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부유한 사람들이 대가 치를 차례” 프랑스 잠식한 ‘아전인수식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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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 중독’ 프랑스, 전역서 대규모 시위 발발 재정적자 심각하지만 시민들 “긴축은 안 돼” 슈퍼리치 부유세에 여론 '대동단결'

프랑스 사회가 부유층 증세를 둘러싼 해묵은 논쟁으로 다시 뜨거워지는 가운데, 세계 최대 명품 기업 루이뷔통모에헤네시(LVMH)의 베르나르 아르노 총괄회장이 하루 만에 26조원에 이르는 막대한 부를 추가로 쌓아 논란의 중심에 섰다. LVMH의 깜짝 실적 발표가 주가 급등으로 이어지며 자산이 천문학적으로 불어났는데 이는 프랑스 정치권의 부유세 도입 논의에 기름을 부은 셈이 됐다. 급속히 증가한 국가채무와 재정적자를 부유세로 메우자는 것이 골자로, 프랑스 경제학자 가브리엘 쥐크만(Gabriel Zucman)이 제안한 이른바 '쥐크만세'가 그 산물이다. 1억 유로(약 1,655억원)가 넘는 자산에 2%의 부유세를 부과해 불평등을 바로잡겠다는 취지지만, 이는 결국 기업의 의욕을 꺾고 자본을 국가 밖으로 내모는 결과를 낳을 것이란 비판이 거세다.
아르노 회장 자산 하루 26조원 폭증, 부유세 논쟁 불씨
15일(이하 현지시각) 블룸버그 억만장자 지수(Bloomberg Billionaires Index)'에 따르면, 아르노 회장의 개인 자산은 이날 단 하루 동안 190억 달러(약 26조원) 폭증해 총 1,920억 달러(약 272조원)에 이르렀다. 올해 76세인 아르노 회장에게는 역대 두 번째로 큰 하루 자산 상승폭이다. 자산 폭증을 이끈 것은 LVMH 주가 급등이다. 시장 예상을 웃도는 3분기 실적을 발표하자 LVMH 주가는 이날 하루에만 12% 치솟았다. 핵심 사업인 패션·가죽 제품 부문이 굳건한 성장세를 보인 덕분이다.
LVMH의 실적 호조는 업계 전반에 새로운 낙관론을 불어넣으며, 에르메스 인터내셔널(+7.35%)과 구찌의 모기업 케링(+4.77%) 등 다른 프랑스 명품 기업들의 주가까지 동반 상승시키는 기폭제가 됐다. 이로 인해 프랑스 명품 산업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최고의 성장률을 보였다. 아르노 회장을 비롯한 소수의 프랑스 가문이 세계 명품 산업을 지배하는 현실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는 최근 프랑스 내 정치 논쟁과 맞물려 논란을 낳고 있다. 현재 프랑스는 예산안 통과 지연, 노동개혁 반대 시위, 현 정부 지지율 하락 등 여러 국내 정치 불안 요소가 겹쳐 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는 대규모 재정위기에도 직면해 있다. 프랑스의 올해 2분기 말 공공부채는 3조4,163억 유로(약 5,655조원)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115.6%에 달한다. 유럽연합(EU) 평균 81%를 크게 웃도는 수치이자, 유로화를 사용하는 국가 중 그리스와 이탈리아 다음으로 높다.
이에 프랑스는 국가 부채 상황을 타개하고자 긴축 재정 정책을 추진하려 했지만, 대규모 시위와 파업에 부딪혀 물러나야 했다. 국가 부채의 원인이 무분별한 재정 지출과 부자 감세에 있다고 믿는 대다수 국민에게 긴축은 ‘불공정한 희생’ 강요로 받아들여진 탓이다. 여기에 종교적, 역사적 의미가 큰 공휴일을 축소하려는 계획이 알려지면서 분노에 기름을 부었고, 결국 프랑스 사회는 멈춰 섰다. 지난 9월 10일과 18일, 주요 노조와 시민단체가 두 차례에 걸쳐 국가 마비 시위를 벌이면서다. 특히 18일에는 100만 명 이상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도로, 항만, 공항, 철도를 점거했다. 심지어 학교와 병원, 공장도 문을 닫았다. 일부 지역에서는 방화와 폭력 사태까지 발생하며 프랑스 전역이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쥐크만 “슈퍼 리치들이 세금 더 내라”
긴축과 저항의 평행선 속 대안으로 떠오른 것은 ‘슈퍼 리치 부유세’다. 부유세 논의를 촉발한 인물은 미국 상원의원 버니 샌더스, 엘리자베스 워런의 경제 자문을 맡았던 쥐크만 파리 경제대학 교수다. 그는 순자산 1억 유로 이상인 초부유층에게 2%의 세금을 부과하자는 제안을 내놨다. 해당 납세자가 그해 낸 각종 세금(소득세+사회기여금 등)이 적어도 순자산의 2%는 돼야 하고, 만약 그에 못 미치면 추가로 세금을 물려서 2% 기준선에 맞추자는 것이다.
최근 프랑수아 바이루(Francois Bayrou) 프랑스 총리가 공공지출 삭감을 담은 예산안 통과를 주장하다 결국 물러난 상황에서 쥐크만은 이제야말로 프랑스 부유층이 주머니를 열 차례라고 강조한다. 쥐크만의 셈법에 따르면, 프랑스의 1,800가구가 부유세의 대상이며 이들이 2%의 자산세를 내게 되면 200억 유로(약 33조원)의 세수가 추가 확보된다. 쥐크만세는 이미 지난 2월 하원에서 통과됐으나 우파가 다수를 차지하는 상원의 문턱은 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 아르노 회장의 재산 증식은 새로운 가능성을 점치게 한다는 평가다.
당장 내년에 440억 유로(약 72조원)의 예산 감축이 필요한 절박한 상황 속 쥐크만의 주장은 프랑스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최근 여론조사에서 프랑스 국민 중 86%가 쥐크만세에 찬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좌파 유권자는 물론, 우파인 르네상스당 지지자의 92%, 공화당 지지자의 89%도 찬성했다. 이는 여론조사에서 드물게 나타나는 만장일치다. 철도노조(SUD-Rail)의 파비앵 빌르디외 대표는 "가난한 노동자와 은퇴자에게만 대가를 치르게 하는 긴축을 멈춰야 한다"며 "이제는 이 나라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이 대가를 치를 차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바이루 총리가 물러나고 수립된 세바스티앙 르코르뉘(Sebastien Lecornu) 내각은 좌파 야권의 협조를 반드시 확보하겠다는 입장이기 때문에, 쥐크만의 부유세 주장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소속된 현 집권당인 르네상스도 부유세를 수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99.99%의 국민엔 전혀 영향이 없는, 따라서 정치적 지지를 얻기 매우 쉬운 세금이기 때문이다.
“도덕적 언어로 포장된 이기심” 비판
몇 달 전만 해도 마크롱 대통령과 중도우파 동맹은 부유세를 프랑스 사회주의의 유물이라며 일축했다. 앞서 사회당 소속의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지난 2012년 대통령 선거 당시 프랑스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부유세 제도를 공약으로 내세웠고 당선 후 2013년부터 연간 100만 유로(약 16억5,000만원) 이상의 임금 초과분에 대해 기업으로부터 75%의 세금을 걷는 부유세를 도입했다.
하지만 부유세의 실질적 효과는 미미했다. 부유세 대상자가 2,000∼3,000명에 불과해 재정 확충효과가 크지 않았던 탓이다. 프랑스 재무부에 따르면 당시 부유세로 거둬들인 세금은 2013년 2억6,000만 유로, 2014년 1억6,000만 유로 등 총 4억2,000만 유로(약 5,600억원)에 그쳤다. 이는 전체 소득세 700억 유로(약 115조원)의 1% 미만 수준이다.
부자들이 세금을 피해 다른 나라로 국적을 바꾸는 부작용도 나타났다. 2013년 프랑스 국민배우 제라드 드빠르디유는 부유세를 피해 러시아 시민권을 취득했고, 아르노 회장도 거센 비난에 직면해 취소하긴 했지만 벨기에 시민권 취득을 시도한 바 있다. 프랑스 재정부에 따르면 당시 국적 포기 등으로 발생한 사회적 손실만 연 7억 유로(약 9조원)에 육박했다. 이 기간 이탈한 프랑스 자본이 200억 유로(약 256조원)라는 분석도 있다. 이른바 '증세의 역설(굴스비의 역설)'이다. 결국 프랑스 정부는 시행 2년 만인 2015년 부유세를 폐지했다.
반대 측의 주요 논리 역시 '이랬다간 부자들이 모두 프랑스를 등지게 될 것'이라는 거다. 여러 나라에서 해당 세법을 검토 중이지만 아직 채택한 나라는 없기 때문이다. 세금이 도입될 경우 부자들의 자본 이탈을 초래해 금융시장 혼란이 깊어질 것이라는 우려와 해당 세금을 부동산과 금융자산뿐만 아니라 사업주 자산에도 부과할 경우 오히려 일자리 창출을 저해하는 부작용이 생겨날 것이라는 우려도 자리한다.
아르노 회장도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그는 지난달 더 선데이 타임스에 낸 성명에서 "이것은 기술적·경제적 논쟁이 아니라 프랑스 경제를 파괴하려는 명백한 의지"라고 주장했다. 이어 쥐크만을 저격해 "자유경제, 즉 모두의 이익을 위해 유일하게 작동하는 경제를 파괴하려는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기 위해 그 자체로도 널리 논쟁의 대상이 되는 가짜 학문적 역량을 동원한다"고 비난했다.
일각에선 프랑스의 조세 논쟁이 경제학만의 문제가 아닌 인식의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한 경제 전문가는 "프랑스 사회는 ‘공동체적 정의’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속한 계층의 이해를 절대화하는 아전인수적 사고가 지배적"이라며 "이기심이 도덕의 언어로 포장되고, 불평등 해소의 명분 아래 국가 생산의 동력을 억누르고 있다"고 짚었다.
무엇보다 증세와 지출 축소 모두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프랑스의 GDP 대비 조세부담률은 2023년 기준 45.6%로 EU 최고 수준이고, 사회지출은 GDP의 32%로 EU 평균(26%)보다 높다. 이런 상황 속 프랑스 위기는 무디스와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의 신용등급 발표가 각각 이달과 11월 예정돼 있어 더 심화할 수 있다. 등급이 더 내려가면 국채이자 부담이 커져 나랏빚 부담이 커지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 전문가들은 프랑스를 ‘실패하기에는 너무 크고(too big to fail), 구제하기에도 너무 큰(too big to save)’ 국가로 평가한다. 과거 유로존 안정의 한 축이었던 프랑스가 이제는 시스템 리스크의 주요 원천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