고하되, ASEAN 주도·무역 중심 구조로 설계 차별화
본 기사는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의 SIAI Business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SIAI 또는 그 소속 기관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2022년 기준 전 세계 무역금융 공백은 2조5천억 달러(약 3,675조원)에 달했다. 이 중 상당 부분이 아시아, 특히 아세안(ASEAN) 역내에서 발생했다. 이 지역 기업의 대부분은 중소기업이다. 전체 기업의 95% 이상을 차지하며 고용의 중심축을 이룬다. 그러나 이들은 제때 무역금융을 확보하지 못해 신용장 축소와 유동성 부족을 반복적으로 겪고 있다. 수출입이 끊기는 순간, 사업도 함께 멈춘다.
지금까지 ASEAN은 ASEAN+3(한국·중국·일본 포함) 협력 체제와 국제기구의 공동 장치를 통해 위기를 피해 왔다. 그러나 이 구조는 신속한 대응도, 독립적 의사결정도 충분히 갖추지 못했다. 구조적 한계가 분명해진 것이다. ASEAN은 이제 ‘위기 이후 복구’에 머물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위기 초기에 무역 활동을 유지할 수 있는 선제적 안전장치를 만들려 한다. 그 중심이 바로 지역 안정기금 구상이다.
무역 기반 신용위기, 일상 금융 안전망으로 대응해야
ASEAN의 무역 안정기금 논의는 외환·재정 같은 기존의 거시경제 대응 방식과 성격이 다르다. 하루 단위로 움직이는 무역 현장에서 짧은 만기의 무역금융이 끊기면 실물경제 충격은 즉각적이다.
2024년 상반기 ASEAN 상품 교역액은 약 1조8천억 달러(약 2,646조원)로 전년 대비 6.4% 증가했다. 이는 시장 신뢰와 단기 금융공급이 유지됐을 때 가능한 성과다. 그러나 금리 급등, 지정학적 충돌, 원자재 가격 급변 등 외부 변수에 금융기관들이 보수적으로 움직이면서 신용장 발급과 단기 유동성 공급이 급감하는 일이 반복됐다.
ASEAN은 2045년 세계 4대 경제권 도약을 목표로 통합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지역 차원의 금융 안전망은 여전히 부족하다. 무역과 중소기업 운영을 일상적으로 받쳐줄 장치가 없다는 점은 구조적 취약점으로 지적된다. 새 기금은 무역금융 보증, 중소기업 대출 지원, 신용장 발급 유지처럼 거래 기반 리스크에 집중해야 한다. 기존의 외화유동성 공급 기관과는 성격 자체가 다르다.
유럽식 구조의 시사점, ASEAN에 맞는 설계로 변용
ASEAN이 검토하는 지역 안정기금은 유럽의 위기 대응기구인 유럽재정안정기구(EFSF)와 유럽안정메커니즘(ESM)에서 설계 원칙을 참고할 수 있다. 유럽은 2010년 유로존 재정위기를 계기로 상설기구를 만들었다. 출자금은 7,000억 유로(약 1,153조원), 대출한도는 5,000억 유로(약 823조원)에 달한다. 명확한 법적 기반과 투명한 의사결정으로 시장의 신뢰를 확보했다.
ASEAN 역시 출자금의 안정성, 대응의 신속성, 정치적 중립성, 예측 가능한 규정 중심 운영 체계를 확보하는 것이 핵심이다. 다만 ASEAN은 무역·중소기업 중심의 기금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유럽과 다르다. 예를 들어 수출신용기관의 단기 유동성 지원, 건전한 은행의 신용장 발급 보장, 중소기업 무역대출 자산군 보강 등에 집중해 기금의 효율성과 효과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
CMIM(치앙마이 이니셔티브 다자화)은 IMF 연계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자금 집행 사례는 없다. IMF 조건이 따라붙어 독립성·신속성 모두 떨어진다는 비판이 지속된다.

주: ESM의 대출 여력 약 5,410억 달러(약 726조원)는 ASEAN+3 CMIM의 2,400억 달러(약 322조원)보다 두 배 이상 크며, ASEAN 단독 분담액
48억 달러(약 6.4조원)는 자체 안전망 규모가 매우 제한적임을 보여준다.
출자 구조는 다층 방식, ASEAN 주도권 반드시 확보해야
재원 조달은 기금 설계에서 가장 현실적인 제약 요인이다. ASEAN 회원국만으로 충분한 자본금을 마련하기 어렵다. 한국·중국·일본 등 역내 대형 경제권의 협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외부 자본의 과도한 개입은 기금 정치화와 주도권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
이에 따라 다층 출자 방식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1단계에서는 ASEAN 회원국들이 일정 규모의 핵심 자본금을 먼저 조성한다. 2단계에서는 외부 파트너가 조건부 출자나 보증 형태로 참여하는 구조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아세안+3 거시경제조사기구(AMRO) 등 기존 협력 경험이 있는 기관과의 연계도 기금 확장성과 국제 협력의 강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기금 운용과 정책 결정의 최종 권한은 ASEAN이 가져야 한다. 외부 자본은 투명하고 제한된 방식으로만 허용해야 한다. 초기부터 ASEAN 다수 지분과 규정 주도권을 확보하는 구조가 기금 독립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하는 핵심 장치다.

주: 세계 무역금융 격차는 2016~2018년 약 1조5,000억 달러(약 2,040조원)에서 2022년 2조5,000억 달러(약 3,400조원)로 확대됐다.
특히 개발도상국에서 부족 규모가 크게 나타나 역내 안정기금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예측 가능한 규정 중심 운영이 신뢰 확보의 열쇠
운영 체계는 기금의 지속 가능성과 시장 신뢰 확보에서 결정적이다.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 당시 강제 구조조정과 외부 조건 부과는 ‘지원=외부 간섭’이라는 인식을 남겼다. 새로운 기금은 이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자동적이고 규정 중심으로 작동해야 한다. 정치 판단이 아닌 사전 기준에 따라 지원 여부가 결정되는 구조여야 한다.
이를 위해 AMRO의 기능을 확대해 회원국 금융시스템과 무역금융 인프라를 상시 점검해야 한다. 또한 신용보증·수출금융 보조·신용장 보증 등 지원 도구별로 조건·기간·평가기준을 명확히 규정해야 한다. 지원은 일시적이며 목적 제한적이어야 한다.
예측 가능한 기준과 독립된 심사 절차가 보장될 때, 기금은 ‘공공적 금융 기반’으로 기능할 수 있다. 규모가 크지 않더라도 구조적 신뢰를 축적해 시장 심리를 안정시키고 거래 흐름을 유지하는 데 실질적 역할을 할 수 있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Building an ASEAN Regional Stability Fund for the Next Crisis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