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MEMO] 공공 협력이 만든 세 번째 AI 인프라
입력
수정
세 번째 AI 스택의 본질은 공공 협력 인프라 연산·데이터·안전이 만드는 신뢰의 구조 협력의 제도화가 만들어내는 실행력
본 기사는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의 SIAI Research Memo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SIAI 또는 그 소속 기관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2024년 에어버스는 전 세계 항공사에 766대를 인도했다. 보잉의 두 배다. 이 결과는 유럽 컨소시엄의 협력이 만든 성과다. 자본과 기술, 표준을 함께 묶은 연합 구조가 산업의 흐름을 바꿨다. 유럽은 협력의 방식으로 시장의 질서를 새로 설계했다. 교훈은 항공이 아니라 구조에 있다. 국가가 자본과 기술을 모으면 산업의 틀은 달라지고, 정책과 규범이 함께 움직일 때 시장의 규칙도 바뀐다.
이 구조적 변화의 원리는 교육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교실·연구·공공서비스에서 안전하고 다언어로 접근 가능한 AI의 필요성이 빠르게 커지고 있다. 그러나 민간이 만든 AI만으로는 이를 감당하기 어렵다. 이를 해결하려면 ‘세 번째 AI 스택(Third AI Stack, 연산·데이터·모델을 층으로 쌓은 기술 기반)’이 필요하다. 이 스택은 기업 플랫폼과 오픈소스 생태계 사이에서 작동한다. 즉, 연산·데이터·안전 인프라를 공동으로 제공하는 공공 협력층이며, 이 구성이 세 번째 스택의 핵심이다.
유럽은 이미 행동에 나섰다. EuroHPC를 중심으로 초고성능 연산망 구축을 추진하며 회원국 간 인프라를 하나로 연결하고 있다. 프로젝트 예산은 70억 유로(약 10조 원)에 달한다. 국가별로 흩어져 있던 컴퓨팅 자원을 공동으로 묶어 공공이 직접 활용할 수 있는 AI 네트워크를 만들고 있다. 이 연합 구조는 연구자와 학교, 공공기관이 함께 쓰는 ‘공공 AI 실험장’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 모델은 곧 미국으로 이어졌다. 미국은 연구자용 NAIRR(National Artificial Intelligence Research Resource) 체계를 도입해 공공 데이터와 연산 자원을 통합 관리하기 시작했다. 정부·학계·비영리기관이 협력해 AI의 공공 접근권을 제도화하는 구조를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은 많지 않다. 연산과 모델의 규모가 폭발적으로 커지고 있다. 공조가 늦어지면 학교의 필요와 민간 스택의 방향은 따로 움직인다. 결국 간극은 더 깊어진다.
AI 인프라의 공백, 교육이 먼저 맞닥뜨린 현실
AI의 격차는 기술보다 인프라에서 시작된다. 연산 자원과 데이터 접근이 소수 기업에 집중되면서 교육 현장은 가장 먼저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학교와 연구기관이 사용하는 모델은 속도와 비용에서 이미 산업용 시스템과 격차가 벌어졌다.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TrendForce)에 따르면 첨단 AI의 학습비용은 2010년 이후 매년 4~5배씩 증가했다. 최신 모델은 10의 26제곱 플롭스(flop)에 달하는 연산을 필요로 한다. 이 거대한 연산량을 감당할 수 있는 하드웨어는 소수 반도체 기업이 독점하고 있다. GPU 시장만 놓고 보면 한 업체의 점유율이 90%에 이른다. 이런 구조에서 공공 교육기관이 독자적으로 AI를 학습시키거나 연구용 모델을 운영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결국 피해는 교실에서 드러난다. AI는 수업 자료를 번역하고 학생 수준에 맞게 조정하며 교사의 업무를 줄이는 데 쓸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교육용 시스템과 정책 연구 프로그램은 수익성이 낮다는 이유로 시장에서 밀려나고 있다.
AI 인프라의 공백은 곧 공교육의 신뢰 문제로 이어진다. 데이터 접근이 제한되면 연구가 위축되고, 교사들은 상용 플랫폼에 의존하게 된다. 공공이 직접 관리하는 연산 기반과 검증 절차가 없다면 교육은 민간 정책 변화에 따라 흔들릴 수밖에 없다.

주: 엔비디아(핑크)가 90%를 차지하며, AMD(빨강) 8%, 기타 업체(진한빨강)가 2%를 기록했다.
에어버스식 연합 모델, 공공 AI의 실행력으로
공공 AI의 실행력은 협력에서 나온다. 한 나라가 모든 자원을 감당하기는 어렵다. 산업과 정부, 연구기관이 함께 참여하는 연합 구조가 필요하다. 이 방식은 과거 유럽 항공산업이 에어버스를 통해 보여준 모델과 닮아 있다.
1970년 출범한 에어버스는 보호주의가 아닌 위험 분담과 표준화된 조달로 경쟁력을 확보했다. 유럽 각국이 R&D 투자와 부품 생산을 분담하고, 공통 규격을 도입하면서 공급망의 효율이 높아졌다. 한정된 자원을 모은 결과, 유럽은 시장의 구조 자체를 바꾸는 데 성공했다. 공공 AI 역시 같은 원리를 따른다.
이미 기반은 존재한다. 유럽의 EuroHPC는 초고성능 연산망을, 미국의 NAIRR은 연구자에게 데이터와 모델 접근권을 제공한다. 여기에 영국과 미국이 주도하는 인공지능 안전 연구소(AI Safety Institute) 네트워크가 결합하면 새로운 협력 구조가 형성된다. 유럽과 미국의 협력망은 연산·데이터·안전 평가를 하나로 잇는 공공 구조로 확장되고 있다. 그 기반 위에서 교육과 과학 분야는 검증 가능한 AI를 개발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게 된다. 각국이 자원을 공유하고 규범을 함께 세울 때, 공공 AI는 산업의 부속물이 아니다. 공공이 직접 구축한 인프라로 자리 잡는다. 협력의 제도화가 곧 실행력이다.

주: 에어버스(핑크)는 766대를, 보잉(빨강)은 348대를 인도했다.
재원·데이터·안전, 신뢰의 구조
공공 스택의 지속성은 세 가지 축에 달려 있다. 자금을 어떻게 모으고, 데이터를 어떻게 관리하며, 안전을 어떻게 검증하느냐가 핵심이다. 이 세 요소가 균형을 이뤄야 공공 AI가 시장 의존을 벗어나 자립할 수 있다.
첫째는 재원이다. 차세대 모델의 학습비용은 이미 10억 달러(약 1조 4천억 원)에 육박한다. 공공 예산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 그러나 유럽의 EuroHPC처럼 국가별 예산을 공동 조달하고, 교육용 연산 시간을 별도로 배정하면 효율이 높아진다. 미국의 NAIRR도 재단과 민간 기업의 공동 출자를 유도해 지속 가능한 구조를 만들고 있다. 공공은 가격 협상력을 얻고, 민간은 사회적 신뢰를 확보하는 방식이다.
둘째는 데이터다. 교육용 AI는 무작위 웹 데이터로는 작동하지 않는다. 학생의 연령과 학습 단계, 언어권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유럽연합의 ‘디지털 유럽 프로그램’처럼 공공이 직접 관리하는 교육 데이터 공간을 구축해야 한다. 교재, 평가, 토론 기록을 포함한 교육 데이터는 표준화가 필요하다. 아동 보호와 개인정보 규정을 통합 관리할 때, 모델의 품질과 신뢰가 함께 높아진다.
셋째는 안전이다. 영국과 미국이 설립한 인공지능 안전 연구소는 이미 위험 평가와 테스트 프로토콜을 공유하고 있다. 교육 분야에서도 같은 체계를 도입해야 한다. 모델의 편향, 오답, 위험 제안을 정기적으로 검증하고 그 결과를 공개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안전 평가가 제도화되면 교사와 학부모가 신뢰할 수 있는 ‘공공 인증 AI’가 가능해진다. 결국 재원·데이터·안전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의 문제다. 세 축이 맞물릴 때, 공공 스택은 단순한 인프라를 넘어 사회적 계약의 일부로 자리 잡는다.
협력의 시간, 공공 AI가 남길 선택
이제 남은 것은 속도보다 방향이다. 기술이 앞서가도 신뢰가 따라오지 못하면 공공 AI는 또 하나의 산업 프로젝트로 남는다. 협력의 제도화를 늦춘다면 학교와 연구 현장은 민간 플랫폼의 변동에 계속 흔들릴 것이다. 공공이 선택해야 할 길은 분명하다. 연산 자원을 함께 확보하고, 교육 데이터를 안전하게 공유하며, 평가 기준을 투명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어느 한쪽의 의지로 완성되지 않는다. 국가와 기관, 기업이 같은 규칙 안에서 움직일 때만 지속 가능하다.
지금의 결정이 10년 뒤 교육의 형태를 바꾼다. 교사 한 사람의 시간, 학생 한 명의 언어가 그 변화의 단위가 된다. 기술의 속도는 냉정하지만, 협력의 방향은 인간의 선택에 달려 있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Building the Third AI Stack: An Airbus-Style Playbook for Public AI Cooperation 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