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기 규제로는 부족” 한국은행 총재 ‘10년 부동산 전략’ 필요성 역설
입력
수정
장기적 정책 일관성 강조 메시지
시장 개선 관건은 투기 수익률 차단
금융정책 신뢰 회복 선행돼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부동산 문제는 10년 이상 일관된 정책으로 다뤄야 한다는 발언으로 정치권에 경종을 울렸다. 정부의 연이은 부동산 대책으로 서울 아파트 거래량이 급감하는 등 규제 효과가 나타나긴 했지만, 이는 실수요자 중심의 단기 효과에 불과하단 지적이다. 시장 전문가들 역시 정부의 부동산 대책에 투자수익률을 낮추는 근본 대책이 빠져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정책 신뢰를 최우선 과제로 꼽았다.
“공급·수요 중 하나만 조절해서는 어려워”
30일 금융권에 따르면 이 총재는 전날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종합국정감사에서 “부동산 문제는 지난 20년간 여러 정부에서 반복돼 온 사안으로, 하나의 정책으로 1~2년 만에 해결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여야가 일관된 정책으로 10년 정도는 노력을 해야 한다”며 단기 처방보다 장기적 정책 일관성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나아가 이 총재는 부동산 시장이 통화정책의 제약 요인으로 작용하는 현실을 꼬집으며 “단기적 경기 부양책보다는 근본적 대응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이 같은 이 총재의 발언은 최근 정부의 10·15 부동산 대책 이후 뚜렷해진 시장 변화와도 맞물린다.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시스템에 의하면 이달 16일부터 28일까지 13일간 서울 아파트 매매 거래는 713건으로 직전 13일(3~15일·3,447건) 대비 79.3% 급감했다. 같은 기간 서울 아파트 매물도 7만4,044건에서 6만4,845건으로 12.5% 감소했다. 대출 규제 강화와 토지거래허가구역 지정으로 기존 집을 팔고 상급지로 옮기려던 갈아타기 수요가 급감한 데 따른 결과로, 이 총재가 언급한 ‘단기 대책의 한계’가 수치로 드러난 셈이다.
이 총재는 “(부동산 시장의 문제는) 공급·수요 중 하나만 조절해서는 해결이 어렵다”며 “단기적으로는 수요 억제와 상승 기대 차단, 장기적으로는 공급 확대가 병행돼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또 오피스 전환형 주택 공급을 예로 들며 “서울시가 검토 중인 오피스에서 주택으로의 전환이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인공지능(AI)을 비롯한 자동화 확산으로 사무실 수요가 줄고 있는 만큼 남는 공간을 주택으로 전환하는 방향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설명이다.

수익률 단계적 하향 유도 필요성 대두
전문가들도 부동산 시장의 안정화를 위해서는 단기 규제보다 투자 수익률 자체를 구조적으로 낮추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10·15 대책은 서울 전역과 경기 12개 지역을 토지거래허가구역 및 규제지역으로 묶고, 15억~25억원 아파트의 대출 한도를 6억원에서 4억원으로 축소하는 등 수요 억제책에 집중됐다. 그러나 대출이 필요 없는 고자산층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해 실수요는 위축되고 상급지 거래만 이어지는, 시장 양극화를 부추겼다는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단기 대책으로는 기대 인플레이션을 꺾기 어렵다는 진단 또한 이런 비판과 궤를 같이한다. △신축·구축 매물의 공급 확대 △예상 수익률보다 높은 대출 금리 부과 △취득·보유·양도 단계별 세금 인상 같은 근본적 대책이 선행되지 않으면, 상급지 초과 수요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실제 현금 여력이 충분한 자산가에게는 대출 한도 제한 같은 단기적 압박이 사실상 무의미하며, 이들의 거래가 계속되는 한 불합리한 가격 상승세는 끊이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다.
한국세법학회 회장을 역임 중인 박훈 서울시립대 교수는 “정부가 양도차익에 과도한 세금 감면을 해준 결과 ‘똘똘한 한 채’ 현상이 고착됐다”며 “양도세 제도 개편이 근본 대책”이라고 강조했다. KB국민은행 박원갑 수석전문위원 역시 “30대와 40대 사이에선 아파트를 주식처럼 사고파는 ‘투자상품’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짙다”고 짚으며 “단기 이익에 집중된 시장 구조 속에서 장기적 안정을 도모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희망”이라고 일갈했다.
서구식 모기지 제도 도입 불발이 드러낸 한계
국내 부동산 시장이 단기 이익에만 쏠려 있다는 사실은 장기 고정금리 주택담보대출 도입 과정에서 고스란히 노출된 바 있다. 시중은행들은 당국의 강한 의지에 따라 연내 10년 이상 장기 고정형 주담대 상품 출시를 목표로 준비해 왔다. 그러나 잇따른 부동산 대책 발표로 정책적 명분이 약해지면서 추진 동력을 잃었다. 10·15 대책의 스트레스 금리 상향으로 변동금리 차주에 대한 부담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는 있지만, 이미 주택가격 구간별로 대출 한도가 정해져 있는 만큼 스트레스 금리 상향이 한도 축소로 이어질 차주는 사실상 많지 않다는 게 은행권 시각이다.
금융당국은 지난해 장기 고정금리 주담대를 늘리기 위해 은행권 커버드본드(이중상환청구권부채권)에 대한 주택금융공사 지급보증을 추가했다. 이후 국민·신한은행이 잇따라 지급보증 커버드본드를 발행했지만, 정권 교체와 금융당국 개편 논의 등에 밀려 추진 속도가 늦어졌다. 이에 대해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당국은 연내 장기 주담대 출시를 희망했지만, 지금 진도로는 연내 출시가 어려울 것”이라며 “실제 주담대 한도가 제한돼 있고, 당국 입장에서도 새로운 상품 출시를 유도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현 금리 수준을 고려했을 때 장기 고정금리 흥행이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도 이러한 흐름에 일조했다. 국내에서 장기 대출이 활성화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과거 코로나19 시기 등과 비교해 금리가 크게 낮아지지 않아 금융소비자들 사이에서 고정금리 상품을 선택할 유인이 크지 않단 지적이다. 실제 지난해 금융당국이 고정형 주담대 출시에 속도를 내면서 신한은행과 기업은행이 10년 주기형 주담대를 출시했지만, 신한은행의 취급액은 월평균 7억5,000만원, 기업은행 취급액은 월평균 6억원에 그치는 등 흥행에 실패했다.
은행권은 당국의 추진 의지를 지켜보며 관망하는 분위기다. 이재명 대통령이 대선 공약집에서 장기 고정금리 주담대 활성화 계획을 밝힌 만큼 상품 출시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면서도 부동산 시장 안정을 우선순위에 둔 당국과 혼선을 빚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또 다른 시중은행 관계자는 “지난 9월까지 당국과 소통이 있었지만, 현재 장기 고정금리 주담대 출시와 관련해 구체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내용은 없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