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러시아 동결자산 대출’ 구상, 주변국 반발·러시아 협박에 진퇴양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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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러시아 동결자산 우크라 대출' 추진 벨기에 "2차 대전 때도 독일 자산 몰수 안 해" 반발 日도 '동결자산 활용' 거부, G7 회의서 법적 우려 제기도

유럽연합(EU)의 우크라이나 배상금 대출(Reparation Loan) 구상이 수개월째 공전하고 있다. 독일·프랑스·네덜란드·덴마크를 비롯한 주요 EU 회원국은 배상금 대출 계획을 지지하고 있지만, 러시아 동결자산 대부분을 보유한 벨기에와 미국 눈치를 살피는 일본의 반대에 부딪쳐 여전히 최종 확정 단계에 도달하지 못하는 형국이다. 여기에 러시아도 강경한 보복을 경고하고 있고, 유럽중앙은행(ECB)마저 재정 조달 금지 조약 위반 가능성을 이유로 최종 보증 역할을 거부하고 있어 구상 추진에 난항이 가중되는 모양새다.
폴란드·스웨덴 등 EU 7개국 "러 동결자산 대출, 신속히 추진하라"
10일(이하 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최근 7개 EU 회원국(에스토니아·핀란드·아일랜드·라트비아·리투아니아·폴란드·스웨덴은)은 동결된 러시아 자산을 담보로 우크라이나에 대규모 자금을 지원하는 EU의 배상금 대출 계획을 신속히 추진(move ahead quickly)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야망이 우크라이나를 넘어 유럽 안보를 위협하고 있는 만큼 EU 내 동결된 러시아 자산의 현금 잔액으로 자금을 조달하는 배상금 대출에 대한 EU 집행위원회의 제안을 강력히 지지한다는 입장이다.
앞서 우르술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지난 3일 EU 역내에 동결돼 있는 러시아 자산 중 900억 유로(약 155조원)를 활용해 우크라이나에 대한 배상금 대출을 실행하는 구상을 제안했다. 배상금 대출은 우크라이나가 전후 러시아로부터 전쟁 배상금을 받아야 상환 의무가 생기는 대출로, EU는 러시아 동결자산을 담보로 자금을 조달해 우크라이나에 무이자로 빌려주게 된다.
러시아 동결자산은 전 세계적으로 2,740억 유로(약 471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유럽에는 총 2,100억 유로(약 360조원)의 러시아 자산이 동결돼 있으며 이 중 벨기에 중앙예탁기관(CSD)인 유로클리어(Euroclear)에 묶여 있는 자산은 1,850억 유로(약 318조원) 정도로 파악되고 있다. 나머지는 프랑스 등 다른 회원국에 분산돼 있다. 유럽은 동결자산을 초저위험 상품에 넣어놓고 이자 수익으로 우크라이나를 지원해 왔다. 2025년 1월부터 7월까지 송금액만 110억 유로(약 19조원)에 이른다. EU 외 국가로는 일본에 300억 달러(약 45조원)가, 그 외 미국과 영국, 캐나다 등에도 러시아 동결자산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벨기에, 러 보복 우려해 반대 입장, 미국 눈치 보는 일본도 거부
그러나 동결된 러시아 자산 대부분이 속한 벨기에가 대출 구상을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EU가 러시아 자산을 활용할 경우 향후 자신들이 법적 책임을 떠안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더 베버르(De Wever) 벨기에 총리는 "나쁜 사람에게서 훔쳐 좋은 사람에게 주는 것은 멋진 생각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다른 나라의 동결자산을 몰수한 적은 없다"며 "심지어 2차 세계대전 중에도 우리는 독일의 돈을 몰수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어 "전쟁 중에는 자산을 동결할 수 있고, 마지막에는 패전국이 승전국에 피해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보상해야 한다"며 "하지만 러시아가 패할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동화 같은, 완전한 환상"이라고 꼬집었다.
다만 논의 과정에서 벨기에는 EU 회원국이 아닌 주요 7개국(G7) 회원국도 자국에 동결된 러시아 자산을 활용해 우크라이나에 대출을 제공해야 한다는 요구를 내걸었다. G7 국가가 참여하면 러시아가 벨기에를 상대로 단독 보복에 나설 위험이 줄어든다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G7 회원국 중 하나인 일본도 배상 대출 방안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일본은 지난 8일 열린 주요 G7 재무장관 회담에서 배상금 대출 방안을 따라 달라는 EU의 요청에 거부 의사를 밝혔다.
일본 정부의 거부는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입장과 연결돼 있다. 지난달 공개된 28개항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종식 구상 초안에는 동결 러시아 자산 중 1,000억 달러(약 147조원)를 우크라이나 재건·투자 사업에 사용하고, 수익 50%를 미국이 가져간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는 유럽의 구상과 불일치하는 제안으로, 일본은 중요한 동맹국인 미국을 거스르고 싶지 않아 한다. 그간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러시아 압류 자산을 활용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려는 의도를 시사해 왔다.

러 "동결자산 손대면 절도", 전쟁 종결 지연될 수도
게다가 러시아도 EU의 계획이 자산 몰수에 해당하며 '도둑질'이라고 강력 반발하고 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은 최근 텔레그램에 올린 글에서 “EU가 벨기에에 동결된 러시아 자산을 성급하게 도둑질하려는 시도는 국제법 위반이며, 개전사유(casus belli)가 된다”고 엄중 경고했다. 세르게이 네차예프 독일 주재 러시아 대사도 5일 "러시아의 동의 없이 러시아의 국유자산을 활용하는 어떤 활동이라도 절도에 해당한다"며 "러시아 국유 자산의 절도는 광범위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밝혔다.
네차예프 대사는 AFP에 보낸 성명에서 러시아의 동결자산에 손을 대는 방안을 "전례 없는 조치"라고 지적하며 "EU의 비즈니스 평판을 훼손하고 유럽 국가 정부들을 끝없는 소송으로 밀어 넣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이는 법적인 난장판, 글로벌 금융 시스템의 토대 파괴로 이어질 것이며 주로 EU를 강타할 것"이라면서 "벨기에와 독일이 이 점을 이해하고 있다고 확신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아울러 러시아의 동결자산을 우크라이나를 제공하겠다는 유럽의 계획은 우크라이나를 계속 지원하는 데 필요한 '상당한 자원'을 유럽이 갖고 있지 못하다는 방증이라고 조롱했다.
유럽중앙은행(ECB)도 동결자산 활용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 이달 초 복수의 EU 관계자들에 따르면 ECB는 EU 집행위로부터 우크라이나를 위한 배상금 대출의 최종 보증 역할을 해줄 수 있는지 문의받은 뒤 내부 검토를 거친 뒤 이런 방안이 불가능하다고 통보했다. ECB는 중앙은행이 회원국의 재정 의무를 떠안게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유럽 집행위원회의 제안은 사실상 정부를 상대로 한 직접적인 재정 지원과 같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ECB는 배상금 대출 제안은 통화적 재정 조달(돈을 찍어서 정부에 자금을 주는 행위)을 금지하는 EU 조약을 위반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검토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EU는 중앙은행이 자산을 활용해 정부의 재정지출을 직접 지원하면 인플레이션이 악화하고 중앙은행의 신뢰가 하락한다는 이유로 이런 방식의 지원을 금지하고 있다. 외교안보 전문가들도 유럽이 러시아 동결자산 원금에 손을 댈 경우, 러시아로부터 보복 조치를 당하거나 법적 분쟁에 휘말릴 수 있는 데다, 오히려 전쟁 종결을 더 지연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 우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