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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주둔 미군 감축 질문에 방위비와 연계 시사 지난해 체결한 분담금 특별협정 재논의 가능성도 EU는 美 없는 안보 대비, 日은 방위비 증액 추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주한미군 등 해외 미군 감축 문제가 방위비 분담금과 연계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그는 한덕수 국무총리 대통령 권한대행과의 통화 직후에도 '원스톱 쇼핑'이란 표현을 사용해 방위비 부담과 관세 문제를 함께 논의하겠다는 뜻을 내비친 바 있다. 백악관 역시 미군 주둔 비용과 방위비 부담 등이 관세 협상의 일부가 될 수 있다고 밝힘에 따라 최근 개시된 한미 간 무역 협상이 관세를 비롯해 외교·안보 이슈까지 포괄하는 '피키지 딜'로 확대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트럼프 "무역 협상에 외교·안보 이슈 포괄"
9일(현지 시각)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 집무실에서 진행한 행정명령 서명식에서 '유럽이나 해외에 있는 미군을 감축할 계획이 있냐'는 질문에 "상황에 따라 다르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유럽에 주둔한 군의 경우 많이 보전받지는 못한다"며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이어 "이러한 상황이 무역과 관계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이 문제를 협상의 일부로 다룰 것"이라며 "각국에 대한 협상에서 관련된 문제를 한 개의 패키지로 다 담는 것이 합리적이고 깔끔하기 때문"이라고 부연했다.
캐롤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도 8일 브리핑에서 '무역 협상에 다른 의제가 포함될 수 있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트럼프 대통령은 맞춤형 접근 방식을 취할 것"이라며 "해외 원조, 미군 주둔과 그 비용 등이 협상의 일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은 전임 조 바이든 대통령 퇴임 직전 새 방위비 분담금 특별협정(SMA)을 체결해 2026~2030년 분담금 규모가 이미 확정된 상태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에서 한국을 '머니 머신'이라 표현하며 방위비 대폭 인상을 주장해 왔다.
상호 관세 발표 직후 백악관이 한국을 호명하며 "무역 협상 시 한미 동맹을 우선시할 것"이라고 했지만, 이날 트럼프 대통령의 언급대로 관세에 더해 외교·안보 이슈까지 포괄해 협상이 진행될 경우, 판이 더 커지면서 협상 시간이 추가로 소요될 가능성이 크다. 다만 현재까지 한미 간 통상 당국 협의 때 관세를 방위비 등과 연계하려는 움직임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더욱이 현재 국내 정세를 고려할 때 대미 협상의 키를 쥐고 있는 한 총리가 자신의 잔여 임기 중에 이를 매듭지을 것인지도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EU, 전략적 의존성 줄이기 위해 방위비 증액
미국의 방위비 압박에 유럽은 이미 대응책 마련에 나섰다. 유럽연합(EU) 27개국 정상들은 지난 6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특별 정상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유럽 안보와 방위에 대한 지출을 계속해서 막대하게 증가시켜야 한다"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채택했다. 정상들은 성명에서 "전략적 의존성을 줄이며 회원국 간 중요한 역량 격차를 해소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략적 의존성을 줄이자는 내용은 현재 역내 안보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겠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이를 위해 정상들은 EU 행정부 격인 집행위원회에 각 회원국 차원에서 국방비를 대폭 증액할 수 있도록 추가적인 조처를 마련하라고 주문했다. 앞서 EU 집행위는 지난 4일 27개 회원국 정상에게 '유럽 재무장 계획'을 제안한 바 있다. 해당 계획에는 개별 회원국의 국방 부문 투자를 늘리기 위해 EU 재정준칙 적용을 유예하는 내용이 담겼다. 또 EU 예산 여유분 1,500억 유로(약 234조원)를 담보로 회원국에 방공체계·미사일·드론 등 각종 무기의 공동 조달을 위한 저금리 대출금을 지원하기로 했다.
다만, 이번 공동성명에서 우크라이나 지원 확대를 담는 데는 실패했다. 친러 성향의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총리의 이탈에 26개국만이 "우크라이나에 강화된 지원을 제공하고 러시아 압박을 확대할 것"이란 입장을 별첨 문서 형태로 발표했다. 이와 별개로 군비 증강을 주도하는 영국과 프랑스는 우크라이나 평화계획과 전후 안보 보장 논의에 속도를 내고 있다. BBC에 따르면 양국은 우크라이나 종전 후 평화 유지를 보장할 국가 연합체 '의지의 연합'에 관심을 표명한 20여 개국과 실무 논의를 진행 중이다.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는 미국과의 동맹 관계를 유지하는 데도 공을 들이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양국이 우크라이나와 함께 자체적인 종전 계획을 세워 조만간 미국에 제시할 방침이라고 전했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자국의 방산업체를 방문한 자리에서 "우크라이나 안보 계획은 미국과 협력해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러시아에 대해서는 강경한 입장을 유지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정상회의 이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제국주의자라고 비판하며 "역사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日, 방위력 강화 위해 GDP 2%까지 늘리기로
옆나라 일본도 미국의 방위비 압박에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지난 2월 7일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진행된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 "일본은 2027년까지 나의 첫 번째 임기와 비교해 방위비를 두 배로 늘리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날 공개된 미·일 정상 공동성명에는 "일본은 방위비 증가라는 긍정적인 흐름을 토대로 2027년까지 자국 방어의 주요한 책임을 강화하기 위한 능력을 구축하고 나아가 2027년 이후에도 방위력 강화에 힘쓰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일본의 올해 방위비는 역대 최대 규모인 8조6,691억엔(약 82조5,800억원)으로 국내총생산(GDP)의 1.6% 수준이다. 이는 기시다 후미오 총리 집권 시절이던 2022년 3대 안보 문서 개정에 따른 결과로, 당시 GDP의 1% 수준이던 방위비를 2027년 2% 수준까지 늘리고 총 43조엔(약 418조원)의 방위비를 확보하기로 했다. 트럼프 집권 1기 시절에는 GDP의 1% 수준의 방위비만 지출했던 일본이 '보통국가화'를 지향하는 내부 흐름과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 속에 방위비 증액에 속도를 더하는 모양새다.
하지만 방위비를 GDP의 3% 수준으로 올리는 것에는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다. 지난달 5일 엘브리지 콜비 미 국방부 정책차관 후보자가 일본이 방위비를 GDP 대비 3%로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에 대해 이시바 총리는 “일본의 방위비는 일본이 결정한다”며 반박했다. 트럼프 1기 국방부 부차관보를 지낸 콜비 후보자는 당시 대중국 강경노선의 국방전략을 주도한 인물로 동맹국 스스로 방위 능력을 강화해 역할 분담을 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그는 지난 9일 미 상원에서 인준안이 가결돼 금명간 정책차관으로 공식 취임할 예정이다.
콜비 지명자는 그간 '주한미군은 중국으로부터 한국을 방어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며 '최후의 선택지로 한일 간 우호적 핵확산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북핵 위협과 같은 한반도의 안보 문제는 한국이 책임져야 한다는 계산이다. 일각에서는 미국이 북한 방어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은 미군이 북핵 억제를 위해 전략폭격기, 핵항공모함 등 전략 자산을 한반도에 전개하는 비용을 한국이 지불해야 한다는 의도라는 해석이 나온다. 이 경우 한국은 예상보다 훨씬 높은 '북핵 억제 비용' 청구서를 받아 들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