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관세발 물가 충격 제한적, 에너지·반도체가 美 가계 부담 키웠다
입력
수정
관세 인하·유예로 수입 비용 줄며 美 물가 충격 완화 정작 가계 부담 키운 건 전쟁·전력 수요 급증 메모리 공급난에 에너지·소재 불안 겹쳐 칩플레이션 가중

미국의 관세발 물가 충격이 당초 우려했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 것으로 파악됐다. 수입 원가 상승분이 소비자 가격에 일부만 반영된 데다, 대중 관세 인하와 잇단 유예로 수입업체의 비용 부담도 줄어든 영향이다. 오히려 미국 가계부담을 키운 건 에너지 가격이었다. 이란전쟁 여파로 기름값이 급등하고 데이터센터 증설로 전기요금에도 인상 압력이 커지고 있다. 여기에 중동발 에너지·원자재 공급 불안이 반도체 생산비를 압박하면서 ‘칩플레이션’ 우려를 더하는 실정이다.
유통비 비중에 희석된 관세발 물가 충격
11일(이하 현지시간) 뉴욕 연방준비은행 연구진이 67개 비석유 소비재 품목군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올해 2월 기준 관세는 이들 품목의 전년 동기 대비 가격상승률을 2.9%포인트 끌어올렸다. 연구진이 추정한 평균 관세율 1%포인트 인상에 따른 소비재 가격 상승 폭은 1년 뒤 약 0.25%였다. 소비자가 지불하는 상품 가격의 절반가량을 운송·도매·소매 등 유통 비용이 차지하면서 관세의 영향이 희석되는 구조다. 연구진은 수입가격과 국내 생산자가격이 관세 영향으로 10% 상승하는 경우 소매가격 상승 폭을 5.6%로 추정했다. 관세 인상분이 소매가격에 전달되는 과정에서 상승 폭이 제한됐다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관세가 물가상승률에 미치는 영향도 약해질 것으로 예상됐다. 연구진의 추정 경로를 보면, 소비재의 전년 동기 대비 가격상승률에 대한 관세 기여도는 지난 2월 2.9%포인트로 정점을 찍은 뒤 8월에는 0%포인트 안팎으로 낮아진다. 올해 초 관세율 인하 효과에 지난해 가격 인상분이 연간 비교 대상에서 빠지는 기저효과가 더해진 결과다. 관세로 높아진 상품 가격 수준은 유지되며, 관세가 없었을 경우와 비교한 가격 격차는 2월 약 3%에서 8월 약 2%로 축소되는 것으로 추산됐다. 이후 가격 경로에는 캐나다산 제품에 대한 추가 관세와 내년 1월로 예정된 자동차 관세 인상 효과가 반영돼 있다.
주거비·임금 둔화가 관세 충격 완충
전체 물가에 미친 관세의 영향도 제한적이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존 윌리엄스 뉴욕 연은 총재는 올해 1월 당시 약 2.75%였던 물가상승률 가운데 관세의 기여분을 0.5%포인트로 추산했다. 주거비 상승세가 꾸준히 둔화하고 임금 상승률도 낮은 물가상승률에 부합하는 수준으로 내려오면서 전반적인 물가 압력을 누그러뜨렸다는 설명이다. 여기에 뚜렷한 공급망 병목도 나타나지 않아 광범위한 인플레이션 압력이 확산하는 징후는 관찰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중장기 기대인플레이션 역시 코로나19 이전 범위에서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진단을 내놨다.
이 같은 분석은 지난해 제기됐던 광범위한 물가 급등 우려에 비해 관세 충격의 확산 범위가 제한적이었다는 해석을 뒷받침한다. 당시에는 기업들이 관세 부과 전 확보한 재고를 소진하면서 원가 부담을 판매가격에 본격적으로 반영할 것이란 전망이 잇따랐다. 지난해 10월 씨티그룹의 네이선 시츠 글로벌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미국 소비자가 떠안는 관세 부담 비율이 당시 30~40%에서 수개월 내 약 60%까지 높아질 것으로 내다봤다. 기업들이 떠안고 있던 비용이 가계로 옮겨가면서 소비자들의 체감 부담도 빠르게 늘어날 수 있다는 관측이었다. 하지만 이후 확인된 물가 흐름에서는 당초 우려했던 광범위한 가격 급등 조짐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표1. 미국 관세의 소비재 가격·물가상승률 영향
| 구분 | 주요 수치·전망 | 배경·의미 |
|---|---|---|
| 소비재 가격 영향 | 올해 2월 소비재 가격상승률 중 관세 기여도 2.9%포인트 | 67개 비석유 소비재 품목군 전년 동기 대비 가격상승률 분석 결과 |
| 유통 비용의 완충 | 수입가격·국내 생산자가격 10% 상승 시 소매가격 5.6% 상승 추정 | 상품 가격 중 절반가량인 운송·도매·소매 비용이 관세 영향 희석 |
| 물가 기여도 둔화 | 관세 기여도, 2월 2.9%포인트 → 8월 0%포인트 안팎 전망 | 올해 초 관세율 인하 및 지난해 가격 인상에 따른 기저효과 반영 |
| 가격 부담 지속 | 관세 미부과 시 대비 가격 격차, 2월 약 3% → 8월 약 2% 전망 | 물가상승률 기여도 하락에도 관세로 높아진 가격 수준 유지 |
| 전체 물가 영향 | 올해 1월 당시 물가상승률 약 2.75% 중 관세 기여분 약 0.5%포인트 | 윌리엄스 뉴욕 연은 총재 추산. 주거비·임금 상승세 둔화로 물가 압력 완화 |
협상으로 낮춘 관세도 물가 부담 덜어
물가 충격이 당초 우려보다 작았던 데는 대중 관세 인하와 잇단 유예 조치가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지난해 4월 미국이 중국산 제품에 대한 추가 관세율을 145%까지 끌어올렸을 당시에는 수입 중단과 상품 부족이 가격 급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컸다.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도 세 자릿수 관세를 사실상 '금수조치'로 표현했다. 그만큼 높은 관세가 유지되면 미국 업체들은 막대한 세금을 부담하거나 중국산 제품을 대신할 공급처를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해 5월 양국이 제네바 협상에서 90일간 관세를 낮추기로 합의하면서 부담이 한층 줄었다. 미국의 대중 추가 관세율이 145%에서 펜타닐 관련 관세 20%와 기본 상호관세 10%를 합친 30%로 낮아진 데 따른 것이다. 기존 품목별 관세는 유지됐지만, 추가 관세율이 115%포인트 내려가면서 수입업체들도 비용 압박을 덜 수 있게 됐다.
이후 관세 유예가 거듭 연장되면서 초고율 관세의 재부과를 피할 수 있는 기간도 길어졌다. 양국은 작년 8월 유예 기한을 90일 더 늘렸고, 같은 해 10월 다시 불거진 무역 갈등도 정상 간 협상으로 수위를 조절했다. 당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의 희토류 수출 통제에 맞서 100% 추가 관세를 예고하며 압박에 나섰으나, 같은 달 정상회담에서는 관세 인하와 무역 휴전에 합의했다. 미국은 이에 따라 11월부터 펜타닐 관련 관세를 10%포인트 낮추고 상호관세 인상분의 유예 기한을 올해 11월 10일까지 연장했으며, 중국도 희토류 수출 통제 유예와 미국산 농산물 구매 확대를 약속했다. 고율 관세를 앞세운 압박이 상대국의 양보를 얻어내는 협상으로 이어진 셈이다. 지난달에는 무역 휴전 기한을 내년 1월 10일까지 두 달 더 늘리기로 하면서 추가 부담을 억제하는 조치가 올해까지 이어지고 있다.
에너지 가격 16% 뛰며 美 물가 자극
대중 관세 인하와 유예로 물가 상승 압력이 줄어든 가운데, 정작 미국 물가를 크게 자극한 것은 에너지 가격 급등이었다. 미 노동통계국에 따르면 지난 8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 동월 대비 3.4% 상승했다. 같은 기간 에너지 가격이 16.3% 뛰면서 전체 물가를 끌어올렸고, 특히 휘발유는 27.4% 급등해 가계의 주유비 부담을 키웠다. 에너지발 상승 압력은 월간 지표에서도 확인된다. 8월 에너지 가격은 전월보다 2.1% 올랐으며, 이 가운데 휘발유는 3.9% 상승해 전체 소비자물가의 전월 대비 상승분인 0.4% 중 3분의 1 이상을 차지했다. 식료품과 에너지를 제외한 근원 물가상승률은 전년 동월 대비 2.4%로, 전체 상승률을 1%포인트 밑돌았다. 이란전쟁에 따른 원유 공급 차질이 휘발유 가격에 반영되면서 소비자들이 주유소에서 체감하는 물가 부담도 커진 것이다.
전기요금에도 상승 압력이 쌓이고 있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데이터센터 가동 확대 등이 맞물리면서 2020~2025년 미국의 전력 수요는 연평균 1.7% 증가했다. 이를 감당할 발전소와 송전망 확충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만큼, 당장은 기존 설비의 가동을 늘려 수요를 충당해야 하는 상황이다. 공급 부족을 해소하기 위한 설비 투자도 요금 인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데이터센터에 전기를 공급하려고 전력망을 확충하면서 투자비 일부를 일반 가정에 나눠 부과하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어서다. 가정의 전력 사용량과 무관하게 데이터센터용 기반시설 투자비가 요금 인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AI 투자 경쟁 여파도 소비자 가격으로
인공지능(AI) 투자 열풍에 따른 반도체 가격 상승도 물가 부담을 키우고 있다. 데이터센터용 메모리 수요가 급증하자 반도체 업체들은 수익성이 높은 서버용 제품에 생산 역량을 집중했다. 그 여파로 스마트폰·PC용 메모리 공급이 빠듯해진 가운데, 대형 클라우드·AI 기업들의 장기 계약을 통한 물량 선점까지 겹치면서 전자제품 제조업체의 부품 조달 부담은 더욱 커졌다. 모건스탠리는 지난 6월 메모리 가격이 1년 새 6배로 상승했다고 분석하며 이 같은 수급 불균형을 지적한 바 있다. 메모리 확보 비용이 늘면서 완제품 가격에도 인상 압력이 쌓이는 칩플레이션 우려가 커지는 모습이다.
여기에 중동발 에너지·원자재 공급 차질은 칩플레이션을 심화시킬 변수로 꼽힌다. 전력 소비가 많은 반도체 공정에서는 에너지 가격 상승이 제조원가를 압박하고, 필수 소재의 공급 불안은 생산 차질로 이어질 수 있어서다. 실제로 세계 헬륨 공급의 약 30%를 담당하는 카타르의 생산·운송이 차질을 빚으면서 반도체 공정의 냉각 등에 쓰이는 헬륨 현물 가격은 전쟁 초기 두 배 이상으로 올랐다. 업체들은 공급처 다변화와 비축 물량으로 생산을 이어왔으나, 공급 차질이 길어지면 대응 여력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글로벌 채권운용사 핌코(PIMCO)에 따르면 일부 아시아 주요 반도체 제조사들의 헬륨 재고는 3개월 치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전해진다.
공급 불안이 이어지는 가운데, 반도체 가격 상승의 여파는 완제품 시장의 수요 위축으로 나타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IDC가 지난 8일 발표한 잠정 집계에 따르면 올해 3분기 세계 PC 출하량은 6,270만 대로, 전년 동기 대비 20.1% 감소했다. 가격 상승이 구매 수요를 억누르는 상황에서 제조사와 유통업체들이 상반기에 미리 확보한 재고까지 쌓이면서 하반기 출하량에 부담을 줬다는 분석이다. 스마트폰 시장에서도 가격 인상과 저가 제품 축소가 동시에 진행되는 분위기다. IDC는 지난 8월 전망에서 올해 스마트폰 평균 판매가격을 전년 대비 27.6% 높은 581달러로 예상하고, 출하량 감소율 전망은 종전 13.9%에서 16.7%로 높였다. 메모리 비용 상승을 감당하기 어려운 업체들이 저가 모델을 줄이고 고가 제품 비중을 높이는 흐름까지 반영한 수치다. 반도체 업체들이 생산능력 확충에 나서고 있지만 신규 공장을 짓고 가동하기까지는 수년이 걸려, 메모리 공급난에 따른 가격 부담도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관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