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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 한계 드러난 기업 다수, 자본시장과 동행에도 ‘빨간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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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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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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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소비 시장에서 경쟁국으로 거듭난 중국
미국 견제 속 공급망 개편·인재 영입 총력
韓 기업 신사업 줄줄이 위축, 투자은행 ‘한숨’

오랜 시간 우리 경제를 지탱해 왔던 기술 기업에 대한 자본시장의 시선에 미묘한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미국의 정권 교체와 중국의 급부상, 계엄 및 탄핵 사태에 따른 리더십 부재로 대내외적 불확실성이 커진 탓이다.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반도체마저 중국의 물량 공세에 휘청이자, 산업계에 자금을 조달하는 투자은행(IB)들의 고민도 깊어지는 모습이다. 시장에서는 신사업 확장을 위해 무리하게 자금을 끌어모은 일부 대기업도 머지않아 구조조정의 칼날을 피할 수 없을 것이란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글로벌 제조업 경쟁 승기 잡은 중국

9일 IB업계에 따르면 그간 한국 수출 기업들의 최대 고객사였던 중국은 어느새 순수출국으로 돌아서 우리 경제를 위협하고 있다. 반도체 부문은 중국산 저가 D램의 물량 공세로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으며, 석유화학 산업의 경우 이미 구조조정의 적기를 넘어서 헐값에 매각하는 방법 외에는 탈출 전략이 없다는 분석마저 나오는 실정이다. 한 증권사 연구원은 “우리 대기업들이 지난 20여 년간 글로벌 제조업 경쟁에서 두각을 드러냈던 근간이 기술력이나 혁신이 아니라 단순히 규모의 경제, 상대적으로 저렴한 인건비 때문이었음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고 진단했다.

중국의 추격에 맞서 발굴한 신사업 분야도 위기는 마찬가지다. 특히 정유·석유화학·철강사들이 사활을 걸고 투자했던 이차전지 산업은 미국 전기차 제조업체 테슬라가 흑자로 돌아선 2019년 당시부터 중국과의 기술 격차가 그리 크지 않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여기에 가격 경쟁력까지 앞세운 중국산 배터리는 꾸준히 시장 내 입지를 넓히고 있다. 그 결과 2020년 34.8% 수준이던 한국 배터리 3사(LG에너지솔루션·SK온·삼성SDI)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지난해 1~11월 기준 19.8%까지 쪼그라들었다.

중국이 한국의 막강한 경쟁국으로 부상했다는 사실은 한국은행의 보고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지난해 8월 발간한 ‘공급망 연계성을 고려한 대(對)중국 수출 평가와 시사점’ 보고서를 통해 한은은 “한국에 대한 중국의 최종수요 기여도는 2010년대 이전까지는 추세적으로 증가세가 확대됐으나, 그 뒤 완만히 하락하는 모습을 보였다”며 “동시에 생산구조 기여도는 2000년대 중반부터 하락세에 들어섰다”고 진단했다. 2000년대 중반 시작된 경쟁국으로서 중국의 추격이 소비시장 역할 축소와 맞물려 2010년대부터 가속했다는 의미다.

미·중 갈등으로 인한 글로벌 공급망 변화 또한 우리 경제에 부담이다. 중국은 차기 미 행정부의 고율 관세 예고에 맞서 중간재 자립도를 높이고 주요 생산기지를 동남아시아로 이전하는 등 공급망 변화를 서두르고 있다. 한은은 “미국이 중국에 고율 관세를 적용하고 유럽연합(EU)도 이에 동참할 경우, 한국의 대중 수출과 수출연계생산은 최소 6% 이상 감소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수출연계생산은 타국과의 생산 분업 과정을 고려해 수출에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간접적인 수출 활동을 포괄하는 지표로, 공급망 교란 시 우리 경제의 수출 의존도를 현실적으로 파악하는 데 활용된다.

기술 고도화 총력전

중국은 생산 시설을 외국으로 이전하는 대신 연구개발(R&D)을 비롯한 핵심 인력은 자국으로 끌어모으며 기술 고도화에 힘쓰고 있다.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세계의 공장’을 넘어 과학기술 선도국으로 자리매김하겠다는 목표다. 중국 국가자연과학재단(NSFC)은 지난해 1월부터 ‘젊은 국제 우수학자 인재 초청’ 프로그램을 출범하고 해외 인재 확보에 나섰다. 대학, 연구소 등에서 일정 기간 근무하는 조건이며, 해외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경우에는 우대 조건까지 제시했다.

프로그램에 선정된 이들은 대학교수 근무 기준으로 3년간 최대 20억원의 지원금을 받는다. 연구비 900만 위안(약 16억5,000만원)에 75만 위안(약 1억3,000만원)의 연봉이 책정됐다. 이밖에도 생활비 100만 위안(약 1억8,000만원)과 특별 보조금 150만 위안(약 2억8,000만원)도 받을 수 있다. 또 주거용 시설과 연구실도 제공하며, 기혼자의 배우자의 구직 활동 및 자녀 학교 입학 등을 지원한다.

해당 프로그램은 40대 미만(1984년 출생 이후) 젊은 인재를 타깃으로 했다는 점에서 그간의 인재 영입과 결을 달리한다. 과거 중국은 ‘천인계획(千人計劃)’이라는 슬로건 아래 해외에 진출한 자국 학자들을 다시 불러 모으는 데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국제사회가 천인계획에 대해 “산업 스파이를 양산하고 있다”는 비판을 쏟아내자, 외부 인재를 처음부터 포섭해 자국에 뿌리내리도록 하는 전략을 취한 것으로 분석된다.

학계에서는 중국의 막대한 자금을 기반으로 한 인재 유치 정책이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이공계 인재들의 진로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국내 한 과학기술원 교수는 “지금은 중국에 자리를 잡으려는 이가 많지 않지만,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는 자리가 많아지면 앞으로 중국행을 택하는 인력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중국의 과학기술 인재 유치 정책 자체를 경계하는 시선도 있다. 앞서 천인계획과 관련한 국제사회의 비판처럼 중국의 글로벌 인재 유치 계획은 기술 유출 문제를 지속적으로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2017년 중국의 천인계획에 선발된 카이스트 교수가 자동차 자율주행의 핵심기술인 라이다(LiDar) 관련 정보를 중국에 유출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 바 있다. 해당 교수는 지난해 2월 2심 재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구조조정 앞둔 韓 산업계, 투자 유치는 ‘언감생심’

국제사회의 비판과 우려 속에서도 인재 영입에 힘을 쏟은 중국의 노력은 기술 자립이라는 성과로 이어졌다. 김형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차세대반도체연구소장은 “4~5년 전부터 권위 있는 국제 반도체학회에서 중국 발표자들이 급증하고 있다”며 “이들의 특허나 논문 내용을 보면 중국 수준이 엄청나게 올라온 것을 절감한다”고 전했다. 이어 “단적으로 얘기하면, 메모리 반도체 빼고는 우리나라를 일부 추월하거나 거의 턱밑까지 추격한 상태”라고 덧붙였다.

중국의 추격 가시권에 놓인 우리 산업계에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쏟아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심지어 일각에선 산업 재편을 위한 구조조정마저 쉽지 않을 것이란 우려까지 나온다. 지난 2022년 이후 국내 대기업들은 인수합병(M&A) 시장에서 매물을 파는 입장만 고수해 왔는데, 이들 기업의 성장 한계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상황에 IB 업계의 호응을 이끌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지적이다. 한 사모펀드 운용사 관계자는 “그간 대형 운용사들은 대기업의 급한 문제를 해결해 주고 추후 알짜 사업을 받아 가는 식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지만, 더 이상 대기업들이 내어줄 수 있는 ‘콩고물’도 안 보이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실패를 목전에 둔 신사업들을 키우기 위해 그간 무분별하게 재무적투자자(FI)를 유치한 후폭풍도 머지않아 수면 위로 떠오를 전망이다. 특히 기업공개(IPO) 방식으로 회수를 약속한 투자 유치 건의 경우, 국내 증시에서의 자금 유출이 본격화한 만큼 성공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많게는 조(兆) 단위에 이르는 투자유치 건들이 우발채무의 형태로 기업의 발목을 잡게 될 것이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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