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수정
M&A 시장 급팽창, 경영환경 비관적 전망 주요 수출시장 미국 정책 불확실성↑ 한국 경제 저성장 고착화 우려 짙어져

한국 대기업들이 비핵심 사업 매각을 비롯한 구조조정에 속도를 내고 있다는 외신의 보도가 나왔다. 중국과의 경쟁 심화 및 미국의 무역 장벽에 직면한 여러 기업이 앞다퉈 사업 간소화와 현금 유동성 확보에 나섰다는 진단이다. 이는 구조조정 및 신산업 발굴 없이는 저성장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란 한국은행의 분석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한은은 올해 국내 경제성장률 전망치로 1.5%를 제시한 바 있다.
성장 전략에서 방어 전략으로
4일(현지시각)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금융시장 플랫폼 딜로직 자료를 인용해 한국의 지난해 인수·합병(M&A) 거래가 930건으로 전년(817건)보다 13.8% 증가했고, 규모 또한 같은 기간 34.4% 증가한 683억 달러(약 99조5,000억원)를 기록했다고 전했다. 이 같은 M&A 증가세는 한국 경제 악화에 대응하는 기업들의 방어적 전략에서 비롯됐다는 게 FT의 분석이다.
그러면서 매체는 SK그룹과 포스코의 사례를 들었다. SK그룹은 지난해 1월부터 9월까지 716개에 달하던 사업 부문을 660개로 8% 축소했고, 포스코 또한 성장 가능성이 큰 분야에 투자를 집중한다는 명목으로 수익성이 비교적 낮은 비핵심 사업 45개를 매각했다. 국제 로펌 로프스앤그레이는 “한국의 대대적인 구조조정과 M&A는 주로 방어적 사고방식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며 “이는 많은 기업이 향후 경제를 비관적으로 내다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기업의 불안을 가중하는 요소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자국 우선주의 무역 정책이 꼽힌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월 취임 직후 철강과 알루미늄 수입품에 2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공언한 데 이어 한국의 주요 수출품인 자동차와 반도체에 대한 관세를 암시했다. 또 전기차 구매에 대한 보조금을 철회하는 등 친환경 관련 규제를 폐지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여기에 중국의 기술적 추격 또한 매서운 상황이다.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와 푸젠진화(JHICC) 등 반도체 업체들과 딥시크(Deepseek)를 필두로 한 인공지능 스타트업의 급부상에 국내 업체들의 위기의식이 짙어진 것이다. 한국산업연구원에 따르면 2023년 한국 기술 그룹은 연구개발(R&D) 지출에서 중국 그룹보다 1,500억 달러 이상 뒤처졌는데, 이는 10년 전 90억 달러 격차에서 크게 증가한 수치다.
FT는 지난해 4월에도 한국경제의 성장모델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진단을 내놓은 전례가 있다. 당시 FT는 한국은행이 발간한 ‘한국경제 80년 및 미래 성장 전략’ 보고서를 인용해 한국 경제성장률이 1970년대 연평균 8.7%, 1980년대에는 9.5%로 높은 성장률을 보였지만, 2020년대 2.1%, 2030년대 0.6%로 크게 꺾이고 2040년대에는 –0.1%의 성장률을 기록하며 초저성장에 진입할 것으로 내다봤다.
과거 값싼 에너지와 노동력에 의존한 한국의 국가주도 성장모델이 더는 주효하지 않다는 게 FT의 진단이다. 매체는 “한국 제조업체에 막대한 산업 관세 보조금을 제공하는 한국전력은 1,500억 달러에 달하는 부채에 시름하고 있으며, 노동 생산성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운데 5번째로 낮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제조업과 대기업에 집중 투자하는 과거의 성장 모델을 답습하는 한 혁신 둔화는 앞당겨질 것”이라고 부연했다.

“기존 산업 의존도↑, 경제성장 둔화는 당연한 일”
한국은행 또한 비슷한 예측을 내놨다. 한은은 최근 올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를 1년 전 전망인 2.3%에서 1.5%로 내려 잡았다. 저성장이 고착하는 것이 아니냐는 시장의 우려에 이창용 한은 총재는 “그게 신산업도 구조조정도 없는 우리 경제의 실력”이라고 잘라 말했다. 우리 경제의 기초체력과 성장동력이 그만큼 허약해졌다는 의미다.
이 총재는 “과거 고도성장에 익숙해져 1%대 성장이 위기라는 인식이 팽배하다”고 꼬집으며 “우리는 오랜 시간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산업을 찾지 않고 구조조정 없이 기존 산업에만 의존해 왔다”고 말했다. 작금의 상황에서 잠재성장률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재정을 동원하고 금리를 낮춰야 하는데, 이 경우 가계부채 증가 등 나라 살림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나아가 더 높은 성장을 위해서는 단기적으로 어렵더라도 구조조정이 필수라고 조언했다. 이 총재는 “과거에는 수출 중심 경제가 유효했지만, 최근에는 수출 경쟁력이 많이 낮아져 낙수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며 “새로운 산업 없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2022년 4월 취임 이후 줄곧 구조 개혁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한 국가의 경제성장률은 금리나 통화 정책만으로 끌어올릴 수 없다는 게 이 총재의 일관된 시각이다.
0%대 경제성장률 가시화
이런 가운데 우리 경제가 산업 구조조정에 실패할 경우, 성장률이 0%대로 주저앉을 수 있다는 경고까지 나오면서 비관적 전망에 힘을 보탰다. 전현배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는 지난달 7일 경제학 공동학술대회에 참석해 “생산성 성장률이 1% 미만으로 부진하면, 2050년에는 0%대 경제성장률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전 교수는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연구 결과를 인용했다. KDI에 의하면 국내 경제 성장률은 2031~2040년 1.3%로 하락할 전망이다. 이 시기 노동 투입의 성장 기여도는 -0.3%로 마이너스 전환한다. 이후 2041~2050년에는 노동 투입 기여도가 –0.7%로 추가 하락하고, 경제성장률은 0.7%로 추락하게 된다. 결국 경제성장률은 생산성 성장률에 의존하는 셈이다.
일각에서 서비스업 중심의 산업 구조 재편이 시급하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간 설비 증설에 치중하느라 고부가가치 소재로 전환할 시기를 놓친 만큼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과제를 최우선에 둬야 한다는 까닭에서다. 한국경제학회장을 역임한 바 있는 김경수 성균관대 교수는 “고용 없는 성장은 생산성 하락으로 이어지는 만큼 경제 체질 개선을 위해서는 고용 유연성 확대가 필수”며 “제조업에서 밀려나는 노동력을 흡수할 양질의 서비스업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