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자동차 탈탄소 정책 전환, 전기차 ‘유일한 답’ 공식 무너지다
EU 자동차 탈탄소 정책 전환, 전기차 ‘유일한 답’ 공식 무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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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차 회의론 정책 영역 확장
보조금 의존 구조 취약성 노출
산업 전반 옥석가리기 본격화

유럽연합(EU)이 2035년부터 신차 탄소 배출량을 ‘제로(0)’로 제한해 사실상 내연기관차 판매를 금지하겠다는 기존 방침에서 한발 물러섰다. 전기차 생산 단계에서의 탄소 배출과 수요 둔화, 산업 부담 등을 고려해 대체연료와 기존 기술을 병행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동시에 시장에서는 전기차 사업의 수익성과 경쟁력을 둘러싼 경고 신호가 하나둘 구체화하는 양상이다. 이에 대대적인 물량 공세로 시장 확대를 주도해 온 중국 전기차 산업의 지속 가능성 역시 시험대에 올랐다.
기술 병행 허용으로 전환 속도 조절
17일(이하 현지시각)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EU 집행위원회는 전날 벨기에 브뤼셀에서 내연기관차 판매를 조건부로 허용하는 개정안을 발표했다. EU는 지난 2023년 유럽 그린딜 정책의 일환으로 2035년부터 판매되는 모든 신차의 탄소 배출량을 제로로 의무화하며 사실상 내연기관차 판매를 전면 금지한 바 있다. 하지만 이번 개정안을 통해 자동차 제조사들이 2035년 이후에도 2021년 대비 90% 수준의 배출가스 감축만 달성하면 내연기관차와 하이브리드 차량을 생산·판매할 수 있도록 했다.
개정안의 핵심은 2035년 이후에도 차량 한 대당 최대 10%의 잔여 이산화탄소 배출을 허용하고, 이를 △합성연료(e-fuel) 사용 △지속가능 바이오연료 적용 △저탄소 강철 활용에 따른 크레딧으로 상쇄할 수 있도록 한 점이다. 이는 탄소 배출량 제로를 차량 기술 자체로 달성해야 한다는 기존 원칙에서 벗어나 연료·소재·공정 전반의 감축 효과를 두루 인정한다는 의미다. 이 같은 방식은 전기차만이 유일한 해법이라던 기존 접근에서 벗어나 내연기관 기반 기술과 대체연료 병행 등 선택지를 넓히려는 시도로 읽힌다.
정책 전환의 배경에는 전기차 자체의 탄소 저감 효과에 대한 근본적 의문이 깔려 있다. 전기차 보급이 탈탄소로 이어지려면 전력 생산 단계에서의 탄소 배출 감축이 전제돼야 하는 탓이다. 이 때문에 유럽 내에서도 석탄·가스 비중이 여전히 높고 국가별 전력 믹스 차이가 큰 지역에서는 전기차 확산이 곧바로 온실가스 감축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거듭 제기됐다. 전기차를 둘러싸고 “생산 과정에서 탄소가 배출된다면, 과연 진정한 의미의 ‘무공해’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나”라는 회의론이 산업계 논리를 넘어 정책 판단의 근거로 재등장한 셈이다.
산업 현실 역시 EU의 선택을 압박했다. 그간 독일과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유럽 자동차업계는 급격한 전기차 전환이 전통 내연기관 기술과 생산 기반을 동시에 유지해야 하는 이중 부담을 키운다고는 점을 거듭 호소했다. 여기에 충전 인프라 확충 속도, 구매 보조금 축소, 전기차 수요 둔화까지 겹치면서 100% 무공해차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다는 주장에도 무게가 실렸다. 이번 개정안에 EU가 승합차 부문의 2030년 이산화탄소 감축 목표를 50%에서 40%로 낮추고, 2030~2032년 사이 크레딧 차입·적립을 허용하는 유연성 조항까지 포함시킨 이유다.
이 같은 변화는 글로벌 완성차 기업의 전기차 중심 탈탄소 전략 전반에도 재검토를 요구한다. 실제로 현대차와 기아는 단기적으로 하이브리드(HEV, PHEV) 차량 판매 비중과 라인업을 확대하면서 장기적으로는 버스, 트럭 등 상용차를 중심으로 수소차의 경쟁력을 높여 유럽 자동차 시장을 공략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와 함께 꾸준히 역량을 확보해 온 대체연료 내연기관 기술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구상이다. 이 같은 흐름에서 볼 때 전기차가 유일한 정답이라는 전제에서 벗어난 EU의 선택은 탈탄소를 둘러싼 정책 논리가 기술 현실과 산업 구조를 다시 반영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정책 상품에서 시장 상품으로
최근의 전기차 시장은 가격 경쟁이 성능·기술 경쟁을 압도하는 국면으로 정의된다. 배터리 원가 부담과 충전 인프라 비용, 각국 보조금 축소 등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전기차의 경쟁력은 정책 지원이 유지되는 환경에서만 성립된다는 한계가 반복적으로 드러나면서다. 이 과정에서 유럽과 미국은 중국의 전기차 보조금 정책과 과잉생산 문제를 노골적으로 문제 삼아 왔다. 자국 정부의 막대한 보조금에 기반한 중국산 전기차의 저가 공세가 시장을 왜곡시켰다는 인식이 각국 정책 당국과 산업계 전반에 확산한 것이다.
중국은 이러한 문제 제기에 강하게 반발했다. 허리펑 중국 부총리는 2023년 9월 발디스 돔브로우스키스 EU 경제·통상 담당 수석 집행부위원장과의 회담에서 EU의 전기차 보조금 조사에 대해 “무역구제조치를 과도하게 사용하는 것”이라면서 “(중국산) 전기차 가격 경쟁력은 보조금이 아니라 산업망 발달에서 비롯됐다”고 강조했다. 중국자동차공업협회 역시 EU의 조치를 “보호무역주의이자 불공정한 행위”라고 규정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전기차 산업을 둘러싼 갈등이 단순한 기술 경쟁을 넘어 통상·정책 문제로 확장되고 있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미국의 문제 제기는 한층 더 직설적이다. 재닛 옐런 전 미국 재무장관은 2024년 3월 연설에서 “중국이 전기차를 과잉생산해 글로벌 가격과 생산 질서를 왜곡시키고 있다”고 짚으며 “이는 전 세계 노동자들과 기업들에 피해로 이어질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옐런 전 장관은 “중국 정부가 2009년 이후 전기차 제조업체에 지급한 보조금 규모가 1,600억 위안(약 30조원)에 달하며, 비야디(BYD) 한 곳이 받은 보조금만 해도 70억 위안(약 1조3,000억원)에 이른다”고 덧붙이며 보조금에 의존해 형성된 시장 구조를 강하게 비판했다.

경쟁 심화, 장기 소모전 국면 진입
이처럼 서방 국가들이 전기차 지원 정책을 조정하는 흐름 속에서 중국 전기차 산업은 지금까지의 고성장 이면에 가려졌던 수익성과 지속 가능성 문제를 동시에 마주했다. 보조금과 대규모 물량 확대에 의존해 외형을 키워 온 전략이 선진국 시장에서 더 이상 그대로 작동하지 않으면서 산업 전반에 걸친 사업성 재검증 또한 불가피해졌다. 특히 수익을 내지 못하는 기업이 대다수인 상황에서 시장 확대 전략 자체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평가가 확산하는 추세다.
수익성 악화는 수치로 확인된다. 한국자동차연구원에 의하면 중국 전기차 시장에는 한때 500개가 넘는 완성차 업체가 난립했으나, 2023년 이후 가격 출혈 경쟁이 격화되면서 현재 100여 개 업체로 줄었다. 심지어 이 가운데 연간 흑자를 기록하는 기업은 BYD, 중국 테슬라, 리오토, 지리자동차 등 4곳에 불과한 것으로 파악됐다. 또 지난해 기준 중국의 전기차 생산능력은 연간 5,507만 대에 달했지만, 내수 판매량은 2,690만 대에 그쳤다. 수출 물량을 모두 포함해도 2,000만 대 분량의 설비가 남아 실질 가동률은 50% 안팎으로 추정된다.
과잉 공급은 산업 전반의 수익성을 갉아먹는다. 일부 부품 공급업체는 연 10~15% 수준의 단가 인하 요구를 받은 것으로 전해졌으며, 대금 지급이 최대 6개월까지 지연되는 사례도 보고됐다. 완성차 딜러들 역시 매입 가격보다 낮은 가격에 차량을 판매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면서 판매량을 늘릴수록 손실이 커지는 악순환을 반복하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중국 내부에서는 경쟁이 치열해지는 와중에 산업의 질적 개선이 뒤따르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내권’ 현상이 심화했다는 비판이 지배적이다.
수익성 문제와 함께 품질 리스크도 본격적으로 표면화됐다. 일례로 BYD는 지난 10월부터 이달 초까지 불과 두 달 사이 총 20만 대가 넘는 대규모 리콜을 실시했다. 2015~2022년 생산된 ‘탕(Tang)’ 중형 SUV와 ‘위안 프로(Yuan Pro)’ 소형 SUV에서 배터리 팩 출력 저하, 밀봉 구조 결함, 모터 제어 장치 이상 등 문제가 확인되면서다. 중국 국가시장감독관리총국 조사에서는 일부 차량이 방수 성능 저하로 주행 중 출력이 급감하거나 모터 제어기 결함으로 고속 주행 중 전력 공급이 차단되는 사례도 포착됐다. 빠른 시장 선점을 목표로 달려오는 동안 품질 검증이 안전 기준을 앞지른 셈이다.
이런 가운데 중국 전기차 업체들은 새로운 출구로 글로벌 사우스(비서구권 개발도상국 국가) 시장을 겨냥하는 모양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지난해 태국 시장 내 중국 전기차 판매량은 전년 대비 20% 이상 증가했다. 다만 이 같은 시장 점유율 확대는 가격 경쟁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또 한 번 기업의 수익성을 압박한다. BYD는 전기 세단 ‘씰(Seal)’의 태국 내 출고가를 최대 38% 인하했고, 상하이자동차(SAIC)는 MG4 해치백을 27% 할인했다. 선진국 시장의 정책 후퇴와 품질 논란, 그리고 신흥국에서의 출혈 경쟁이 맞물리면서 중국 전기차 산업 역시 양적 성장 국면을 넘어 본격적인 생존 경쟁 단계에 들어선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