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행 총재 “고용 긴축” 진단에도 ‘임금 정체·낮은 생산성’에 금리 정상화 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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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 상승 전망에 금리 인상 기대↑
물가 상승세가 임금 증가분 앞질러
구조 개혁 없는 금리 정상화 난항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가 고용 시장 긴축으로 임금 상승이 가속할 것이란 낙관적 전망을 내놨다. 이를 두고 시장에선 이른 시일 내 금리 인상 가능성을 점치는 분위기다. 다만 장기간 이어진 일본 경제의 저성장과 초저금리 기조 속에서 물가만 오르고 임금이 따라가지 못하는 구조적 문제가 뚜렷한 만큼 생산성 개선과 같은 과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금리 인상을 속단할 수 없다는 평가 또한 나온다.
금리 인상 사이클 재개 가능성 ‘솔솔’
25일 외신에 따르면 우에다 총재는 지난 23일 미국 와이오밍주 잭슨홀에서 열린 미국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Fed) 연례 심포지엄에 참석해 “(일본 내) 임금 상승 흐름이 대기업에서 중소기업으로 확산되고 있다”며 “향후 큰 수요 충격이 없는 한 노동 시장은 타이트한 상태를 유지하고, 임금 상승 압력을 계속 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두고 시장에서는 미국의 관세 등 외부 요인이 일본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우려로 중단된 금리 인상 사이클이 재개될 것란 기대의 목소리가 주를 이룬다.
이 같은 신호는 일본이 직면한 ‘잃어버린 30년’의 장기 저성장을 고려할 때 더욱 주목된다. 1990년대 버블 붕괴 이후 경제 침체가 고착하면서 일본은행은 금리 인상을 단행하기 어려운 구조에 놓여 있었다. 장기간 이어진 저성장과 인플레이션 목표 미달은 초저금리와 양적완화를 상시적 통화정책처럼 굳게 만들었다. 그러나 최근 물가가 목표치인 2%를 상회하고, 고용시장이 긴축 흐름을 보이면서 금리 정책을 정상화해야 한다는 압박이 커지는 모습이다. 노동시장 내 공급 부족과 임금 협상 강세는 물가 상승을 뒷받침할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만큼 금리 정책 전환의 기회가 될 것이란 분석이다.
시장에선 일본은행의 정책 전환이 일본 경제 회복의 전환점이 될 수 있을지 주목하는 모양새다. 경기 회복세를 이어가기 위해선 물가와 임금의 선순환 구조가 뒷받침돼야 하는데, 이를 전제로 해야만 금리 정상화 또한 가능해진다. 만약 임금 상승세가 실제로 이어진다면, 일본은행은 초저금리 기조를 벗어나 금융정책의 유연성을 되찾을 수 있다. 반대로 임금이 기대만큼 오르지 않을 경우에는 섣부른 금리 인상이 경기 회복을 위협할 수 있다. 일본은행의 실제 금리 인상 시점을 속단할 수 없는 이유다.
소비자 구매력 저하 국면 지속
실제 일본 실질임금은 꾸준한 하락세를 보이며 일본은행의 금리 정책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지난 5월 실질임금은 전년 동월 대비 2.9% 하락해 2년 만에 최대 폭의 감소세를 그렸다. 이는 명목임금이 1.0%의 상승세를 보였음에도 물가 인상 속도가 이를 훨씬 앞지르면서 발생한 결과다. 금리 인상 시점을 저울질하던 일본은행으로서는 정책 추진의 동력이 약화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처럼 실질임금 하락은 일본 경제의 고질적 문제와 맞닿아 있다. 일본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물가상승률이 목표치인 2%를 넘어섰지만, 기업들은 비용 부담을 이유로 임금 인상에 소극적이었다. 물가가 오르는 가운데 임금이 정체되자, 근로자들의 구매력은 지속적으로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행이 금리를 올릴 경우, 가계의 원리금 상환 부담이 가중돼 소비 여력은 더욱 줄어들 공산이 크다. 정책 당국으로서는 물가 관리와 임금 정체라는 이중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셈이다.
일본은행은 금리 정상화 추진에 있어 신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물가 상승률만을 근거로 금리를 올리기에는 사회적 파장이 크고, 임금 정체가 해소되지 않으면 정책의 정당성을 확보하기도 어려운 탓이다. 결국 일본은행의 통화정책은 실질임금을 둘러싼 지표 개선 여부에 달려 있으며, 임금 반등 없이는 금리 정상화 또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는 일본 경제가 당면한 근본적 과제와도 맞물린 사안으로, 향후 여타 정책 논의에서도 핵심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경기 부양 위해선 생산성 혁신 과제부터 해결해야
일본 경제의 가장 뿌리 깊은 문제로는 낮은 생산성을 꼽을 수 있다. 정규직 중심의 경직된 인사제도와 연공서열·종신고용 관행은 보상과 책임의 연결고리를 약하게 만들고, 외부 인재의 유입과 전직을 어렵게 한다. 여기에 다층 하청이 주를 이루는 산업 구조, 문서 결재와 대면 회의 중심의 의사결정 절차, 실패 회피 성향이 모두 맞물리면서 현장의 개선 속도와 실험 가능성은 매우 낮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실질임금이 정체되는 메커니즘은 바로 이처럼 낮은 생산성에서 출발했다. 중간 관리층의 위험 회피와 책임 회피 문화가 신기술 도입을 늦추고, 규정 준수 중심의 경영이 실험과 학습의 여지를 줄인 것이다. 이 같은 구조에서는 비용은 쉽게 줄일 수 있지만, 업무 설계를 바꾸는 결정은 미루는 경향이 강하다. 이러한 현상이 누적되면 단위 시간당 산출, 즉 생산성의 장기 정체는 피할 수 없다.
수치로 보면 더 선명하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 의하면 2019년부터 2022년까지 4년간 일본 IT 산업의 노동생산성은 13% 하락했다. G7 가운데 가장 큰 하락 폭이며, 유일하게 두 자릿수 감소 폭을 그렸다. 같은 기간 미국과 영국은 각각 27%, 9% 증가한 것과 대비된다. 닛케이는 이를 두고 개발 방식의 관성, 레거시 시스템 유지, 부서 간 데이터 단절에 따른 결과로 해석했다. IT 투자와 산출의 연결이 느슨해지면서 생산성 악화를 부추겼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일본 산업계의 구조 개혁 없이는 임금 상승을 통한 경기 회복 또한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노동시장 유연화와 경직된 기업 관행의 개선, 기술 투자 확대와 같은 근본적 개혁 없이는 저임금·저생산성 구조가 장기적으로 고착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이는 실질임금 개선의 발목을 잡는 것은 물론, 나아가 일본은행이 추진하는 금리 정상화 역시 기대하기 어렵게 만든다. 따라서 생산성 혁신이야말로 일본 경제의 장기 침체를 종식하고 금융정책 전환을 가능케 할 유일한 해법으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