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리 인상도 미·일 공조도 역부족, 저성장·재정 부담에 멀어지는 ‘엔저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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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성장·재정 악화로 긴축 여력 축소, 금리 인상 속도 제약 미국보다 낮은 수익률에 해외 수익도 현지 유보, 엔화 매수세 부족 엔화 반등 기반 취약, 경제 기초체력 개선 과제로

일본은행의 금리 인상과 미·일 외환당국의 공동 개입에도 엔화 약세가 좀처럼 꺾이지 않고 있다. 미국과의 금리 격차가 여전한 데다 성장 둔화와 재정 부담으로 일본의 추가 긴축 여력도 제한된 탓이다. 무역적자에 따른 달러 수요가 이어지고 해외 투자수익마저 현지에 머물면서 엔화 매수 기반은 약해졌다. 일본의 경제적 위상마저 낮아지는 가운데, 생산성과 투자 매력을 높이지 않고서는 엔화 가치를 떠받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UBS “당국 개입은 엔화 매도 기회”
22일(이하 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케빈 자오(Kevin Zhao) UBS자산운용 글로벌채권 총괄은 일본 외환당국의 추가 엔화 매수 개입 가능성에 대해 "당국이 시장에 개입해 엔화 가치를 떠받치려 한다면 이는 엔화를 매도할 최적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은행의 금리 인상이 외환시장의 판도를 바꿀 만큼 매파적(통화 긴축)이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자오 총괄은 일본은행의 금리 인상 속도가 시장의 기대치를 밑돌고 있으며, 지속적인 약세 흐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평가했다.
엔화 약세의 핵심 원인으로는 미·일 간의 극심한 금리 격차가 꼽힌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금리 인하 기조로 돌아섰으나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기준금리를 유지하는 반면, 일본은행은 막대한 국가 부채 부담 탓에 가파른 금리 인상을 추진하기 힘든 구조다. 이로 인해 낮은 금리로 엔화를 조달해 달러 자산에 투자하는 '엔 캐리 트레이드' 유인이 여전히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 자오 총괄은 미일 금리 차 고착화가 지속될 경우 엔·달러 환율이 7월 말 기록했던 달러당 164엔대까지 다시 상승(엔화 가치 하락)할 위험이 크다고 경고했다.
미·일 공동 개입에도 엔저 지속, 일본은행 추가 긴축
미·일 간 금리차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으면서 외환당국의 엔화 매수 개입 효과도 오래가지 못했다. 지난 7월 말 양국이 공동 개입에 나서자 엔·달러 환율은 157엔대까지 내려갔지만, 8월 31일에는 다시 160엔선을 넘어 160.12엔을 기록했다. 미국의 금리 인상 가능성이 커지자 달러 매수세가 되살아나면서 개입으로 끌어올린 엔화 가치가 상당 부분 되밀린 것이다. 당시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일본의 통화정책 변화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엔화 강세가 지속되기 어렵다는 전문가들의 시각을 전했다. 미국까지 가세한 시장 개입에도 금리차를 겨냥한 자금 흐름을 돌려세우기는 어려웠다는 해석이다.
외환시장 개입 이후에도 엔저가 이어지고 물가 상승 압력이 커지자 일본은행도 추가 금리 인상에 나섰다. 지난 18일 기준금리를 연 1.0%에서 1.25%로 올려, 6월 인상 이후 석 달 만에 추가 긴축에 나섰다. 1995년 이후 31년 만의 최고 수준이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일본은행은 기업 간 거래가격 상승이 소비자물가로 번지기 시작했다고 판단했다. 우에다 가즈오 총재도 기조적 물가상승률이 목표치인 2%를 웃돌 위험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여기에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까지 엔저에 대응할 과감한 통화정책 조치를 요구하면서 인상을 늦추기 어려운 여건이 조성됐다.
표1. 엔저 흐름을 되돌리기 어려운 일본 경제 여건
| 요인 | 핵심 내용 | 엔화에 미치는 영향 |
|---|---|---|
| 성장 둔화 | 2026회계연도 실질 성장률·민간소비 증가율 전망 각각 1.3%에서 0.9%로 하향 | 금리 인상 시 소비·투자 위축 우려로 일본은행의 추가 긴축 여력 제한 |
| 재정 부담 | 식료품 소비세 감세에 따른 세수 부족 예상, 국채 원리금 상환 비용 증가 | 금리 상승에 따른 재정 부담으로 엔화 방어 목적의 인상 어려움 |
| 무역적자·고유가 | 5년 연속 무역적자에 에너지 수입 부담 확대 | 수입 결제용 달러 수요 증가로 엔화 매도 압력 지속 |
성장 둔화에 재정 부담까지
다만 0.25%포인트 금리 인상만으로 엔저 흐름을 되돌리기에는 일본 경제의 기초 여건이 취약하다. 일본 정부는 지난 7월 2026회계연도 실질 성장률과 민간소비 증가율 전망을 각각 1.3%에서 0.9%로 낮췄다. 설비투자 증가율 전망도 2.8%에서 2.3%로 내려 기업의 투자 확대 기대까지 후퇴했다. 여기에 에너지 가격 상승을 반영한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은 1.9%에서 2.2%로 높아져, 성장 둔화 속 물가 부담은 오히려 커질 것으로 예상됐다. 고유가로 가계 구매력과 기업 수익이 위축된 만큼, 금리를 빠르게 올리면 소비와 투자가 한층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 처지다.
감세와 지출 확대를 동시에 추진하는 재정 운용도 추가 긴축에 부담을 더했다. 다카이치 사나에 내각은 내년 4월부터 2년간 식료품 소비세율을 8%에서 1%로 낮출 계획이지만, 이에 따른 5조 엔(약 42조8,900억원)의 세수 부족분을 어떻게 메울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고령화로 연금·복지 지출이 늘어나는 가운데, 내년도 예산 요구안에 반영된 국채 원리금 상환 비용은 올해보다 5조3,600억 엔(약 45조9,780억원) 증가한 36조6,400억 엔(약 314조2,280억원)으로 사상 최대 규모다. 내수 회복과 재정 건전성을 함께 고려해야 하는 일본은행으로서는 엔화 방어만을 위해 금리 인상을 밀어붙이기 어려운 상황이다.
대외 거래에서도 엔화 가치를 뒷받침할 여력이 좀처럼 개선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은 지난 3월 끝난 2025회계연도에 1조7,000억 엔(약 14조5,720억원)의 무역적자를 기록해 5년 연속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미국의 관세 여파로 대미 자동차 수출이 16% 줄면서 전체 대미 수출도 6.6% 감소한 탓이다. 최근에는 에너지 수입 부담까지 커져 무역수지 개선을 가로막았다. 8월 수출액은 전년 동월보다 19.3% 증가했지만 수입액이 28% 늘면서, 무역수지는 1조1,000억 엔(약 9조4,280억원) 적자로 넉 달째 적자를 이어갔다. 원유 수입 의존도가 높은 일본에서는 유가가 오를수록 결제용 달러 수요가 늘어 엔화 매도 압력이 커진다.
경상흑자 사상 최대에도 엔저, 돌아오지 않는 해외 수익
엔저가 일본 내 물가 부담을 키우면서 교역 상대국에 미칠 파장도 경계 대상이 됐다. 일본 기업이 환율 효과를 활용해 수출가격을 낮출 경우 한국·미국·중국의 경쟁 업체들도 가격 인하 압박을 피하기 어렵다. 미국으로서는 금융시장에 미칠 여파까지 고려해야 하는 처지다. 일본 당국이 엔화 방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미 국채를 팔거나 일본 투자자들이 미국 자산을 처분해 자금을 회수하면 미 국채금리에 상승 압력이 가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미국이 엔화 매입 공조에 나선 데에는 일본발 미 국채 매도를 억제하려는 의도도 담겼다는 시장의 해석을 전했다. 일본에서도 수입 비용을 판매가격에 전가하기 어려운 기업과 생활비 부담이 커진 가계를 중심으로 엔저의 부작용이 쌓였다.
엔화 가치를 뒷받침할 수 있는 해외 투자수익도 국내로 충분히 돌아오지 못했다. 일본은 2024년 해외 투자에서 거둔 배당·이자 등을 포함한 본원소득수지에서 40조2,000억 엔(약 344조5,780억원)의 흑자를 냈다. 무역적자를 상쇄하고 경상수지 흑자를 사상 최대인 29조3,000억 엔(약 251조2,000억원)으로 끌어올린 주된 요인이다. 그러나 해외에서 번 돈 상당액이 현지에 재투자되면서 실제 엔화 매수로 이어지는 효과는 제한됐다. 해외 자회사가 배당하지 않고 내부에 유보한 이익도 국제수지 통계에는 재투자수익으로 잡힌다. 이 때문에 경상수지 흑자가 늘어도 외환시장에서는 그만큼의 엔화 매수세가 발생하지 않는다.
해외 수익의 국내 환류가 더딘 배경에는 기업과 투자자들의 수익률 판단이 깔려 있다. 미나미 다케시 농림중금종합연구소 수석이코노미스트는 해외 투자수익률이 일본보다 높은 상황에서는 자금을 본국으로 회수할 유인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엔화의 추가 하락을 예상하는 기업이라면 환전도 서두를 이유가 적다. 달러를 보유하다 엔·달러 환율이 더 올랐을 때 환전하면 같은 금액으로 더 많은 엔화를 확보할 수 있어서다. 현지 사업에 필요한 운전자금과 추가 투자 수요까지 겹치면 해외 수익을 그대로 남겨둘 유인은 더욱 커진다. 외환당국의 개입으로 엔화가 잠시 반등하더라도 기업의 중장기 자금 운용 계획까지 바뀌기는 어려운 여건이다.
경제대국 위상 약화, 엔화 수요 회복 시험대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금리 상승은 달러를 계속 보유할 유인을 더하고 있다. 연준의 추가 긴축 전망이 반영되면서 지난 18일 미 국채 2년물 금리는 4.741%로 올라 2024년 7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일본이 금리를 올려도 미국의 금리가 함께 오르면 해외 자금을 불러들일 효과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베선트 재무장관이 일본에 과감한 통화정책 대응을 요구한 데도 이런 사정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일본이 엔화 자산의 수익률을 충분히 높이지 못하면 미국까지 동참한 환율 방어도 민간의 달러 보유 수요에 밀릴 수 있다는 의미다.
게다가 엔화 수요를 뒷받침하던 일본의 경제적 위상도 예전 같지 않다. 간다 마사토 아시아개발은행(ADB) 총재는 지난 16일 도쿄에서 열린 요미우리 국제경제간담회 강연에서 “이제 아무도 일본을 초강대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 경제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이 2000년 절반 이상에서 2025년 10% 수준으로 줄어든 현실을 짚은 발언이다. 같은 기간 중국의 비중은 절반에 육박했고, 인도도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성장했다. 간다 총재는 이러한 위상 변화와 엔저를 연결해 중장기적으로 환율은 국력을 반영한다며 생산성 향상과 노동시장 개혁을 주문했다. 일본에 투자해 얻을 수익에 대한 기대가 높아져야 엔화 보유 수요도 살아날 수 있다는 의미로 읽힌다. 과거 아시아 최대 경제대국이 누렸던 위상만으로는 자금을 끌어들이기 어려워진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