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 무효’ 판결에 ‘무역법 301조’ 칼 빼든 트럼프, 전략적 승리 가능성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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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국가·산업 겨냥해 직접적인 불이익 조치 추가 관세·수입 제한 등 광범위한 제재 가능 상호관세 무효화 후 예고된 수순, 추가관세 부과 목적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 중국, 일본, 유럽연합(EU) 등 16개 주요 경제 주체를 겨냥해 무역법 301조(Section 301) 조사를 전격 개시했다.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에 근거한 상호관세가 미국 연방대법원에 의해 위법 판결을 받은 지 불과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나온 초강수다. 사실상 기존의 관세 장벽을 복원하고 나아가 더 강력한 무역 압박을 가하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으로 풀이된다.
“과잉 생산은 미국에 위협” 제조업 부활 위한 고강도 검증
11일(이하 현지시간)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언론 브리핑에서 “미국의 일자리를 보호하고 파트너 국가들과의 공정한 무역을 보장해야 한다”며 미국의 주요 교역상대국에 대한 무역법 301조 조사의 개시를 선언했다. 그리어 대표는 “이번 조사는 특정 경제권의 제조업 부문에서 구조적 과잉생산과 관련된 행위, 정책과 관행을 검토할 것”이라며 “이 조사로 과잉생산과 관련한 다양한 불공정 무역관행이 드러날 것이라고 예상한다”고 설명했다.
이번 301조 조사는 한국을 포함해 중국, 유럽연합(EU), 싱가포르, 스위스, 노르웨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태국, 베트남, 대만, 방글라데시, 멕시코, 일본, 인도 등 총 16개 교역 대상국을 포괄한다. USTR은 조사에서 시장 수요와 괴리된 과잉 생산 여부를 핵심적으로 들여다볼 계획이며 보조금 지급, 저임금 구조, 국영기업 활동 등 수출 확대를 지원하는 정책 전반도 검토 대상에 포함할 방침이다. 이와 함께 수입품의 시장 진입을 제약하는 각종 무역 장벽, 미흡한 환경·노동 보호 체계, 보조금성 대출, 금융 억압 정책, 환율 운용 관행 등도 조사 항목에 포함될 가능성이 있다.
이번 조사와 관련해 서면 의견제출·공청회 참석신청 접수창구는 미 동부시간 기준 이달 17일경 열리며, 의견·요청 제출 마감일은 다음달 15일이다. 공청회는 5월 5일경 개최될 예정이다. 그리어 대표는 공청회 종료 이후 7일의 기간 동안 이해관계자들이 반박 의견을 제출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절차가 마무리되면 USTR은 조사 결과를 토대로 결론을 도출하고 대응 조치(Responsive Actions)를 검토하게 된다.
미 정부는 이번 조사를 무역법 122조에 근거한 ‘글로벌 관세(10%)’ 적용 가능 기간이 만료되기 전인 7월에 마무리하겠다는 목표다. 그리어 대표는 “시간표와 관련해 150일(122조 관세부과 가능 기간) 기간을 인지하고 있다”며 “122조 관세가 만료되기 전에 조사를 마무리하는 것이 목표”라고 강조했다. USTR은 또한 디지털세, 의약품 가격 정책, 수산물 및 쌀 시장 접근 문제, 해양오염 등 환경 이슈와 관련해 미국 산업계가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해 온 사안들에 대해서도 추가적인 301조 조사 가능성을 열어뒀다. 그리어 대표는 “추가적인 301조 조사와 관련해 더 많은 조사가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대법원 판결 불복한 트럼프, 301조 조사로 ‘법적 정당성’ 피력
무역법 301조는 외국 정부가 미국의 무역을 제약하거나 불리하게 만드는 부당·불합리·차별적 정책과 관행에 대응할 수 있도록 행정부에 권한을 부여한 제도다. 해당 규정은 관세 부과 등 다양한 무역 보복 조치를 통해 대응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제공한다. 통상 301조로 불리지만, 실제로는 1974년 제정된 무역법 가운데 301조부터 309조까지의 조항을 통칭하는 표현이다. 명목상으로는 외국의 불공정 무역 관행에 대한 대응 장치로 규정돼 있으나, 실제 운용 과정에서는 행정부가 자체 판단에 따라 관세 압박을 가하는 정책 도구로 활용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이번 조사는 IEEPA에 따른 국가별 상호관세 및 '펜타닐 관세'(마약류인 펜타닐의 미국 밀반입 차단에 협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과한 관세)가 무효화된 이후 추가로 관세를 부과하기 위한 목적으로 예고된 조처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0일 IEEPA에 따른 관세 징수가 위법이라는 연방 대법원 판결이 나오자 당일 기자회견을 열어 “무역법 122조에 따라 전 세계 모든 무역 상대국에 10%의 관세를 부과하고, 무역법 301조 조사를 시작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결국 상호관세 공백을 임시로 보완하기 위해 글로벌 관세를 최대 150일 동안 적용하고, 그 사이 301조 조사를 완료해 주요 교역국에 대한 관세 부과를 지속하겠다는 의도가 깔린 셈이다. 대(對)이란 전쟁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도 트럼프 행정부의 핵심 경제 정책인 관세 전략은 계획된 일정에 맞춰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그리어 대표는 11일 언론 대상 사전 설명 브리핑에서 “법원 판결이나 여건 변화에 따라 적용되는 정책 수단은 달라질 수 있지만, 정책의 기본 방향은 동일하게 유지된다”고 말했다. 301조 조사가 대법원 판결로 효력이 사라진 상호관세의 공백을 보완하기 위한 조치라는 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대목이다.
실제 미 재무부가 11일 발표한 2월 월간 재정 보고서를 보면, 미국의 2월 관세 수입은 265억9,000만 달러(약 39조3,000억원)로, 1월 277억4,000만 달러(약 41조원) 대비 10억 달러(약 1조4,800억원) 이상 감소한 것으로 집계됐다. 미국의 월간 관세 수입은 지난해 10월 313억5,000만 달러(약 46조3,700억원)로 정점을 찍은 뒤, 11월 일부 관세 완화 조치 이후 4개월 연속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다. 연방대법원이 트럼프 대통령의 일괄 관세 정책 대부분에 제동을 건 여파가 반영된 결과다.

301조는 미국의 대표적 통상 무기
그동안 미국은 무역법 301조를 주로 중국과의 무역 전쟁에 활용해 왔다. 트럼프 1기 행정부 당시인 2018년 미국은 중국의 지식재산권(IP) 침해 문제를 명분으로 301조 조사를 개시했고, 이를 근거로 중국산 제품에 최대 25%에 이르는 고율 관세를 부과했다. 이 조치로 미국으로 들어오는 중국산 수입품 가운데 75%가 관세 대상에 포함됐다. 이후 조 바이든 행정부 역시 같은 법적 틀을 활용해 중국산 전기차에 100%, 태양광 셀 등에 50%의 관세를 적용하며 대중 견제 정책을 이어갔다. 1980년대에는 급성장하는 일본의 경제와 산업에 대응해 일본산 전자제품과 자동차 부품 등에 301조를 근거로 한 관세를 부과하기도 했다.
한국 역시 과거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여러 차례 미국의 301조 타깃이 되면서 대대적인 시장 개방과 세제 개편을 강요받았던 뼈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미국은 1985년 한국 보험과 영화 산업을 문제 삼아 301조를 발동했으며, 1989년에는 농산물 정책과 국산화 정책, 외국인 투자 규제 등 세 분야를 겨냥해 추가 조치를 취했다. 1995년에는 미국자동차제조협회(AAMA)의 요청으로 자동차 시장에 대한 301조 조사가 시작됐고, 한국 정부는 이에 대응해 자동차 관련 세제를 대폭 개편했다.
1996년에는 한국 정부가 민간 부문 통신장비 구매에 관여하고 있다며 한국을 우선협상대상국(PFC)으로 지정했으며, 외환위기(IMF) 직전인 1997∼1998년에는 자동차 수입 장벽 등을 문제 삼기도 했다. 배기량이 큰 차량에 높은 자동차세를 부과하는 한국의 세제 구조가 주로 2,000cc 이상 대형차를 수출하는 미국 업체에 불리하다는 내용이 근거였다. 최근 쿠팡 사태 등으로 불거진 디지털 규제 문제에서도 미국은 301조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렀다.
다만 무역법 301조는 정치적·보복적 성격이 강한 만큼 대상국의 불공정 관행 입증, 기업 의견 수렴, 경제 분석, 공청회 등 ‘준사법적 절차’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 과거 트럼프 1기 행정부 시절 중국을 상대로 301조 관세를 발동했을 때는 공식 조사 개시부터 실제 관세 부과까지 약 11개월이 소요됐다. 프랑스의 디지털서비스세에 대한 301조 조사 역시 위법 판단 보고서가 나오기까지 약 5개월, 이후 실제 조치 발표까지는 1년이 걸렸다. 바이든 행정부의 중국 조선업 대상 301조 조사 역시 최종 조치까지 1년 이상 소요됐다. 단일 국가의 특정 사안 조사만으로도 반년 이상이 소요되는 점을 고려하면, 전 세계 주요 교역국을 상대로 단 4개월 만에 절차를 마무리하겠다는 구상은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게 전문가들 목소리다.
또한 대법원 패소 이후에도 트럼프 행정부는 무역법의 각종 조항을 끌어모아 당장 임시방편으로 관세 징수를 이어나갈 수는 있겠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작년 1월 재취임 직후부터 무소불위 권한처럼 휘둘러 온 관세 정책의 추진력은 이전보다 크게 약화될 전망이다. 이루 마낙(Ira Manak) 미 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은 “IEEPA처럼 모든 것을 한 번에 해결할 만능 도구는 없기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은 이제 누더기식(Patchwork)으로 관세 장벽을 재건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