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평가 틈 파고든다” 기업 지배구조 취약한 한국, 행동주의펀드 확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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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 부양책 부재에 행동주의펀드 타깃 자사주 매입, 이사회 구성 개선 등 요구 상법 개정 및 정부 정책 등에 활동 거세질 전망

행동주의펀드들의 한국 기업 흔들기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행동주의펀드의 표적이 된 한국 기업은 지난 2020년부터 지난해까지 7배나 증가했다. 올해 들어서도 행동주의펀드 논란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한 밸류업 정책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업의 주가가 지지부진하자, 행동주의에 우호적인 환경이 조성됐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한진칼·SM엔터 경영권 분쟁서 ‘행동주의’ 두각
11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최근 한국에서 행동주의펀드의 확산세가 거세지고 있다. 영국 리서치 업체 딜리전트 마켓 인텔리전스 자료를 보면, 2020년만 해도 한국에서 배당 확대, 자사주 매입·소각, 이사회 의석 확보 등을 요구하는 주주 행동주의 캠페인이라고 할 만한 움직임은 10건에 불과했다. 그러나 2022년 15건으로 소폭 늘어난 데 이어 2023년 43건, 2024년 73건으로 눈에 띄게 증가했다. 5년 만에 7배나 늘어난 것이다. 이런 추세는 올해도 계속되고 있다. 올해 초 정기 주주총회 시즌에 주주제안이 이뤄진 기업만 39곳으로 집계됐다.
2018년 한진그룹의 '남매의 난'으로 촉발된 한진칼 경영권 분쟁은 한국형 행동주의의 대표 사례다. 사모펀드 KCGI는 2018년 11월 한진그룹 지주사인 한진칼 지분 약 9%를 최초 매입하며 주주가치 제고를 위한 경영참여를 선언했다. 한진그룹의 지배구조 개선과 주주친화 정책 강화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당시 KCGI는 반도건설,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과 손잡고 이른바 '3자연합'을 결성했다. 이들은 2020년 3월 주주총회에서 조원태 회장 측과 경영권을 두고 정면 충돌했으나, 조 회장 측이 산업은행 등의 지원을 업고 방어에 성공했다. 결과적으로 조 회장이 승리했지만, 기업 경영의 투명성과 주주의 권리를 강조한 KCGI의 시도는 이후 시장 전반의 행동주의 확산에 불을 지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23년 발생한 SM엔터테인먼트의 경영권 분쟁에서도 행동주의의 목소리가 컸다. 당시 얼라인파트너스자산운용은 SM의 지배구조와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의 개인 회사인 라이크기획과의 계약을 문제 삼으며 주주 행동에 나섰다. SM 경영진이 얼라인의 요구를 수용하고, 카카오가 SM의 2대 주주로 합류하면서 본격적인 경영권 분쟁이 촉발됐다. 얼라인은 카카오 측을 지지하며 '주주 중심 경영'을 내세웠다. 그 결과 SM은 이수만과 라이크기획과의 계약을 조기 종료하게 됐다. 얼라인의 적극적 행동에 따라 1대 주주가 경영 일선에서 밀려난 것이다.
英 행동주의, LG화학에 “주가 저평가 심각”
LG화학도 최근 행동주의펀드로 인해 곤욕을 치렀다. 영국계 헤지펀드 팰리서캐피털이 "LG화학 주가가 심각하게 저평가돼 있다"며 이사회 구성 개선, 수익 배분, 자사주 매입, 주가 저평가 관리 프로그램 시행 등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팰리서는 △이사회 구성을 개선하고 주주 이익에 부합하도록 경영진 보상 제도 개편 △수익률을 지향하는 강력한 자본 배분 체계 시행 △회사가 보유한 LG에너지솔루션 지분을 활용해 자사주 매입 실시 △기한을 두지 않는 장기적인 디스카운트 관리 프로그램 시행 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팰리서 설립자 겸 CIO(최고투자책임자)인 제임스 스미스(James Smith)는 “LG화학의 현재 시가총액이 140억 달러(약 20조원)에 이르지만 본래 가치는 530억 달러(약 76조원)로 큰 격차를 보이고 있다”며 “이는 LG화학의 기업 지배 구조에 대한 신뢰 부족과 주주와의 이해관계 불일치, 부실한 자본 배분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투자자들이 LG화학의 강력한 배터리 사업을 간과한 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석유화학 기업으로만 인식하고 있어 주가가 할인된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고 짚었다. 팰리서에 따르면 LG화학 주식은 현재 국내 대기업 가운데 가장 저조한 수준인 NAV(순자산가치) 대비 74% 할인된 상태로 거래되고 있다. 현재 약 69조원에 달하는 가치 할인이 있다는 지적이다.
팰리서는 앞서 SK스퀘어에 대한 주주행동에 나서기도 했다. 지난해 팰리서는 SK스퀘어에 이사회 구성원 추가, 임원 급여 회사 실적 연계, 부채를 활용한 자본 비용 절감 등을 제안하며 강하게 압박했다. SK스퀘어의 주가가 저평가돼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에 팰리서는 SK스퀘어에 더 많은 자사주 매입과 투자 확대 등을 요구했는데, 이후 SK스퀘어의 주가가 급상승하자 모든 지분을 팔고 떠났다. 국내 재계에서 팰리서를 향해 '먹튀 자본'이라는 평가를 내리는 이유다.

잠재 타깃 수두룩, 지배력 분산·인색한 환원이 특징
행동주의펀드가 활개를 치면서 행동주의 방어를 위한 법률 자문 서비스도 증가하고 있다. 율촌과 태평양은 올해 각각 '기업지배구조센터'와 '거버넌스 솔루션 센터'를 출범했다. 지평도 기존의 경영권 분쟁 대응센터를 확대 개편해 행동주의펀드의 주주권 행사 등 변화하는 자본시장 환경에 따라 기업이 직면할 수 있는 다양한 리스크를 지원하고 있다. 특히 행동주의펀드의 주주 제안과 주주 관여에 관한 법적 대응 방안에 대해 실제 자문을 진행하고 있으며 근본적인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한 연구도 병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주주총회를 대비해 법적·회계적 논리를 제공하면서 파생 자문 일감까지 노리는 양상이다.
한 법무법인 파트너 변호사는 "한국의 경우 당장 행동주의 방어 영역에서 큰돈을 벌기 어려울 수 있지만 행동주의 방어는 의사결정권자인 오너나 경영진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고, 이는 다른 굵직한 자문 수임으로 이어가는 데 유리하다"며 "해외 주주 비중이 높은 기업은 '대외 여론전'에서 로펌의 도움을 받고 만족감을 표하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또 다른 변호사는 "일본의 경우 3~4년 전만 해도 행동주의 방어가 필요하지 않다는 의견이 많았는데 작년 캠페인이 크게 늘어나면서 자문 수요가 많아졌다"며 "오너의 경영권이 취약한 기업이 많은 한국에서도 행동주의 방어 일감이 많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기업들이 주가 관리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방안만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입을 모은다. 시장에서는 행동주의 타깃이 될 기업 특징으로 크게 세 가지를 꼽는다. 첫째, 낮은 대주주 지분율이다. 대주주 지분율이 50% 미만인 경우, 소액주주와 기관 투자자가 연대해 주주총회에서 주주 제안을 가결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둘째, 주주환원율(배당과 자사주 매입 규모를 순이익으로 나눈 비율)이 낮은 기업이다. 주주환원율이 높을수록 기업이 벌어들인 이익을 주주에게 더 많이 나눠준다는 의미다.
통상 주주환원율 30% 미만인 기업은 경영진이 주주 가치 제고를 등한시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특히 자기자본이익률(ROE)이 일정 수준 이상 유지되는 등 기업이 안정적인 실적을 내고 있음에도 배당 성향이 낮거나 자사주 매입·소각이 미진하다면, 행동주의펀드가 이를 명분으로 공격을 개시할 공산이 크다. 행동주의펀드 입장에서는 “주주가 납입한 자본으로 충분한 이익을 내고 있으면서 과실을 나눠주지 않는다”는 명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가치주 성향이 강한 기업도 물망에 오른다. 높은 자산 가치에 비해 극도로 저평가된 가치주는 행동주의펀드가 개입할 명분을 제공하기 쉽다는 평가를 받는다. 기업들이 손 놓고 있을 때가 아니란 의미다.
앞서 팰리서는 LG화학 캠페인에 나서면서 한국 대기업 이사들은 경영 전문성과 자본 배분 경험이 부족한 학계 출신 인사들로 구성돼 있다고 꼬집었는데,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과거 사외이사들은 학계, 법조, 관료 출신이 대다수를 차지했고 ‘거수기’ 비판을 받았다. 이는 독립적인 경영, 금융, 회계 전문가를 기용하는 선진국 기업들과 대조를 보인다. 이에 한 IB 고위 관계자는 "기업들의 밸류업이 지지부진할 경우 장차 외국계 펀드들이 상법 개정을 등에 업고 줄줄이 공세를 퍼부을 수 있다"며 "상장사들은 지배구조 개선에 각별한 노력을 쏟아야 한다. 행동주의펀드들이 한국 증시를 휘젓고 다니도록 판을 깔아줘선 안 된다"고 일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