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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 늘어도 소비는 감소, 자동차·의류·주류 지출 '뚝' 물가 반영한 실질 소비지출도 7분기 만에 마이너스 전환 고물가·고금리 속 지갑 닫은 가계, 경기 침체 우려 여전

1분기 가계 소득이 증가했음에도 소비지출은 오히려 줄어들며 ‘불황형 흑자’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특히 자동차, 의류, 주류·담배 등 선택 소비 항목에서 지출이 크게 감소했고, 물가 상승을 반영한 실질 소비지출은 7분기 만에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고물가와 고금리, 고환율 등 복합적인 경제 불안 요인이 지출을 위축시키며 소비심리 회복에도 제동이 걸린 모습이다.
월평균 가구 소득 4.5%↑, 근로소득 3.7%↑
29일 통계청이 발표한 '1분기 가계동향조사에 따르면 전국 1인 이상 일반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535만1,000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4.5% 증가했다. 소득 구성 항목별로는 근로소득이 전년 대비 3.7%, 사업소득이 3.0%, 이전소득이 7.5% 증가했다. 근로소득은 임금근로자 수 증가(+20만6,000명)와 1~2월 명목임금 상승률(+5.1%) 등의 영향으로 늘었다. 사업소득 역시 소매판매액지수 증가(+1.7%)에 힘입어 상승했고 이전소득은 국민연금 인상과 육아휴직급여 확대 등의 제도 개선 효과가 반영됐다. 공적이전소득은 전년 대비 9.9% 증가해 2023년 4분기 이후 가장 큰 폭의 증가율을 기록했다.
1분기 가구당 월평균 소비지출은 295만원으로 전년보 동기 대비 1.4% 증가했다. 소비지출 내역을 항목별로 보면 생존 필수 지출인 주거·수도·광열이 5.8%로 가장 크게 늘었고 음식·숙박(2.1%), 식료품·비주류음료(2.6%) 등이 증가했다. 그러나 △자동차 구입(-12.0%) △의류·신발(-4.7%) △주류·담배(-4.3%) 등 준내구재 성격의 항목에서 소비가 뚜렷이 줄었다. 교육 지출도 0.1% 감소했으며 학원·보습교육은 0.7% 감소했다.
물가 상승률(2.1%)을 고려한 실질소득은 2.3% 증가해 지난해 2분기 이후 4개 분기 연속 상승세를 이어갔다. 총소득 대비 이자·세금 등 비소비지출을 제외한 처분가능소득은 4.5% 증가했고 흑자액도 12.3% 늘었다. 흑자액은 소득에서 비소비지출과 의식주 비용 등 소비지출을 뺀 금액이다. 반면 물가를 감안한 실질 소비지출도 0.7% 감소했다. 7분기 만에 마이너스 전환이다. 명목 지출이 소폭 늘어난 데 반해 물가 상승률이 이를 상회하면서 체감 소비는 오히려 위축됐다.
처분가능소득에서 소비지출을 뺀 흑자액은 127만9,000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2.3% 증가했다. 이에 대해 통계청 관계자는 "이른바 '불황형 흑자'인지 단정하긴 어렵다"면서도 "준내구재 소비 위축이 평균소비성향 하락을 유도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갑을 닫았다기보다는 소비가 늘어난 품목들이 물가 상승으로 인해서 명목상 증가한 게 많다"며 "다만 소비자심리지수도 100을 넘지 못하고 있어 경기 불안 심리가 지출 억제에 일정 부분 작용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국민 과반이 소비지출 줄여, 고물가 등 영향
실제로 지난해 말부터 국내외 불확실성의 증가로 경제 침체가 이어지는 가운데, 국민 절반 이상이 소비지출을 축소할 계획이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지난해 12월 한국경제인협회가 조사한 '2025년 국민 소비지출계획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53%가 내년 소비지출을 줄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내년 가계 소비지출은 올해와 비교해 평균 1.6% 감소할 것으로 전망됐다. 소득 분위별로는 하위 60%인 소득 1~3분위의 내년 소비가 올해에 비해 감소한 반면, 상위 40%인 4~5분위는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나 소득별 소비 양극화 현상을 보였다.
응답자들은 내년 소비지출을 줄이는 이유로 '고물가 지속'(44.0%)을 가장 많이 선택했다. '소득감소‧실직 우려'(15.5%), '세금 및 공과금 부담 증가'(8.5%) 등이 뒤를 이었다. 소비 감소가 예상되는 품목으로는 '여행·외식·숙박'(17.6%)이 가장 많았고, '여가·문화생활'(15.2%), '의류‧신발'(14.9%) 순으로 이어졌다.
내년 소비 활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리스크 요인으로는 '고환율·고물가 지속'(43.2%), '세금 및 공과금 부담 증가'(16.4%), '자산시장(부동산 등) 위축'(12.7%) 등이 지적됐다. 가계 형편이 악화될 것이라는 응답도 42.2%를 기록해 '나아질 것'(12.2%)이라는 응답보다 3배가 넘는 차이를 보였다.
응답자 중 75.7%는 소비가 다시 활성화되는 시점을 2026년 이후로 내다봤고, '기약 없음'도 35.1%에 달했다. 소비환경 개선을 위한 정책과제로는 △물가·환율 안정(42.1%) △세금 ·공과금 부담 완화(20.1%) △ 금리 조절(11.3%) 등이 언급됐다. 한경협은 "소득이 낮을수록 고물가와 경기 침체에 따른 영향에 민간한 만큼 소득수준에 반비례해 소비지출 감소 폭이 커지는 경향이 있다"며 "성장률 전망이 하향 조정되는 등 경기 침체가 장기화될 것으로 우려됨에 따라 국민들이 생활에 꼭 필요한 지출 이외에는 좀처럼 지갑을 열기 어려울 것"이라고 진단했다.
소비 트렌드 변화에 술·담배 소비도 줄어
불황이 장기화하면서 소비 트렌드에도 뚜렷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소비자들은 가성비를 중심하는 실속형 소비로 전환했고 과시적 소비는 줄고 합리적이고 절약지향적인 안티 플렉스 트렌드가 부상했다. 여기에 재택형 소비가 늘고 외출형 소비는 줄어드는 현상이 올해도 이어지고 있다. 이는 2008년 금융위기,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당시와 유사한 패턴이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비용을 아끼는 차원을 넘어, 자신의 삶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가치와 효용을 우선시하는 방향으로 소비 패턴이 변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아사히그룹홀딩스의 가츠키 아츠시 최고경영자(CEO)는 파이낸셜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주류·담배 소비가 줄어든 원인은 음주나 흡연의 해로움에 대한 우려보다는 디지털 엔터테인먼트 플랫폼의 부상이 제품 수요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쳤다고 밝혔다. 그는 “예전에는 알코올이 사람들의 오락과 즐거움에서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며 “지난 10년 동안 게임을 포함한 즐길 거리들이 늘어났고, 그로 인해 술이 차지하던 ‘재미와 즐거움, 행복’의 비중이 줄어들었다고 본다”고 말했다.
실제로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기준으로 술·담배를 찾는 사람이 8분기 연속 감소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주류·담배의 소비지출은 전년 동기 대비 4.3% 감소하며 2020년 4분기(-5.6%) 이후 가장 큰 폭으로 줄었다. 세부적으로는 담배 -4.4%, 주류 -4.1%로 집계됐다. 과거에는 경기 침체기마다 스트레스 해소 수단으로 술과 담배 소비가 오히려 늘어나는 경향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이러한 전통적인 흐름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점이 확인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