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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혹한 관세” 언급하며 무역 압박
최근 3년 러시아산 원유 ‘폭풍 쇼핑’
협상력 잃은 인도, 관세 폭탄 위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러시아산 원유 구매를 늘려 온 인도를 향해 관세 인상을 경고하면서 양국 간 통상 갈등에 불을 붙였다. 앞서 미국이 예고한 최고 26%의 세율에서 추가적인 인상 가능성까지 제기되면서 인도 내에선 수출 경쟁력 저하 및 외환시장 불안 등 각종 우려가 줄을 잇고 있다. 90일의 관세 유예 기간이 불과 사흘 남은 가운데 여론전 또한 인도에 불리하게 전개되는 등 글로벌 무역 질서 속 인도의 입지 역시 크게 흔들리는 모습이다.
압박 수위 높이는 美, 보호무역주의 회귀 신호
트럼프 대통령은 4일(이하 현지시각) 자신의 소셜미디어(SNS) 트루스 소셜에 올린 게시물에서 “인도가 엄청난 양의 러시아산 석유를 사들여 큰 이익을 붙여 되팔았다”고 지적하며 “이런 이유로 나는 인도가 미국에 지불하는 관세를 인상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인도는 미국에 많은 물건을 팔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거의 아무것도 팔지 못한다”고도 덧붙였다. 러시아와 거래하는 인도에 대한 제재 의지와 무역 불균형에 대한 불만을 동시에 드러낸 발언으로 해석된다.
인도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인상 방침은 직접 발언에서도 반복됐다. 같은 날 트럼프 대통령은 펜실베이니아주 앨런타운 공항에서 취재진과 만나 인도가 러시아와의 원유 거래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다고 비판하며 더는 이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강조했다. 그는 “러시아와 에너지 거래를 계속하는 국가들은 더 이상 미국의 우방일 수 없다”면서 “(이들 국가에 대한) 추가적인 무역 제재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 사안을 경제 이슈를 넘어 지정학적 문제로 접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트럼프 대통령은 1기 집권 시절에도 인도산 제품에 대해 무역 제재를 가한 바 있다. 2018년 미국은 인도산 철강과 알루미늄 제품에 각각 25%, 10%의 고율 관세를 부과했고, 이듬해에는 인도를 일반특혜관세(GSP) 프로그램 대상국에서 제외했다. 당시 미국 무역대표부는 인도가 미국 기업에 공정하고 합리적인 시장 접근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이후 양국 간 협상은 수차례 재개와 중단을 반복했으며, 조 바이든 행정부에 들어서야 관계 복원이 일부 이뤄졌다.
하지만 이번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으로 다시 인도에 대한 압박이 본격화할 전망이다. 이에 대해 란디르 자이스왈 인도 외무부 대변인은 엑스(X·옛 트위터)를 통한 성명에서 “인도를 표적으로 삼는 것은 정당하지 않으며 불합리하다”며 “우리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인도로 오던) 기존 공급 물량이 대폭 줄어들면서 러시아에서 석유 수입을 늘릴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자이스왈 대변인은 “우리는 다른 주요 경제국과 마찬가지로 국익과 경제안보를 지키기 위해 모든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러시아 원유 수출 경로 전환에 제재 무력화
인도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대폭 확대해 왔다. 미 에너지 전문 매체 오일프라이스에 의하면 인도가 2023년 1월 1일부터 올해 7월 17일까지 러시아로부터 사들인 원유는 약 1,600억 달러(약 222조원) 규모로 중국(약 2,200억 달러·305조원)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수준을 나타냈다. 서방 제재로 러시아가 기존 수출 시장을 상실한 가운데, 인도와 중국이 주요 대체 시장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인도는 러시아산 원유를 할인된 가격에 구매함으로써 에너지 비용을 낮추는 데 그치지 않고 정제 후 제삼국에 수출하는 방식으로 추가 이익을 얻는 구조를 만들었다. 고질적으로 반복되는 에너지 위기를 벗어나려는 시도가 주효했다. 인도는 ‘국익 우선’ 원칙을 앞세워 “시장에서 가장 저렴한 원유를 구매하는 것이 국가 경제에 부합한다”는 입장을 고수했고, 국제사회의 대러 제재 영향권 밖에 있었던 덕에 이 같은 전략은 유의미한 성과로 이어졌다.
미국은 이러한 인도의 시도가 서방 제재의 실효성을 훼손한다고 봤다. 인도 외교 당국은 “우리는 국제법을 준수하고 있으며, 제재 대상 기업과는 거래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거듭 밝히고 있지만, 인도가 러시아산 원유의 원산지 위장을 방조하거나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게 미국 정부의 지적이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이 인도를 지목하며 관세 인상을 시사한 것도 이러한 시각의 연장선인 셈이다.
미국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한 인도는 러시아 원유 의존도를 줄이고 공급선을 다변화한다는 입장이다. 인도 석유부 관계자는 “중동, 아프리카, 북미 지역의 원유 수입 비중을 다시 높이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면서 “걸프만 산유국과의 장기계약을 늘리는 방향으로 전환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여전히 러시아산 원유가 가격 경쟁력 면에서 우위에 있는 데다, 인도의 원유 수입 구조 자체가 러시아 중심으로 고착한 만큼 단기간 내 공급선의 완전한 전환은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대미 수출 의존도 높은 만큼 리스크도 커
이런 가운데 대외 여론의 향배 또한 인도에 불리하게 전개되는 양상이다. 러시아와의 원류 거래를 중단하라는 메시지가 주요 외교 채널에서 반복됨에도 인도가 명확한 입장 변화 없이 모호한 태도로 일관한 탓이다. 이 같은 대응은 “경제적 기회주의”라는 국제사회의 비판을 키우는 계기가 됐고, 뉴욕타임스는 이를 두고 “정치적 중립을 가장한 무책임한 태도”라고 강도 높게 비판하기도 했다. 에너지 안보를 이유로 든 인도의 논리가 여론 전장에서 아무런 설득력을 얻지 못한 셈이다.
결과적으로 인도가 러시아산 원유를 통해 얻은 실익이 다시 무역 보복으로 되돌아올 가능성도 커지는 형국이다. 지난해 기준 인도의 대미 수출은 약 873억 달러로 수입(415억 달러) 규모의 두 배를 훨씬 웃돌았으며, 전체 수출 중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 또한 18%가량으로 압도적이다. 여기에 주요 수출 품목이 보석류, 의류, 농산물 등 고부가가치 소비재에 집중돼 있어 고율 관세가 현실화할 경우, 환율과 외환보유액 등 인도 경제 전반에 걸친 충격이 불가피한 실정이다.
이에 즉각적인 피해를 예상한 인도 산업계에서는 자국 정부에 수출다변화 정책을 긴급히 요청하고 나섰지만, 새로운 시장을 단기간에 확보하기 어려운 만큼 뚜렷한 충격 회피 전략은 나오지 않은 상황이다. 앞서 미국은 지난 4월 인도에 최대 26%의 관세를 부과하며 90일의 유예 기간을 뒀다. 남은 시한이 사흘에 불과한 만큼 인도 정부는 이렇다 할 협상력이나 여론전에서의 우위도 확보하지 못한 채 미국과의 논의를 피할 수 없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