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블랙홀이 부른 ‘칩플레이션’, 300만원 노트북·200만원 스마트폰 시대 열렸다
AI 블랙홀이 부른 ‘칩플레이션’, 300만원 노트북·200만원 스마트폰 시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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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블랙홀’이 메모리 잠식, 범용 D램 ‘공급 절벽’ 제품 가격 폭등한 노트북 시장 "오늘이 가장 싸다" 단기 사이클 아닌 구조적 대전환, 한동안 공급자 우위

메모리 가격 폭등이 글로벌 정보기술(IT) 시장 전반을 뒤흔들고 있다. 인공지능(AI) 확산으로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요가 급증하면서 범용 D램과 낸드 가격이 폭등했고, 그 여파는 노트북·스마트폰·게임기 등 완제품 가격 인상으로 직결되고 있다. 메모리 가격 급등으로 IT 완제품 값이 뒤따라 오르는 '칩플레이션'이 본격화한 모양새다.
반도체 대란에 '金트북' 시대 열려
25일(이하 현지시간) 테크레이더(TechRadar)·CRN 등 IT 전문 매체에 따르면, 세계 최대 PC 제조사 레노버(Lenovo)는 유통 파트너사들에 오는 3월부터 일부 제품군 가격을 인상하겠다고 공식 통보했다. 레노버 측은 "2월 28일까지 접수된 주문만 현행 가격을 적용하며, 해당 시한 내 주문 건이라도 3월 31일까지 출고되지 않으면 인상된 가격이 적용된다"고 못 박은 것으로 알려졌다.
레노버 북미 채널 담당 웨이드 맥팔랜드(Wade McFarland) 부사장은 "시장 상황 변화에 대응해 주기적으로 가격을 검토하고 있다"며 "이번 조정은 불가피한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게이밍 신제품 '리전 고(Legion Go) 2' 등 소비자 기대가 높은 휴대용 PC도 당초 예상보다 높은 출시가가 책정될 가능성이 커졌다.
PC 가격 급등의 주범은 메모리다. 최근 AI 칩에 쓰이는 고대역폭메모리(HBM)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일반 전자기기에 사용되는 범용 메모리 생산이 줄어들었고 이는 가격 급등으로 직결됐다. PC용 범용 D램 최저 가격(삼성전자 DDR5-5600 16기가바이트(GB) 기준)은 지난해 9월 6만9,246원에서 12월 19만8,000원으로 상승했고, 지난달 말에는 40만7,000원까지 치솟았다. 낸드플래시 기반의 저장 장치 가격도 급등했다. 고속 저장 장치(SSD)는 작년 9월 15만5,540원(삼성전자 990 PRO 1테라바이트(TB) 기준)에서 39만8,800원으로 가격이 2.6배 올랐고, 하드디스크드라이브(HDD) 역시 같은 기간 19만1,480원(WD Blue 256메가바이트(MB) 기준)에서 31만8,620원으로 1.7배 뛰었다.
이에 레노버뿐 아니라 델도 올해 상반기 가격 인상을 단행할 예정이다. 델 최고운영책임자(COO) 제프 클라크(Jeff Clarke)는 작년 11월 실적 발표 콘퍼런스콜 당시 "이 정도 속도로 원가가 오르는 경우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면서 "이 비용을 소비자에게 전가하지 않을 방법이 없다"고 밝혔다. 델은 이미 지난해 12월 중순을 기점으로 32GB 메모리 탑재 노트북 가격을 130~230달러(약 18만~33만원), 128GB 구성 모델은 최대 765달러(약 110만원)까지 끌어올린 상태다.
HP 역시 가격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엔리케 로레스(Enrique Lores) HP 최고경영자(CEO)는 "메모리 칩이 PC 원가의 15~18%를 차지한다"며 올해 하반기 추가 인상 가능성을 시사했다. 에이수스는 지난달 5일부터 이미 가격 조정을 단행했다. 조립식 노트북 스타트업 프레임워크의 경우 메모리에 이어 저장장치 가격까지 연이어 올리며 "향후 수년간 가격 압박이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삼성전자도 신제품 가격에 인상분을 반영했다. 오는 27일 출시 예정인 '갤럭시 북6 프로'의 경우 최상단 모델 기준 전작 가격이 280만원대로 나온 것과 비교해 신작은 351만원으로, 70만원가량 올랐다.
스마트폰·게임 콘솔도 줄인상
가격 상승 압력은 PC업계를 넘어 산업 전반으로 파급되고 있다. 미국 IT 전문 매체 더 버지는 올해 안에 500달러(약 71만원) 수준의 스마트폰이 600달러로 오를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스마트폰 제조원가의 15~20%를 메모리 비용이 차지하는 만큼, 부품 가격 상승이 곧바로 소비자 가격 인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이미 샤오미와 오포, 비보, 아너 등 중국 주요 스마트폰 업체들은 원가 상승을 견디지 못하고 신제품 가격을 잇따라 인상했다.
삼성전자 역시 갤럭시 S26 시리즈 가격 인상을 확정했다. 256GB 기본 모델은 전작 대비 9만9,000원, 512GB는 20만9,000원 올랐으며 최고 사양인 1TB 모델은 41만8,000원 상승했다. 세부적으로 256GB 기준 갤럭시 S26은 125만4,000원, 플러스는 145만2,000원, 울트라는 179만7,400원으로 책정됐고, 512GB는 울트라의 경우 출고가가 205만400원으로 최종 확정됐다. 최고 사양인 1TB 모델을 제외하면 512GB 모델 가격이 200만원을 넘어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현재 최고가는 S26 울트라 1TB 모델로 254만5,400원에 달한다.
게임업계도 직격탄을 맞았다. 닌텐도는 최근 D램 등 부품 조달에 어려움을 겪으며 '닌텐도 스위치2' 물량을 원하는 대로 시장에 공급하지 못하고 있고, 소니는 차세대 콘솔 '플레이스테이션(PS) 6' 출시 시점을 2027년∼2028년 이후로 늦춘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출시한 'PS5 프로' 출고가가 PS5 일반 버전 대비 크게 뛴 111만원에 책정돼 소비자들의 반발을 샀다는 점을 고려하면, 판매 부진을 우려한 조치로 풀이된다. 밸브 코퍼레이션도 가정용 게임 콘솔 출시를 연기하고 가격 전략 전체를 다시 짜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더 버지는 스마트 냉장고, 병원 신규 장비, 일부 농업용 트랙터에도 메모리가 들어간다"면서 "메모리를 품은 모든 것의 가격이 오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내년 스마트폰·노트북 시장 둔화 전망
전문가들은 이 같은 칩플레이션이 한동안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메모리 기업들이 증설에 나서고 있지만, 속도가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실정이다. 통상 팹 건설에는 수년이 걸리는데 기업들은 공급 과잉으로 손실을 볼 위험을 감수하며 서두를 동기가 없다. 업계 최고위급도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인텔 최고경영자(CEO) 립부 탄은 최근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2028년까지는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없다"고 밝혔다. 대만 낸드컨트롤러 전문 기업 파이슨일렉트로닉스 푸아케인승 CEO도 "낸드 공급 부족이 앞으로 10년간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공급 불균형을 심화시키는 변수도 등장했다. 미국 마이크론은 소비자용 메모리 브랜드 ‘크루셜(Crucial)’ 사업을 이달 부로 전면 종료하고, 기업·AI 고객 중심으로 사업을 재편했다. 소비자 시장에서 메모리 공급자 하나가 아예 사라진 것이다. 한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AI 기업들의 인프라 확충이 언제 정점을 찍을지, 메모리 수요가 언제 둔화 국면에 들어설지 가늠하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시장에서는 메모리 대란 여파로 내년 글로벌 스마트폰, 노트북 시장이 둔화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는 내년 스마트폰 생산량 증가율을 기존 0.1%에서 -2.0%로, PC 생산량 증가율은 1.7%에서 -2.4%로 각각 하향 조정했다. 메모리 가격 급등이 완제품 가격 인상으로 전이되면서 소비 수요 둔화를 유발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한 것이다. 트렌드포스는 올해 4분기 메모리 가격이 전년 동기 대비 75% 이상 상승할 경우 스마트폰 제조원가가 8~10% 오를 것으로 추산했다. 노트북 가격 역시 5~15% 상승 압력을 받을 것으로 내다봤다.
이에 애플 등 IT 완제품 업체는 D램·낸드 선매입에 나서는 한편, 저수익 제품 단종 등을 통해 수익성 방어에 집중하고 있다. 엔비디아와 AMD는 메모리 원가 비중이 높은 중저가 게임용 그래픽카드 단종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에이수스 등 대만 PC 제조사들은 제품당 메모리 탑재량을 조정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트렌드포스는 “기업들이 마진이 낮은 저가형 제품 생산을 축소하고, 전반적인 가격 인상 기조를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