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테크] 지정학적 충격에 흔들리는 공급망, 기업 생존전략 된 생산거점 다변화
입력
수정
지정학적 충격에 공급망 다변화 부각 비용 중심 조달에서 복수 공급망으로 전환 생산 중단 대비한 공급망 재편 확산
본 연구 기사는 유럽 경제 연구소 The Economy의 연구위원(Fellow)들이 작성한 The Economy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The Economy 또는 집필자의 소속 기관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올해 2월 기준 전 세계 원유와 석유제품 해상 교역량의 약 25%가 통과하던 호르무즈해협은 이란과 이스라엘, 미국 간 분쟁으로 수개월간 사실상 봉쇄됐다. 보험사들이 전쟁위험 담보를 철회하자 해운사들도 우회 항로를 택했고 중동에서 발생한 지정학적 충격은 글로벌 공급망 전반으로 번졌다. 비슷한 상황은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나타났다. 이러한 잇따른 지정학적 충격을 거치면서 기업의 조달 전략은 비용 절감에 집중하던 방식에서 안정적인 생산을 함께 고려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기술 보호 넘어 공급 중단 위험 분산
이러한 공급망 다변화를 기술 유출 방지 차원에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지식재산권 보호가 취약한 국가에서 핵심 기술이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생산 공정을 여러 공급업체에 나눈다는 설명이다. 실제 첨단 부품을 다루는 자동차산업에서는 기술 보호를 목적으로 생산 공정을 분리하는 전략이 활용된다. 그러나 기술 보호만으로 최근 산업 전반으로 확산하는 공급망 다변화의 배경을 충분히 설명하지는 못한다. 식품과 가구, 섬유처럼 기술 유출 우려가 상대적으로 낮은 산업에서도 여러 국가로 생산 거점을 넓히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어서다. 결국 기업들이 공급망을 분산하는 근본적인 배경에는 특정 지역에서 발생한 생산 차질이 기업 전체의 손실로 번지는 위험을 줄이려는 목적이 자리한다.
실제로 핵심 부품이나 원자재를 한 지역에 의존하면 전쟁이나 자연재해, 물류 차질이 발생하는 순간 전체 생산망이 영향을 받는다. 반대로 공급처를 서로 다른 위험에 노출된 2~3개 지역에 확보하면 한곳의 생산이 중단돼도, 다른 지역에서 물량을 조달해 생산을 이어갈 수 있다. 수개월간 지속될 생산 중단을 수주간의 차질로 줄일 수 있는 셈이다. 인건비와 세제 혜택 등 비용 경쟁력도 생산지를 결정하는 주요 기준이지만, 최근 기업들이 생산 거점 분산에 속도를 내는 이유는 이처럼 비용 절감보다 생산 안정성 확보의 중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유럽 가스 위기가 보여준 다변화 필요성
생산과 조달을 한 지역에 집중할 때 발생하는 위험은 유럽의 에너지 위기에서 뚜렷하게 드러났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 유럽연합(EU)은 전체 가스 수입의 약 45%를 러시아에 의존했다. 높은 의존도는 전쟁 이후 러시아산 가스 공급이 줄면서 곧바로 에너지 수급 불안으로 이어졌고, EU는 미국산 액화천연가스(LNG)와 노르웨이산 가스 등으로 공급처 다변화에 나섰다. 그 결과 러시아산 가스 비중은 2024년 19%에서 2025년 12%까지 낮아졌다. 물론 단기간에 공급처를 바꾸는 과정에는 상당한 비용이 뒤따랐다. 새로운 LNG 터미널을 건설하고 공급계약을 체결해야 했으며 에너지가격 상승으로 기업과 가계의 부담도 커졌다. 그러나 이러한 비용을 감수하면서 대체 공급망을 확보한 결과, 러시아산 가스 공급 감소에 대응할 여력은 한층 확대됐다.
공급망 재편 속 기업 대응 격차
유럽의 사례처럼 공급망 다변화의 필요성은 잇따라 확인되고 있지만, 기업 현장의 대비 수준은 이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영국 공급망 컨설팅업체 SCALA가 공급망 담당 임원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 기업의 52%는 필요량의 25%에도 못 미치는 안전재고를 보유했다. 여기에 71%는 국내 저장능력을 25% 이상 확대하기 힘들다고 답했고, 43%는 주력 창고의 운영이 중단될 경우 이를 대체할 시설조차 없었다. 회복탄력성 전략을 전면 도입한 기업도 33%에 그치면서 비용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재고와 시설을 줄여온 경영 방식이 공급망 위기에는 취약할 수 있다는 점이 드러났다.
이러한 취약성이 부각되자 공급망 구조를 바꾸려는 움직임도 본격화하고 있다. 맥킨지가 2024년 공급망 담당 임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는 60~73%가 복수 공급처 확보와 공급망 지역화를 추진한 것으로 집계됐다. 특히 중국 내 생산기반을 유지하면서 다른 국가에 추가 생산 거점을 확보하는 ‘차이나 플러스 원(China Plus One)’ 전략이 전자·자동차산업을 중심으로 확산하면서 생산기지를 한 국가에 집중하던 방식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이 같은 흐름은 국가별 교역 구조에서도 확인된다. 2000년 범중화권 전체 수출에서 5대 교역 상대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60%에 달했지만, 2024년에는 35%로 낮아졌다. 같은 기간 중국 기업들이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중남미 등으로 공급망을 확대하면서 전체 수출액은 4,430억 달러(약 612조원)에서 4조5,000억 달러(약 6,222조원)로 증가했다. 그러나 공급망 재편 속도는 산업 특성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인건비 비중이 높고 대규모 설비투자가 필요하지 않은 섬유·의류산업은 수개월 안에 생산지를 옮길 수 있는 반면 전자·자동차산업은 신규 생산시설 구축에 수십억 달러와 수년이 소요된다. 이 때문에 후자는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대체 생산 거점을 확보해야 한다.

공급망 다변화의 효과와 남은 과제
이처럼 공급망을 여러 지역으로 넓히면 생산 과정에서도 추가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여러 국가에 공장을 둔 기업은 생산시설별 성과를 비교해 한 지역에서 개발한 공정 개선 방식을 다른 거점에 적용할 수 있으며, 조달처가 늘어날수록 원자재 공급업체와의 협상력도 높아진다. 브뤼겔(Bruegel)의 2024년 연구에서도 기존 기업을 인수하는 방식보다 생산시설을 새로 구축하는 그린필드 투자를 중심으로 외국인직접투자(FDI)가 생산성 확산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됐다.
반면 공급망이 넓어질수록 기업이 부담해야 할 관리 비용도 증가한다. 생산 거점과 공급업체가 늘어나면 계약과 품질관리, 공급업체 간 조율에 더 많은 비용과 인력이 필요해서다. 문제는 이러한 비용만을 기준으로 공급망 다변화의 효율성을 판단할 경우 생산 중단에 따른 손실을 간과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한 지역의 공급 차질로 생산 자체가 멈추면 매출 감소와 고객 이탈 등 관리 비용을 넘어서는 손실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공급망 다변화에 필요한 비용을 생산 지속성을 확보하기 위한 비용으로 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기업의 대응도 위기가 발생한 뒤 대체 공급처를 찾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핵심 부품과 원자재가 어느 지역에 집중돼 있는지 사전에 파악하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 가동할 수 있는 대체 조달망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업 차원의 대응과 함께 정부도 저장과 운송, 에너지 인프라를 국가 공급망을 지탱하는 핵심 기반으로 보고 대응체계를 강화해야 한다. 호르무즈해협의 통행이 정상화되더라도 기상이변과 사이버 공격, 새로운 지정학적 갈등처럼 공급망을 흔들 수 있는 요인은 계속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기업의 공급망 전략은 위기 상황에서도 생산을 이어갈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전환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정 지역에 핵심 부품이나 원자재를 의존할수록 예상치 못한 충격이 전체 생산 차질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다음 위기의 시점과 형태를 예측하기 어려운 만큼, 공급망 다변화는 위기 이후의 대응책이 아니라 사전에 생산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으로 접근해야 한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Why Supply Chain Diversification Is Essential for Business Resilience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The Economy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