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파이낸셜] 수출 통제의 역설, 제약이 혁신을 이끌다
입력
수정
기술 산업 변화를 이끈 새로운 동력, 국가 주도의 기술 전략 수출 통제 강화 속 중국의 대응과 제약 기반 혁신 산업 재편의 핵심, 지속 가능한 기술 경쟁력 확보
본 기사는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의 SIAI Business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SIAI 또는 그 소속 기관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난 10년간 기술 산업의 방향을 가장 크게 바꾼 요인은 새로운 인공지능 모델이나 차세대 반도체가 아니다. 산업의 질서를 움직인 것은 정부가 만든 기술 규제의 압력이다. 2022년 말, 미국은 규제를 통해 중국의 엔비디아 H100급 프로세서 접근을 차단했다. 엔비디아가 곧바로 ‘중국 전용’ 제품을 내놨지만, 이마저 2023년 11월 추가 제재를 받았다. 2025년 들어 미국은 다시 H20 칩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규제가 강화될 때마다 중국의 대응 속도는 더 빨라졌다. 화웨이는 어센드(Ascend) 시리즈 개발을 가속해 2025년 4월, 두 개의 910B 다이를 결합한 910C 듀얼 패키지를 양산할 준비를 마쳤다. 업계는 해당 칩이 H100급 성능에 근접했다고 평가한다.
이 사례는 수출 통제가 혁신을 멈추게 하기보다 오히려 기술 방향을 재설계하게 만든다는 점을 보여준다. 압력은 산업 전반의 연구개발 전략과 경쟁 구도를 바꾸며, 새로운 기술 주도권 경쟁의 무대를 형성하고 있다.

수출 통제 혁신의 실증 효과
기술 제재가 단기적으로 공급을 차단하더라도, 중기적으로는 오히려 자국 내 혁신을 촉진한다는 근거가 늘고 있다. 2007년 미국의 수출 규제 이후, 제재 품목을 수입하던 중국 기업들은 미국으로부터의 수입을 약 90% 줄였다. 그러나 같은 기업들의 연구개발 지출은 49%, 특허 출원은 41% 늘었고, 제재 기술과 직접 관련된 특허는 65% 증가했다. 국내 공급업체들 또한 관련 분야의 특허 활동을 강화했다.

주: 연도(X축), 회귀계수(Y축)
핵심 투입재가 차단되면 희소성이 높아지고, 기업은 대체 기술 확보에 더 많은 자본과 인력을 집중한다. 그 결과 연구개발과 특허 활동이 동시에 확대된다. 이런 현상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의 무기 개발 경쟁, 2021년 한국의 요소수 공급망 위기에서도 반복됐다. 외부 충격이 산업 역량 강화로 이어지는 구조다. 중요한 것은 완전한 개방이 아니라,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회복력 있는 체계를 설계하는 일이다.

주: 연도(X축), 회귀계수(Y축)
중국의 AI 스택과 수출 통제의 역설
현재 수출 통제가 가장 직접적으로 작동하는 분야는 인공지능이다. 미국의 규제로 첨단 GPU와 개발 도구, 메모리 기술 접근이 제한되자, 중국은 칩·프레임워크·컴퓨팅 네트워크를 모두 포함하는 ‘풀스택(full stack)’ 대안을 구축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국가 AI 전략을 ‘자율적이고 통제 가능한 시스템’과 연계해 공공 자금을 대규모로 투입하고 있다. 8억2,000만 달러(약 1조1,400억 원) 규모의 국가 AI 펀드와 내륙 지역 대형 데이터센터 허브 조성이 그 예다. 이런 투자는 기술 자립 기반을 다지려는 시도로, 국가 주도의 산업정책이 민간 기술 생태계로 확장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성과와 한계는 공존한다. 2024년 중반 기준, 미국은 전 세계 AI 컴퓨팅 자원의 약 75%, 중국은 약 15%를 보유하고 있다. 중국의 총 연산 능력은 약 246엑사플롭/초로, 2025년까지 300엑사플롭/초 달성을 목표로 하지만, 상당 부분은 첨단 학습용으로 최적화돼 있지 않다. 국산 프레임워크인 마인드스포어(MindSpore)와 패들패들(PaddlePaddle)도 글로벌 채택률이 낮다.
수출 통제 아래의 혁신은 균등하지 않다. 인프라 구축과 추론 단계에서는 빠르게 진전하지만, 대규모 학습에서는 병목이 뚜렷하다. 화웨이의 어센드(Ascend) 910C는 두 개의 910B 다이를 결합해 특정 작업에서 엔비디아 H100급 성능을 구현했지만, 대규모 학습에는 여전히 한계가 있다. 이에 미국은 성능 밀도, 고대역폭 메모리, 첨단 패키징까지 통제 범위를 확장하며 우회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다. 기술 경쟁의 초점은 이제 모델 설계에서 시스템 효율과 확장성으로 이동하고 있다.
결국 수출 통제는 단순한 제재 수단이 아니라 산업 구조를 재편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중국의 대응은 ‘대체’보다는 ‘제약 속 최적화’에 가깝다. 이는 기술 경쟁이 모델 성능 중심에서 인프라 효율성과 시스템 설계 능력의 경쟁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관세 정책의 한계와 비교
수출 통제가 정밀한 기술 통제 수단이라면, 관세는 훨씬 단순한 방식으로 작동하며 경제 전반에 더 큰 부담을 준다. 일률적 20% 관세는 미국 가계당 연간 2,600~4,000달러(약 360만~560만 원)의 추가 비용을 발생시킨다. 저소득층일수록 충격은 크다. 이전 무역분쟁에서 3,800억 달러(약 528조 원) 규모의 수입품에 부과됐던 관세가 2023년 총수입액 3조1,000억 달러(약 4,300조 원) 전체로 확대될 경우, 부담은 특정 산업을 넘어 경제 전반으로 확산된다.
관세는 단기적으로 수입을 억제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소비자와 기업 모두에 세금 형태의 비용을 남긴다. 보복 조치로 인한 공급망 불안도 커진다. 연구 장비, 화학물질, 건축 자재 등 컴퓨팅 인프라 확충에 필요한 핵심 투입재 가격이 오르면서 혁신 비용이 함께 증가한다.
이와 달리 수출 통제는 산업 전반에 구조적 압력을 가해 기술 자립과 대체 혁신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정책적 효과가 다르다. 그러나 과도한 통제는 기술 생태계의 효율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점에서 균형이 필요하다.
변화에 대응하는 역량
수출 통제의 기준이 바뀔 때마다 양측의 대응은 더 빨라졌다. 미국의 규제는 설계 변경과 접근 제한을 초래했고, 중국 기업들은 패키징 기술, 소프트웨어 조정, 대규모 투자로 맞대응했다. 이런 과정 자체가 수출 통제가 혁신을 촉발하는 경로를 보여준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제도의 정비와 실행력이다. 제약 속에서도 작동 가능한 산업 시스템을 구축하고, 규정 변화에 흔들리지 않는 연구와 공급망을 유지해야 한다. 인력과 자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신뢰 기반의 협력 체계를 마련하는 일이 중요하다.
지속적인 혁신은 제도나 규제가 아니라 이를 실행할 역량에서 나온다. 인재, 산업, 정책이 함께 작동할 때 안보와 성장의 균형이 가능하다. 개방성과 회복력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다면, 기술 환경이 다시 변해도 대응의 중심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Export Controls Innovation: How Pressure Built China’s AI Stack and What Schools Must Learn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