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의존 낮추려 재생에너지 밀어붙인 동남아, 전력망 병목에 사업 절반 좌초, 데이터센터 유치 비상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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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발 공급 쇼크, 재생에너지 전환 재촉 송전망 확충 지연으로 프로젝트 절반 좌초 전력 공급 개시일에 달린 첨단산업 유치 성패

중동발 에너지 쇼크가 동남아시아의 재생에너지 전환을 재촉했지만, 취약한 송전망 앞에서 사업이 줄줄이 멈춰 섰다. 베트남·태국·인도네시아에서 추진된 재생에너지 프로젝트의 50~60%가 취소되거나 중단됐고, 발표된 친환경 자본지출의 35%는 집행되지 못했다. 반도체·배터리 공장과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유치 경쟁으로 2030년까지 100테라와트시(TWh) 이상의 신규 전력 수요가 예고되면서 계통 병목은 산업 성장까지 흔드는 위험으로 번지는 분위기다.
중동 쇼크가 당긴 동남아 ‘재생에너지 시계’
9일(현지시간) 에너지 전문매체 오일프라이스닷컴에 따르면 동남아시아 주요국은 태양광·풍력 발전 등 재생에너지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베트남은 작년 4월 수정 전력개발계획(PDP8)에 태양광과 육·해상풍력, 배터리 저장장치, 양수발전 확충 방안을 담았고, 인도네시아도 2025~2034년 국가전력사업계획(RUPTL)에 재생에너지와 저장설비 증설 계획을 반영했다. 필리핀은 녹색에너지 경매를 확대하며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2030년 35%, 2040년 50%까지 끌어올릴 방침이다. 중동산 원유·가스 의존도를 줄이고 제조업과 데이터센터 성장에 필요한 전력을 확보하려는 전략이 재생에너지 투자를 밀어 올리고 있는 것이다.
중동발 공급 충격은 에너지 전환의 속도를 더욱 끌어올렸다. 중동과 동남아는 하나의 에너지 공급망으로 묶여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가 발표한 ‘동남아 에너지전망 2026’에 따르면 올해 2월 말 이란 전쟁 발발 전 동남아 원유 수입 중 약 60%, 가스 수입 중 3분의 1을 중동이 공급했다. 정유 원료와 간접 제품 교역까지 합산하면 역내 석유제품 공급의 45%가 중동산 원유에 연동됐다. 에너지 수입선이 호르무즈 해협이라는 좁은 통로에 집중된 탓에 현지에서 벌어진 충돌은 곧바로 동남아의 공급 차질로 번졌다.
유류 수급이 흔들리자 운송·항공·석유화학 원가가 뛰었고, 발전용 가스 가격도 동반 상승했다. 위기 전부터 역내 화석연료 보조금은 연간 400억 달러(약 56조6,360억원)에 달했다. 현행 정책이 이어지면 화석연료 순수입액은 2024년 800억 달러(약 113조2,720억원)에서 2035년 2,450억 달러(약 346조8,950억원)로 세 배가량 불어난다. 이런 상황에서 동남아 각국이 공표한 기후·에너지 목표를 이행할 경우 2035년 수입비용은 이 추정치의 절반으로 줄어든다. 재생에너지와 전기화, 효율 개선에 투입된 자금은 지난해 화석연료 수입비용도 300억 달러(약 42조4,770억원) 낮춘 것으로 집계됐다.
전력망 병목에 사업 절반 좌초
이에 각국은 태양광과 풍력을 에너지 안보 수단으로 다시 보기 시작했다. 수입 연료 가격에 따라 발전비용이 출렁이는 상황을 줄이겠다는 계산이다. IEA는 동남아가 2035년까지 세계 에너지 수요 증가분의 약 20%를 차지할 것으로 전망했다. 발전소와 전력망을 지금 확충하지 못하면 에너지 수입 부담도 같은 속도로 불어난다. 그러나 동남아 각국의 재생에너지 확대 정책은 전력망 병목에 가로막혔다. 글로벌 컨설팅업체 베인앤드컴퍼니와 스탠다드차타드가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베트남·태국·인도네시아에서 추진된 재생에너지 프로젝트 가운데 50∼60%가 취소되거나 중단된 상태다.
사업 좌초를 부른 직접적인 요인은 장기 전력구매계약(PPA)의 불확실성과 인허가 지연, 계통 접속 규정의 혼선이다. 전력 판매가격과 계약기간 확정은 금융권 대출과 최종투자결정(FID)의 전제다. 여기에 송전망 접속 시기까지 불투명해지면 발전소를 완공하고도 전력을 판매하지 못할 위험이 커진다. 베인·SC 보고서는 동남아 전력·전기차 부문에서 발표된 친환경 자본지출 가운데 약 35%가 미집행 상태로 남았다고 분석했다.
국가별 보급 실적도 당초 목표에 크게 미달했다. 인도네시아는 2020~2025년 태양광 보급 목표의 20~30%를 달성하는 데 그쳤다. 베트남에서는 정책 불확실성과 금융조달 차질이 겹치면서 2022~2024년 대규모 태양광·풍력 설비 증설이 사실상 멈췄다. 베트남 정부가 2023년 6기가와트(GW) 규모의 해상풍력 목표를 제시했지만 관련 규정은 2025년에야 마련됐다. 체결된 PPA와 FID, 착공에 들어간 해상풍력 설비는 모두 0건이다.
표1. 동남아 친환경 에너지 투자·사업 지연 현황
| 구분 | 핵심 지표 | 현황 및 영향 |
|---|---|---|
| 사업 좌초 요인 | PPA·인허가·계통 규정 | 전력 판매가격과 계약기간, 송전망 접속 시점의 불확실성이 금융조달과 FID 지연 |
| 친환경 투자 집행 | 발표 자본지출의 약 35% 미집행 | 전력·전기차 부문의 투자 계획이 실제 사업 집행으로 연결되지 못함 |
| 인도네시아 태양광 | 목표 달성률 20~30% | 2020~2025년 보급 실적, 당초 목표에 크게 미달 |
| 베트남 재생에너지 | 2022~2024년 증설 사실상 중단 | 정책 불확실성과 금융조달 차질로 대규모 태양광·풍력 사업 정체 |
| 베트남 해상풍력 | 목표 6GW·사업 실적 0건 PPA·FID·착공 모두 0건 | 2023년 목표 발표 후 2025년 관련 규정 마련 |
| 건설 주기 격차 | 발전소 1~5년·송전망 5~15년 | 송전망 확충 지연으로 완공 발전소의 출력 제한과 전력 판매 감소 위험 확대 |
| 전력망 투자 부족 | 2024년 110억 달러 | 2035년까지 필요한 연평균 290억 달러보다 매년 180억 달러 부족 |
| 투자 계획과 집행 여력 | 발표액 5,400억 달러·집행 가능액 3,150억 달러 | 2030년까지 예정된 투자 가운데 2,250억 달러의 집행 불확실성 발생 |
| 태양광 사업 지연 | 452개 중 25% 이상 | 2022년 이후 추진된 동남아 태양광 프로젝트의 4분의 1 이상이 연기 또는 취소 |
발전설비 급증 뒤편, 송전망 공백 확대
발전설비와 송전망의 건설 주기가 엇갈린 점도 사업 지연을 키웠다. 태양광·풍력 발전소는 통상 1~5년 안에 건설할 수 있지만 송전망 확충에는 인허가와 토지보상, 변전소 건설을 포함해 5~15년이 걸린다. 동남아의 전력망·저장설비 투자액은 2024년 110억 달러(약 15조5,960억원)에 머물렀다. 2035년까지 필요한 연평균 투자액 290억 달러(약 41조1,160억원)와 비교하면 매년 180억 달러가 부족하다. 계통 보강이 늦어질수록 완공된 발전소의 출력 제한이 늘고 전력 판매량도 감소해 재생에너지 사업의 수익성이 다시 악화한다.
투자 계획과 실제 집행액의 간극도 벌어지고 있다. 동남아 전력·전기차 산업에서 2030년까지 발표된 친환경 투자액은 5,400억달러 지만, 현 여건에서 집행 가능성이 확인된 금액은 3,150억 달러(약 446조5,120억원)에 그쳤다. 이에 글로벌에너지모니터(GEM)가 추적한 2022년 이후 동남아 태양광 프로젝트 452개 가운데 4분의 1 이상도 연기되거나 취소됐다. 발전소를 지을 자금과 수요는 확보됐지만 전기를 실어 나를 길이 막히면서, 동남아의 에너지 전환이 공사 중단과 투자금 이탈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반도체·배터리 몰린 동남아, 전력망 확충 카운트다운
다만 전력망 투자를 더 늦출 여지는 크지 않다. 데이터센터와 첨단 제조업을 유치해 ‘포스트 차이나’ 생산기지로 자리 잡으려는 구상이 막대한 신규 전력 수요를 동반하고 있어서다.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과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공동 발간한 ‘아세안 투자보고서 2025’를 보면, 2024년 역내 외국인직접투자(FDI)는 2,260억 달러(약 20조3,550억원)로 전년보다 8% 증가했다. 같은 기간 세계 FDI는 11% 감소했다. 제조업 FDI는 약 150% 급증한 440억 달러(약 62조3,700억원)에 달했다. 반도체와 자동차, 배터리, 전자제품 기업이 중국 밖 생산거점을 확보하면서 동남아로 자금이 몰린 결과다.
공장과 데이터센터가 새로 요구할 전력 규모도 빠르게 불어나고 있다. 베인·SC 보고서는 2025~2030년 데이터센터에서 35~45TWh, 친환경 산업단지에서 25~60TWh, 전기차에서 10~15TWh의 추가 수요가 발생할 것으로 추산했다. 세 분야에서 늘어나는 전력 소비량만 100TWh를 웃돈다. 직전 5년간 증가분은 30TWh를 소폭 상회했다. 2,000억 달러(약 283조2,400억원)가 넘는 신규 설비투자도 이 수요와 맞물려 있다. 발전소와 송전망 준공이 늦어지면 투자 집행과 공장 가동 일정도 함께 밀리게 된다.
데이터센터가 요구하는 전력의 규모와 품질도 기존 산업시설과 차이가 크다. 동남아 데이터센터의 정보기술(IT) 부하는 2024년 1.9GW에서 2030년 6~6.5GW로 세 배 이상 증가할 전망이다. 역내 전체 전력 소비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0.9%에서 3.2~3.5%로 높아진다. 데이터센터는 하루 24시간 전력을 사용하며 99.999% 수준의 가동 신뢰도를 요구한다. 짧은 정전이나 전압 불안정도 서버 장애와 고객사 피해로 이어지는 만큼 사업자는 계통 접속일과 예비전력, 재생에너지 조달 가능 여부를 투자 결정 단계부터 따질 수밖에 없다.
전력 조달 막히면 데이터센터 수주도 흔들
전력망 불안은 데이터센터 사업자의 투자 계획에도 직접 반영됐다. 베인이 동남아 데이터센터 용량의 약 절반을 보유한 사업자 10곳을 조사한 결과 90%가 계통 접속 지연, 70%가 송전용량 부족을 주요 투자 제약으로 꼽았다. 응답 업체 전부는 접속기한이 보장될 경우 할증 전기요금을 부담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계통 병목이 해소되면 업체당 평균 0.3GW를 추가 투자할 수 있다는 답변도 나왔다. 전기요금 수준과 함께 실제 전력 공급 개시일이 데이터센터 입지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제조업의 전력 요건도 한층 까다로워졌다. 반도체 생산라인은 순간적인 전압 저하만으로 장비가 멈추고 웨이퍼 손실까지 발생한다. 배터리와 정밀 전자제품 공장도 일정한 전압과 주파수가 유지돼야만 생산 수율을 확보할 수 있다. 여기에 글로벌 기업들이 공급망 탄소배출량 관리에 나서면서 재생에너지 사용 실적과 조달 경로까지 납품·수주 조건에 포함됐다. 전력 공급이 불안하면 비상발전기와 자가발전 설비에 들어가는 비용이 커지고, 재생에너지 인증체계가 미비한 지역에서는 본사와 고객사의 탄소감축 기준을 충족하기도 어려워진다.
아세안 전력망 확충에 3,000억 달러 필요
안정적인 전력 공급과 재생에너지 조달 능력이 투자처 선정 기준으로 부상하자, 말레이시아와 태국은 전력 계통 투자를 산업 유치 전략의 우선순위로 끌어올렸다. 먼저 말레이시아 전력회사 테나가 나시오날(TNB)은 2025~2027년 430억 링깃(약 14조8,900억원)을 투입해 송전망과 변전설비를 현대화하고 있다. 데이터센터가 밀집한 조호르의 신규 전력 수요도 국가 발전계획에 반영하고 계통 접속 절차를 단축했다.
태국전력공사(EGAT)는 데이터센터 투자가 집중되는 동부경제회랑(EEC)의 송전선과 변전소를 증설하고 있다. EEC 내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만 1,150메가와트(MW)에 달한다. 이에 따라 EGAT는 라용2·판통·판통2 변전소에 총 650MW 규모의 신규 전력 공급 지점을 설치하고, 플루악댕·사타힙 변전소의 변압기 용량을 500MW 늘리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라용2 설비는 이미 준공됐으며 나머지 사업은 2027년 1분기까지 순차적으로 가동에 들어갈 예정이다.
반면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의 전력 계통 투자는 신규 수요 증가세에 뒤처져 있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주요 데이터센터 밀집지역은 공급 가능한 전력 대부분이 이미 배정됐고 신규 계통 접속에는 최대 3년이 걸린다. 베트남도 피크 시간대 공급 부족과 송전망 불안이 이어지면서 연간 30억~40억 달러(약 4조2,480억~5조6,640억원) 규모의 계통 투자가 필요한 것으로 분석됐다.
이런 투자 격차는 동남아 전역에서 나타나고 있다. IEA는 아세안이 2040년까지 전력망 확충과 현대화에 3,000억 달러(약 424조8,300억원) 이상을 투입해야 한다고 추산했다. 이전 15년간 집행액보다 72% 많은 규모다. 아세안 전력망(APG)의 국가 간 연계선에도 2040년까지 270억 달러(약 38조2,350억원)가 필요하다. 연계선 투자액은 2030년 이전 연간 10억 달러(약 1조4,160억원) 이상, 이후 연간 20억 달러 이상으로 확대해야 한다. 이는 2019~2024년 연평균 집행액의 20배에 달하는 규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