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가스 비축량 42% 불과, “에너지 안보” 구호에도 조달은 더 좁아졌다
독일 가스 비축량 42% 불과, “에너지 안보” 구호에도 조달은 더 좁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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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 변수 무관 반복 가능성 커
산업계 불만→정책·시장 마찰
제조업 및 경기 전반 불안 확산

독일의 천연가스 저장 시설 비축량이 과거 공급 중단 사태에 이르렀던 수준보다 아래로 떨어졌다는 진단이 나왔다. 러시아산 가스 수입을 사실상 차단한 이후 조달 구조가 미국산 액화천연가스(LNG)에 크게 의존하는 방향으로 재편된 가운데, 기록적인 한파로 난방 수요가 증가하며 비축량이 빠르게 동난 것이다. 에너지 안보 강화를 내세운 정책 목표와 실제 조달 구조 사이의 간극이 드러나면서 독일 사회 전반의 에너지 수급 불안도 심화하는 모습이다. 이는 다시 정책과 시장 간 갈등으로 이어져 제조업을 비롯한 경기 전반의 불확실성을 키우는 형국이다.
“비축 의무 완화 부작용” 비판
28일(이하 현지시각) 독일 일간 아우크스부르크 알게마이네에 따르면 최근 독일 내 가스 저장시설 비축량은 42%까지 떨어져 2017년에서 2021년 사이 평균 비축량보다 20%p 이상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매체는 팀 켈러 독일 가스·수소 경제 연맹 회장의 말을 인용해 “최근의 비축량은 가스 공급 중단 사태에 이르렀던 지난 2022년 에너지 위기 당시보다 더 심각한 수준”이라고 짚으며 “정부가 비축 의무를 완화한 탓에 에너지 공급 안보에 비상등이 켜졌다”고 말했다.
앞서 독일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2022년을 기점으로 러시아산 파이프라인 가스 수입을 사실상 차단하면서 조달 구조를 급속히 재편했다. 이 과정에서 대체 수단으로 부상한 미국산 LNG 비중이 눈에 띄게 확대됐다. 독일 환경 지원 협회(DUH)에 의하면 지난해 독일의 미국산 LNG 수입량은 약 101테라와트시(TWh)로 독일이 소비하는 전체 LNG의 96%를 차지했다. 이는 전년 대비 60% 이상 증가한 수치로, 수입 비용도 19억 달러(약 2조7,000억원)에서 32억 달러(약 4조5,000억원)로 뛰었다.
미국에 집중된 조달 구조는 비축량 하락 국면에서 취약성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과거 러시아산 가스 중단 이전에는 파이프라인을 통한 연속 공급과 대규모 저장이 병행됐지만, 바닷길을 통하는 미국산 LNG 수입은 글로벌 에너지 시장과 물량 변동에 직접 노출된다. 겨울철 수요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미국발 LNG 도입 물량이 기대에 못 미치면, 저장고 방어 여력도 급격히 약화하는 구조다. 실제로 독일은 지난해 11월 난방 시즌 진입 시점에 저장률 75% 수준으로 출발했는데, 이는 전년 동기 98%와 비교해 23%p 낮은 수치다.
정책 목표로 제시됐던 ‘에너지 안보 강화’와 현실 사이의 괴리도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러시아 의존을 줄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공백을 다변화가 아닌 단일 국가 의존으로 대체하면서 공급 리스크의 성격만 달라졌다는 평가다. DUH는 “LNG는 이제 단기 위기에 대한 임시방편을 넘어 베를린의 새로운 에너지 기둥이 됐다”며 “독일은 예측하기 점점 더 어려운 미국에 거의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는 지금과 같은 조달 구조가 유지되는 상황에서는 언제든 유사한 형태의 위기가 반복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인프라 지원 방식 문제 제기
상황이 이렇다 보니 독일 내부의 반발은 갈수록 거세지는 모양새다. 민간 LNG 터미널 운영 업체 도이체레가스(Deutsche ReGas)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도이체레가스는 지난 16일 연방정부의 부유식 저장·재기화설비 터미널에 대해 최대 49억6,000만 유로(약 8조4,000억원) 규모의 국가 보조금을 승인한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결정을 문제 삼아 관할 법원에 소를 제기했다. 정부 주도의 대규모 재정 지원이 시장 경쟁을 왜곡하고, 결과적으로 가스 공급 안정성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판단에서다.
회사 측은 자사가 운영하는 인프라의 성격과 실적을 근거로 문제를 제기했다. 도이체레가스는 “우리는 북부 무크란의 ‘도이체 오스트제 에너지 터미널’과 루빈의 기존 LNG 터미널을 국가 보조금 없이 민간 자본만으로 건설·운영해 왔다”면서 “재작년 말부터 작년 초까지 난방 시즌을 기준으로 이들 터미널을 통해 독일 내 가장 많은 LNG가 공급됐고, 가구와 상업 고객의 약 15%가 이 시설을 통해 가스를 공급받았다”고 말했다. 이어 “국영 운영사에만 대규모 지원이 이뤄질 경우, 민간 터미널의 가동률 저하와 투자 회수 불확실성이 커질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정책과 시장 사이 마찰의 또 다른 축은 미국산 LNG 의존 심화가 외교·통상 변수로 직결된다는 점이다. 뉴욕타임스는 최근 보도에서 시장조사기관 브뤼겔을 인용해 “2019년 기준 EU 전체 LNG 수입량에서 미국산 비중은 약 5%에 불과했지만, 최근에는 4분의 1 이상으로 확대됐다”고 전하며 “이 같은 변화는 에너지 조달 문제가 단순한 시장 거래를 넘어 외교·안보 의제와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분석했다. 유럽의 미국산 에너지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영향력도 함께 커졌다는 의미다.
컬럼비아대 글로벌 에너지 정책 센터의 파리 주재 연구원 안느-소피 코르보 역시 “최근 들어 사람들이 우리가 미국산 LNG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고 면서 “유럽에는 사실상 대안이 거의 없다는 게 문제”라고 짚었다. 일각에선 LNG 수출 카드를 외교적 수단으로 활용하는 게 미국 에너지 산업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란 신중론 또한 제기되지만, 조달 구조 변화가 정책 자율성과 시장 기능을 동시에 압박할 가능성에 대한 유럽 내부의 우려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실정이다.
에너지 전환 비효율성이 사태 악화
에너지 불안의 파급력이 가장 먼저 미친 곳은 독일의 제조업이다. 독일 제조업은 이미 장기화한 경기침체 국면에서 에너지 비용과 공급 불안이라는 추가 변수를 맞았다. 독일은 2023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0.9%, 2024년 -0.5%를 기록한 데 이어 지난해에도 0.2% 성장에 사실상 정체 상태에 머물렀다. 이 기간 산업계는 경기침체의 주요 원인으로 높은 에너지 가격과 에너지전환 비용을 지목했다. 에너지 수급 불안이 생산 불확실성을 키우고, 종국에는 경쟁력 악화로 이어진다는 비판이다.
특히 화학·철강·자동차 등 에너지 집약 산업의 부담이 두드러진다. 이들 산업은 전력과 가스 사용 비중이 높아 가격 변동에 민감하다는 특징이 있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은 최근 보고서를 통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2022년 당시 LNG 가격은 유럽 지역에서 최대 10배, 아시아 지역에서는 8배까지 폭등했다”면서 “이러한 충격은 에너지 전환 과정의 비효율성에서 비롯됐다”고 분석했다. 탈원전·탈석탄 추진 과정에서 형성된 가스 중심의 전력 구조가 제조업 비용과 생산 안정성에 직접적인 부담으로 전이됐다는 설명이다.
이 같은 압박은 독일을 넘어 유럽 전반으로 확산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4년 가까이 이어지면서 가스와 석유 공급 차질이 지속되자, 일부 국가는 석탄으로의 회귀를 택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 조사에서 지난해 상반기 전 세계 석탄 소비는 전년 동기 대비 1.5% 증가했는데, 이 증가세를 EU가 견인한 것으로 파악됐다. 전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석탄화력발전소를 재가동한 폴란드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독일 역시 러시아 가스 수입 중단 이후 석탄 발전소 재가동에 나섰고, 북마케도니아와 세르비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등 발칸반도 국가들도 석탄 발전 확대나 폐쇄 연기 결정을 내렸다.
이와 함께 유럽은 미국산 LNG 의존을 낮추기 위한 장기적 대안도 모색하고 나섰다. 지난 26일 북해 정상회의에서 영국과 벨기에, 덴마크, 프랑스, 독일 등 10개국은 공동 경제수역에서 100기가와트(GW) 규모의 해상풍력 설비를 공동 개발하기로 뜻을 모았다. 문제는 현재 유럽 전역에서 운영 중인 해상풍력 설비가 약 37GW에 불과해 계획된 확장이 전력시장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 사이 제조업은 여전히 LNG와 가스발전에 의존하는 구도에 갇힐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