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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법, 여야 이견에 산자위 소위 문턱서 좌절 민주당, 노동계 반발 의식해 기존 당론으로 회귀 과기장관 "선진국 중 한국만 국가 R&D 근로 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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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득·고학력 근로자에 대해 주 52시간 근로제 적용을 제외하는, 이른바 '화이트칼라 이그젬션(White-Collar Exemption)'을 둘러싸고 정치권의 갈등이 격화되고 있다. 반도체특별법에 해당 예외 규정을 포함할지를 두고 여야가 이견을 좁히지 못하면서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법안소위원회 논의가 결론 없이 무산됐다. 더불어민주당은 주 52시간제 예외 적용이 장시간 근로를 조장할 수 있어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입장인 데 반해 국민의힘은 반도체 산업 경쟁력을 위해 유연한 제도 적용이 필요하다며 더불어민주당이 노동계의 반발을 의식해 입장을 바꿨다고 지적했다.
권성동 "민주당이 반도체 업계 요청 묵살해"
18일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국회에 열린 원내 대책회의에서 민주당이 반도체법에 주 52시간 근로제 예외 조항을 반대하는 데 대해 "육상선수 발목에 족쇄를 채워 놓고 열심히 뛰라고 응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비판했다. 전날 국회 산자위 법안소위에서 여야는 '반도체특별법 제정안'을 심사했지만, 민주당이 주 52시간제 예외 조항에 반대하며 처리가 무산됐다. 법안 통과가 무산된 직후 권 원내대표는 "경쟁국보다 더 많은 지원은 못 해줄 망정 방해는 하지 말아야 한다"며 "국내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절실한 요청을 묵살해 버렸다"고 주장했다.
국민의힘은 주 52시간제 예외 적용을 두고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한때 긍정적인 입장을 밝혔다가 철회한 것에 대해서도 공세를 펼쳤다. 권 원내대표는 "이재명 대표는 지난 3일 반도체법 토론회에 참석해 '몰아서 일하기가 왜 안 되느냐고 묻는데 할 말이 없었다'며 사실상 유연성 확보에 동의해 놓고 불과 2주 만에 입장을 바꿨다"고 지적했다. 최근 조기 대선을 겨냥한 이 대표의 우클릭·친기업 행보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권 원내대표는 "요즘 들어 성장을 외치는데 정작 성장하는 것은 이 대표의 거짓말 리스트뿐"이라고 말했다.
주 52시간제 예외 규정만 제외한 채 법안을 통과시키자는 야당의 주장에 대해 국민의힘은 "반도체법의 핵심은 집중 연구를 위한 근로시간 확보"라며 협의 가능성을 일축했다. 김상훈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획일적인 주 52시간제의 폐해가 드러났음에도 민주당은 강성 노조와 일부 의원의 반발에 밀려 반도체법 처리를 반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유상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도 "어느 선진국도 연구·개발(R&D) 인력에게 주 52시간제를 적용하지 않는다"며 "반도체뿐 아니라 어떤 연구자도 제한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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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다른 산업과의 형평성 등 고려해야"
여당의 공세에 이재명 대표도 맞대응했다. 이재명 대표는 18일 오전 자신의 SNS 계정을 통해 "주 52시간 근로제 예외 조항 없이 어떤 것도 합의할 수 없다는 무책임한 몽니로 국가의 미래가 걸린 산업 경쟁력이 발목 잡히고 말았다"며 "국민의힘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가"라고 일갈했다. 이어 "계엄으로 국가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반도체 산업이 망가지더라도 민주당이 하자는 것은 기어코 발목 잡아야겠다는 것인가"라며 "부디 더는 조건 붙이지 말고 합의 가능한 반도체법부터 우선 처리하자"고 촉구했다.
애초 민주당은 반도체법에 주 52시간제 예외 조항을 담기보다는 근로기준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 대표가 이달 3일 반도체법 토론회를 주재하면서 주 52시간제 예외 필요성을 언급한 뒤로 반도체법에 관련 조항을 추가하는 쪽으로 무게가 실렸다. 이를 두고 양대 노총 등 기존 지지층은 "노동 조건을 후퇴시키는 우클릭"이라며 거세게 반발했고, 당내에서도 이인영 의원 등이 "실용이 아니라 퇴행"이라며 비판했다. 결국 민주당은 최종 예외 조항을 신설하지 않는 방향으로 입장을 정리하며 기존 당론으로 회귀했다.
특히 민주당은 반도체법상 주 52시간제 예외 조항을 신설할 경우, 다른 산업 분야에서도 예외 적용 요구가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민주당의 산자위 핵심 관계자는 "노동시간 연장 문제는 당사자 간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에 일방 처리가 불가능하다"며 "충분한 소통을 통해 타협하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전했다. 진성준 민주당 정책위의장도 "근로기준법상 탄력근로제나 재량근로제로도 충분히 주 52시간제 예외 효과를 낼 수 있는 만큼 노동시간 추가 연장에 동의하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R&D 몰입 높여 노동생산성 제고에 초점 둬야
여야의 남 탓 공방 속에 반도체 업계는 법안 처리의 시급성을 강조했다. 국내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미국 등 선진국과 추격자인 중국 사이에 끼인 한국 반도체 산업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R&D에 집중해야 한다"며 "현행 주 52시간제가 혁신 기술 개발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 등 선진국처럼 R&D 연구자에 대해서는 근무시간 제한에 얽매이지 않고 유연하게 일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산업 현장에서 일하는 실무 엔지니어들도 큰 테두리에서 주 52시간제 예외 적용의 취지에는 공감하는 분위기다.
한편 반도체 업계의 주 52시간제 예외 적용 논의를 계기로 다른 산업계에서도 근로기준법 개정 요구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17일 중소기업중앙회와 벤처기업협회는 민주당 중소기업특별위원회 출범식에 참석해 주 52시간제 예외 조항을 공식 요구했다. 중기중앙회는 "수출 기업 56%, 중소 제조기업의 28.3%가 주 52시간제로 인해 수주, 납기 준수, 생산성 등 문제를 겪고 있다"며 "기업 상황에 맞게 노사 자율로 근로시간을 탄력적으로 조정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건의했다. 벤처기업협회도 "R&D 등 핵심 인력에 대해 계약 자유의 원칙을 적용해 근로시간 제한을 완화하는 대신 보상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무작정 근로시간만 늘린다고 능사가 아니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R&D 업무의 특성상 '몰입'이 중요한데 최근 MZ세대 근로자의 등장으로 산업 현장의 업무 마인드가 '목표 지향적'에서 '시간 지향적'으로 변화하면서 충분한 몰입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제도의 취지에 대해서도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화이트칼라 이그젬션'는 장시간 근로를 장려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가 아니다. 오히려 고연봉 관리·전문직은 근로시간이 아니라 일의 성과가 중요하다는 전제에서 도입되는 만큼 2차 산업 중심의 시간급제를 탈피해 노동생산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데 초점을 둬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