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 500억 유로 군사력 보강, 빚내서 '대포' 사고 '버터' 깎는 유럽
獨 500억 유로 군사력 보강, 빚내서 '대포' 사고 '버터' 깎는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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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 의회, 500억 유로 군사 패키지 승인 및 헌법 개정으로 부채 빗장 풀며 재무장 가속화 NATO "GDP 5%" 파격 합의에 EU는 45년 만기 'SAFE' 대출 등 공동차입으로 자금 수혈 빚더미 앉은 유럽, 안보 위해 복지 예산 삭감하는 '대포와 버터' 딜레마

독일 연방의회가 500억 유로(약 86조7,500억원) 규모의 초대형 군사 조달 패키지를 승인하며 재무장을 서두르고 있다. 유럽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국내총생산(GDP) 5% 투자'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공동차입(SAFE)과 같은 장기 조달 수단까지 동원하며 안보 비용의 상수화 단계로 진입했다. 하지만 국방 예산의 덩치가 커질수록 복지·기후 예산을 잠식하는 배분 갈등이 불가피해졌고, 고(高)부채국을 중심으로 재정준칙 무력화와 정치적 반발이라는 거센 역풍이 예고되고 있다.
獨 군사력 보강에 500억 유로 투입, '재무장' 본격화
17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독일 연방의회가 500억 유로 규모의 군사장비 조달 패키지를 승인하며 '재무장(Remilitarization)'을 본격화했다고 보도했다. 이번 패키지는 '기초 보급'과 '첨단 전력'의 동시 보강에 방점이 찍혔다. 전체 예산의 40%인 210억 유로(약 30조원)는 전투복 등 피복·개인장비 교체에 투입되는데, 이는 그간 경제 대국 독일의 안보 공백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방증한다.
독일은 이와 함께 △푸마 장갑차(42억 유로·약 7조2,800억원) △위성 시스템 '스폭'(17억6,000만 유로·약 3조500억원) △패트리어트 미사일(15억5,000만 유로·약 2조6,800억원) △씨가디언 무인기 등 첨단 전력 도입도 확정됐다. 독일 정부는 2030년까지 군 하드웨어를 전면 개편하기 위해 향후 5년간 총 6,500억 유로(약 1,130조원)를 투입할 계획이다. 이는 직전 5년 지출액의 두 배에 달하는 규모다.
막대한 재원 마련을 위해 독일은 국가 재정의 빗장까지 풀었다. 지난 3월 헌법(기본법) 개정을 통해 신규 부채한도 규제를 완화함으로써, 국방비와 인프라 기금 지출을 사실상 무제한으로 허용한 것이다. 이에 따라 12년간 5,000억 유로(약 867조원)를 투입하는 인프라 투자기금 역시 부채한도의 제약을 받지 않게 됐다. 이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평화 배당금' 시대가 저물고, 국방비를 GDP 1%대로 묶어두며 미국의 안보 우산에 기대던 무임승차 기조에서 벗어나 홀로서기에 나서겠다는 강력한 의지로 풀이된다.
정치권 역시 정파를 초월해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올라프 숄츠 전 총리의 '시대전환' 선언에 이어, 프리드리히 메르츠 현 총리 또한 '유럽 최강군 건설'과 '대미 안보 독립'을 국정 최우선 과제로 천명했다. 이에 발맞춰 병력 구조 개편도 속도를 낸다. 내년부터 18세 남성 징병 검사를 의무화해 현재 18만 명 수준인 현역을 2035년까지 26만 명으로 늘리고, 예비군도 20만 명으로 확충하여 미군 주둔 축소 가능성에 대비한다는 방침이다.
NATO GDP 5% 국방비 투자 합의, 45년 만기 대출로 시간 사는 EU
독일의 전례 없는 재무장 드라이브는 유럽 안보 지형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음을 알리는 서막에 불과하다. 유럽 전체가 감당해야 할 안보 비용 청구서는 이제 단순한 압박을 넘어 '동맹의 공식 합의'로 굳어졌다. NATO는 2025년 헤이그 정상회의에서 2035년까지 GDP의 5% 투자를 합의했고, 이를 구체적으로 핵심 국방 3.5%와 방산기반·인프라·복원력 등 1.5%로 세분화해 목표를 제시했다. 회원국들은 이에 따라 연간 이행계획을 제출하고, 2029년에 지출 경로를 중간 점검하기로 했다.
이 같은 목표치는 북한과 대치 중인 '휴전 국가' 한국의 국방 투자를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다. 올해 한국의 국방예산은 61조2,469억원으로 GDP의 2.32%에 해당한다. NATO가 제시한 5% 목표를 한국 경제 규모에 대입하면, 국방비를 당장 두 배가 넘는 132조원으로 증액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사실상 유럽 전체가 평시 경제를 넘어 '전시 경제(War Economy)' 체제로의 전환을 선언한 것과 다름없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주요국들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특히 독일은 올해 GDP 대비 2.4%인 국방비를 2029년 3.5%로 끌어올리며, 전통적인 군사 강국인 영국과 프랑스보다 빠르게 NATO 합의안을 달성할 전망이다. 프랑스는 현 2% 수준인 국방비를 2030년까지 3~3.5%로, 영국은 현 2.3%에서 2035년까지 3.5%로 단계적으로 늘리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문제는 천문학적인 비용이다. 유럽의회 싱크탱크 분석에 따르면, 유럽연합(EU)-NATO 23개국이 국방비를 GDP 대비 2%에서 3.5%로 올리는 것만으로도 연간 2,540억 유로(약 440조4,800억원)의 추가 재원이 필요하다. 감당하기 힘든 비용 부담에 EU는 개별 국가가 아닌 공동의 신용으로 빚을 내는 우회로를 택했다. 바로 'SAFE(안보행동)'와 같은 공동 차입 수단이다. EU의 SAFE는 EU가 AAA 등급 신용도를 활용해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한 뒤, 회원국에 원가 수준으로 장기 대출해 방산 프로젝트를 돌리는 장치다. 1차 SAFE 대출 1,500억 유로(약 260조1,300억원)에 대해 신청액이 1,900억 유로(약 329조4,900억원)를 초과할 만큼 수요가 폭발했으며, 대출 조건은 최장 45년 만기, 원금 상환 10년 유예라는 파격적인 조건이 붙었다. EU 집행위원회가 2차 SAFE 조성을 검토 중인 것은 결국 빚의 만기를 최대한 뒤로 미루며 '시간을 사겠다'는 고육지책으로 풀이된다.

복지 천국은 끝났다, 빚더미 위에서 대포 사느라 버터 깎는 유럽
EU가 이처럼 사실상 상환을 유예하며 시간 벌기에 나선 것은 개별 국가의 재정 여력이 사실상 고갈됐다는 방증이다. EU 통계기관 유로스탯(Eurostat)에 따르면 유로존의 정부부채 비율은 2024년 4분기 기준 GDP 대비 87.4%에 달해 재정 여력이 바닥난 상태다. 알프레드 카머 국제통화기금(IMF) 유럽국장은 현 정책이 지속될 경우, 유럽의 평균 부채가 15년 내 GDP의 130% 수준으로 치솟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실제로 국방비 증액 여파로 재정 모범국이었던 독일마저 2024년 일반정부 적자가 1,188억 유로(약 206조1,200억원·GDP 대비 2.8%)로 확대됐고, 방위·인프라 지출 확대가 향후 재정지표를 더 압박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결국 유럽 각국은 안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복지 곳간을 헐기 시작했다. '대포(안보)'를 사기 위해 '버터(복지)'를 줄여야 하는 냉혹한 현실이 정책으로 구체화되고 있는 것이다. 가장 상황이 심각한 곳은 프랑스다. IMF에 따르면 프랑스의 GDP 대비 부채 비율은 2014년 95.4%에서 최근 113.1%까지 치솟았다.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마저 0.6%에 불과한 상황에서 프랑스 정부는 예산 동결이라는 고육지책을 꺼내들었다. 프랑수아 바이루 총리는 "국방 역량 강화를 위해 총 438억 유로(약 75조9,600억원)를 절감해야 한다"며 "내년에는 국방을 제외하고 올해보다 1유로(약 1,700원)도 더 지출하지 않는 것이 제1원칙"이라고 못 박았다.
다른 국가들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코로나19 이후 부채비율이 100%를 돌파한 영국은 내년 국방비를 620억 파운드(약 122조4,400억원)로 늘리는 대신, 공적개발원조(ODA)를 국민총소득(GNI) 대비 0.3%로 축소하고 장애인 수당 등 복지 예산 50억 파운드(약 9조8,700억원)를 삭감하기로 했다. 네덜란드 역시 국방비를 240억 유로(약 41조6,200억원)로 증액하는 반대급부로 고등교육과 장학금 예산을 줄이는 긴축안을 발표했다. 핀란드 중도우파 연정 또한 국방비를 67억 유로(약 11조6,200억원)로 늘리는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주거·실업·의료 지원 예산을 삭감하고 직업교육 예산 12억 유로(약 2조800억원)를 쳐냈다.
하지만 이러한 긴축 노력에도 불구하고 재정 건전성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EU 집행위는 2024년 GDP 대비 재정 적자가 4.4%를 기록해 상한선(3%)을 훌쩍 넘긴 핀란드를 상대로 '초과적자절차(EDP)' 착수를 추진하고 있다. 물론 EU 측도 회원국의 국방비 부담을 감안해 유연책을 내놨다. EU 이사회는 지난 7월 '국가별 예외조항(NEC)'을 발동해, 2025년부터 4년간 방위비 증액분(연간 최대 GDP 1.5%p)을 재정 평가에서 참작해 주기로 했다. 그러나 핀란드처럼 기초 재정 체력이 약해 방위비 예외분을 제외하고도 적자 상한선(3%)을 넘기는 국가들은 여전히 제재 리스크를 피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국민들의 피로감도 감지된다. 최근 유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방비 증액 찬성률은 67%로 전년(74%) 대비 7%포인트 하락했다. 특히 러시아와 인접한 북유럽(80%대 찬성)과 달리, 재정난이 심각한 이탈리아·스페인 등 남유럽권에서는 찬성률이 50%대로 떨어지며 안보보다 경제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FT는 "유럽이 복지 예산을 삭감하지 않고 빚을 내서 국방비를 충당하는 방식은 한계에 봉착했다"며 "유럽인들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넉넉한 복지 혜택을 누리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재정준칙이 무력화된 상황에서 치러지는 유럽의 거대한 재무장 실험이 복지 국가 모델의 붕괴로 이어질지, 유럽 경제는 중대한 시험대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