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안보 위협’에 화웨이 퇴출 법제화 추진, 글로벌 통신장비 시장 재편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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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집행위, 역내 통신망서 단계적 퇴출 압박 법적 구속력 확보 시 위반 국가에 제재 가능 영국·스웨덴 이미 퇴출, 이탈리아·그리스 등도 퇴출 불가피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전체 회원국 통신망에서 화웨이 등 중국산 장비를 법적으로 퇴출시키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이는 EU 집행위가 5년 전 ‘통신망에서의 고위험 공급 업체 사용 중단’에 관한 권고를 법적 구속력을 갖춘 규정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중국은 EU의 두 번째 교역 상대국이지만 유럽 내부에서는 중국 정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기업에 중요 인프라 관리를 맡기는 것은 안보상 이익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가 확산하고 있는 상황이다.
‘中 통신장비 사용 중단’, 권고에서 법적의무로 전환
11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헨나 비르쿠넨(Henna Virkkunen) EU 집행위 기술주권·안보·민주주의 담당 및 수석부집행위원장은 회원국의 이동통신망(mobile network)에서 고위험 공급업체의 장비 사용 중단을 법제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이는 사실상 대중국 규제를 목표로 하는 것으로, EU 회원국이 초고속 인터넷 접근권 확대를 위해 설치 중인 첨단 광대역망과 5세대 이동통신(5G) 핵심 인프라에서 중국산 장비 사용을 제한한다는 구상이다.
EU 집행위는 지난 2020년 5G 보안 강화 조치로 화웨이 등 중국 업체를 고위험 공급업체로 분류하고 회원국에 의존도를 낮추라 개입한 적이 있으나, 당시엔 권고 사항이었을 뿐 강제성은 없었다. EU에서 현재 통신 인프라와 관련한 명목적인 결정권은 아직 각 회원국 정부에 있다. 하지만 이번 계획이 채택되면 회원국은 집행위 보안 가이드라인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규정을 따르지 않으면 EU 법을 지키지 않았을 때 개시되는 제재 절차인 ‘위반 절차’가 가동되고 재정적 제재가 뒤따를 수 있다.
나아가 EU 집행위는 중국 업체 장비를 사용하는 개발도상국의 경우, EU 차원에서 각종 인프라 구축 자금을 지원하는 ‘글로벌 게이트웨이(Global Gateway)’ 사업의 지원을 제한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글로벌 게이트웨이는 EU가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BRI, 육상·해상 실크로드)에 맞대응하려고 수립한 전략으로, 개발도상국의 통신 인프라 지원에 있어서도 중국 장비 배제 조건을 적용하려는 움직임으로 풀이된다.
중국발 안보 위협 고조
EU의 대중국 규제 강화는 국가 주요 기반시설이 중국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기업 통제 아래 놓일 경우 안보에 위협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최근 중국과의 무역·외교 관계가 경색되면서 EU 내부에서는 국가 핵심 인프라가 중국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가진 기업의 영향권 아래 놓이는 것은 안보를 위협하는 사안이라는 우려가 강하게 대두됐다. 특히 5G 네트워크 보안은 EU 경제의 핵심 요소라는 점에서 회원국에 위험 제거 조치를 신속히 촉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여기엔 수년간 이어진 퇴출 압박에도 화웨이의 시장 점유율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 점도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에 따르면 화웨이는 지난해 전 세계 통신장비 시장에서 매출 기준 점유율 1위(31%)를 차지했다. 중국 ZTE와 합산하면 점유율은 42%에 육박한다.
중국 업체들의 유럽 시장 점유율도 상당하다. 중국 장비가 서방 기업 제품보다 저렴하고 성능이 우수하다는 이유에서다. 특히 EU 내에서 경제 규모가 가장 큰 독일 5G 장비의 중국 점유율은 2023년 기준 59%에 달했다. 이 같은 점유율 확대에는 화웨이의 지속적인 로비 활동도 한몫했다. EU 투명성등록부(EU Transparency Register)에 따르면 화웨이는 EU 관련 로비 예산을 가장 많이 지출하는 기업 중 하나다. 지난 4월엔 일부 유럽의회 의원들이 화웨이의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이 일어 EU 집행위가 화웨이 관계자들에 대한 접근금지령을 내리는 일까지 발생했다.

대중국 견제 움직임 확대 전망
EU 집행위에 따르면 현재 회원국들은 화웨이 통신 장비를 배제하는 법안을 마련했지만 27개국 중 10개국만 제재를 따르고 있는 상태다. 또한 제재에 동참한 10개국에서도 화웨이 장비 철거 작업이 지지부진하게 이뤄지고 있다. 이는 유럽 지역 내 5G 구축이 저조하다는 불안감이 있기 때문이다. 현지 매체인 유로뉴스에 의하면 현재 이탈리아, 폴란드, 포르투갈, 오스트리아, 스페인, 그리스 등은 중국 5G 장비를 지속해서 구매하고 있다. 반면 영국, 덴마크, 스웨덴,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루마니아 등은 5G 네트워크 시장에서 화웨이를 퇴출시킨 상태다. 독일은 2026년과 2029년 2단계에 걸쳐 중국 5G 장비를 퇴출할 예정이다.
업계는 EU의 이번 화웨이 퇴출 법제화가 완료될 경우 중국 업체에 대한 글로벌 차원의 견제 움직임이 더욱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미국이 상황에 따라 보복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만큼 각국이 우호적 대미 관계를 유지·강화하려는 흐름도 어느 정도 작용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실제 최근 들어 중국 장비 견제를 위한 국제 공조가 한층 강화되는 분위기다. 영국 주도로 미국·일본·호주·캐나다 등이 참여한 GCOT(Global Coalition on Telecommunications, 다자협의체)는 지난해 10월 출범해 6세대 이동통신(6G) 인프라 개발 등에서 중국 장비 의존 리스크를 낮추기 위한 협력을 이어가고 있다.
이 같은 대중 전략의 중심엔 오픈랜(OpenRAN·개방형무선접속망)이 자리하고 있다. 기존 무선접속망(RAN)은 장비 간 인터페이스(API)가 폐쇄형으로 구축돼 특정 제조사 장비만 연동되는 구조였다. 이로 인해 통신사들은 1~2개 벤더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고 화웨이가 시장을 장악한 배경도 이 구조와 맞닿아 있었다. 하지만 오픈랜은 장비 간 인터페이스 규격을 통일해 서로 다른 제조사 장비를 연동할 수 있게 해, 유럽에서 중국 업체의 의존도를 낮출 수 있다. 소수 제조사가 독점해 온 무선망 시장의 생태계를 확장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특정 국가 장비에 대한 의존도를 완화하고 자국 기업 참여 유도를 통해 기술 주권도 강화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