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성 진단] 회의·보고·야근의 나라 한국, ‘일하는 척’이 불러온 경제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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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성 정체에 자본 이탈 가속”
경영진 문제 인식·혁신 의지 부재
인적자본 수준 대비 시스템 성숙도↓

국내 생산성이 0.1% 떨어질 때마다 국내총생산(GDP) 또한 0.15% 위축된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경제 둔화의 원인을 ‘노동 효율의 붕괴’에서 찾은 이 같은 연구 결과는 오랜 시간 누적된 일의 방식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시사한다. 거듭된 근로 시간 단축에도 생산성 개선이 요원한 노동 현장의 현실은 근무 형태의 문제를 넘어 사회·경제적 비효율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성과보다 과정이 중시되는 조직 문화와 경직된 의사결정 체계가 노동 효율을 제약한다는 진단과 함께 이러한 시스템이 경제 전반의 체질 약화를 가속할 것이라는 데 전망이 일치했다.
‘형식적 근면’이 생산성 저하 악순환 유발
4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발간한 ‘해외투자 증가의 거시경제적 배경과 함의’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국민소득 기준 순해외투자 비중은 2000~2008년 0.7%에서 2015~2024년 4.1%로 약 6배 뛰었다. KDI는 "순해외투자가 늘어난 것은 국내 생산성이 하락한 데 따른 결과"라고 분석했다. 국내 생산성이 0.1% 떨어지면 해외자금 유출로 국내 투자가 0.05% 감소하고, 결과적으로 GDP는 0.15% 줄어든다는 설명이다. 보고서는 2000년대 들어 총요소생산성(TFP)이 빠르게 둔화한 점을 함께 지적했고, 그 여파로 국내 투자수익률이 약화되면서 자본이 외부로 빠져나가는 경로가 강화됐다고 해석했다.
낮은 생산성의 대표적 원인으로는 ‘비효율이 일상화한 근무 문화’를 꼽을 수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주요 회원사 50곳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는 근로자 한 명이 일평균 1시간 20분을 업무 외 사적 활동에 사용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하루 8시간 근무를 기준으로 약 17%에 해당하는 수치로, 단순한 태만의 문제를 넘어 업무 설계와 집중 환경의 부재를 의미한다. 직무 분석과 매뉴얼에 따른 역할·책임·시간 투입이 선명하게 규정되지 않으면서 근무시간 내 몰입이 흔들리고, 야근을 비롯한 추가 근로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고착한 것이다.
불합리한 보상 체계도 문제로 지적된다. 연공성이 강한 임금 구조는 시간 사용의 효율화를 자극하기보다 ‘연차 누적’ 자체를 보상한다. 고용노동부에 의하면 2023년 기준 국내 사업체의 12.7%가 호봉급 임금체계를 운용했는데, 100인 이상 기업은 그 비중이 54.4%, 300인 이상은 58.4%에 달했다. 이는 다시 임금 격차 확대로 이어진다. 한국노동연구원의 분석에서 근속 30년 이상 집단의 임금은 1년 미만 집단의 4.39배를 나타내며 동일 지표로 비교한 일본(2.54배), 독일(1.88배) 등을 훨씬 웃돌았다. 이러한 구조는 성과와 무관한 자동 보상을 강화해 근로자들의 자기계발 유인을 약화시키고, 저성장 국면에서 기업의 인건비 경직성을 키운다.
노동계는 총근로시간을 줄여 시간당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특히 중소기업 현장에서는 장시간 근로가 여전히 잔존하며, 대기업 원청의 납품단가 인하가 하청의 생산성 악화를 초래한다는 비판이 주를 이룬다. 반면 경영계는 근로시간이 빠르게 단축되는 동안 생산성이 그만큼 오르지 않았다고 맞서는 형국이다. 경직된 법과 제도, 일부 강성 노조가 현장의 유연화를 막아 생산성 제고를 제약한다는 지적이다. 양측의 진단은 다르지만, 공통분모는 ‘근무시간을 어떻게 설계하고, 그 시간 안에서 무엇을 산출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좁혀진다.
경영진은 리스크 회피에 치중
이처럼 근본적인 문제가 해소되지 않는 원인은 경영진의 문제 인식 결여, 비효율적 지시 체계 등 기업의 의사결정 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국내 기업들은 계층이 높아질수록 현장과의 거리감이 커지며 의사결정에 필요한 정보의 질은 급격히 떨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보고서와 문서 작업이 조직 운영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상황에서 정무적 언어를 다듬는 데 과도한 시간이 투입되고, 핵심 논점은 번번이 뒷전으로 밀리는 탓이다. 이런 환경에서 경영진의 의사결정은 속도와 정확성을 잃고, 혁신 시도 또한 억제된다.
비효율적 의사결정 체계는 직무 분석의 부재와도 맞물린다. 앞서 언급했듯 생산성과 몰입도의 향상을 위해서는 업무 단위를 세분화하고 필요한 인력·시간·책임을 명확히 구분하는 단계가 필요한데, 여전히 다수의 기업은 한 사람이 모든 과정을 담당하는 ‘올인원식’ 업무 방식을 고수한다. 이는 상급자의 통제에는 편의성을 부여하지만, 병렬 처리와 전문화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단점이 명확하다. 또 직무 경계가 불명확한 상황에서는 우선순위와 책임이 모호해지고, 즉흥적 지시가 잦아져 업무 재작업이 반복된다.
성과와 보상의 왜곡 역시 경영 부문의 핵심 문제로 지적된다. 직무·성과 중심 임금체계 전환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일정 수준의 공감대가 형성됐지만, 정밀 진단 없이 제도를 도입할 경우엔 상급자의 하급자 착취나 보여주기식 경쟁이 확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매출과 같은 단기 지표가 성과의 기준이 될 경우, 즉각적인 ‘수치 맞추기’에 몰두하는 식이다. 반대로 의사결정 속도나 재작업 감소, 조직 리드타임 단축 등을 성과 지표로 삼으면, 경영의 방향은 효율과 품질 중심으로 이동할 수 있다. 결국 경영진 자신이 성과 평가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의사결정 과정의 비용과 시간을 핵심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이 가능해진다.

장기 성장률 갉아먹는 비효율적 시스템
전문가들은 국내 기업 현장이 경영생산성 정체와 노동생산성 저하의 악순환에 갇힌 것에 깊은 우려를 표했다. 장용성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은 이러한 악순환의 배경으로 ‘인재 배치의 실패’를 지목했다. 그는 “2023년 기준으로 한국의 1인당·시간당 노동생산성지수는 각각 59, 56로 기준인 미국(100)은 몰론 OECD 평균 (70, 76)에도 못 미친다”고 꼬집으며 “한국의 지적 자본 자체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높은 역량을 적재적소에 쓰지 못하는 배치 오류가 성과를 갉아먹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에 대한 근거로는 교육과 고용 제도의 단면을 제시했다. 장 위원은 “한국의 중고생 수학·과학 성취도는 세계 2위권으로 평가되고, IQ 국제 비교에서도 상위권(얼스터대 연구 기준 6위)으로 측정된 바 있다”면서 “그러나 연공·학연·지연·순환보직에 묶인 인사 관행이 이런 재능을 희석시키고, 동일 인력을 ‘모두가 조금씩 하는’ 구조로 흩어놓으면서 한계 생산성 또한 떨어뜨리는 형국”이라고 일갈했다. 이는 학생 개개인의 역량은 충분하지만, 대학과 기업으로 이어지는 관문에서 능력 차별화와 맞춤형 배치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에서 전문가 논의는 직무 정의와 성과 지표의 재설계, 그리고 인력 배치의 유연화를 공통 해법으로 제시한다. 조장옥 서강대 경제대학 명예교수는 “가장 시급한 과제는 조직 내 역할과 책임, 필요 인력, 소요 시간 등을 과업 단위로 명시하고, 재작업과 형식 보고 등 비가치 활동을 제거하는 일”이라면서 “그 다음엔 의사결정 리드타임 단축, 병목 해소, 업무 지연의 원인 제거 같은 질적 지표를 성과로 삼아 경영층부터 평가 대상에 올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핵심은 업무 부담을 현장에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인력 배치 원칙과 평가 규칙을 투명하게 유지하는 것이며, 그 책임은 경영진의 설계 역량으로 측정돼야 한다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