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유럽 관계 ‘사상 최악’ 국면, 80년 대서양 ‘가치 동맹’ 파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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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2기 NSS가 그린 새 국제질서 지도 "EU는 문명적 소멸 단계" 맹폭격 미, 자국 이익 중심 고립주의 공식화

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새 국가안보전략(NSS) 보고서를 통해 유럽연합(EU)을 '문명적 소멸(civilizational erasure)' 위기에 처한 집단이자, 미국의 국익을 갉아먹는 경쟁 세력으로 규정해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80년간 서방 세계를 지탱해 온 '가치 동맹'의 공식적인 해체를 의미한다. 이로써 안보·외교·가치의 삼각축이 동시에 흔들리고 있는 유럽은 방위 공백과 정치적 고립이라는 이중 압박에 직면했다. 이는 트럼프식 압박 외교의 연장선이자, 유럽이 장기간 방치해 온 내부 취약성이 외부 충격과 결합해 폭발한 결과로 평가된다.
"유럽은 자유 훼손하는 적(敵)" 백악관, 적대감 공식화
11일(이하 현지시간)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의 적대적인 안보전략 발표 이후 미국과 유럽의 관계가 사상 최악의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앞서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 5일 발표한 새 NSS에서 미국의 오랜 동맹인 유럽이 “문명의 소멸이라는 엄혹한 전망”을 맞고 있다고 규정했다. 유럽이 고유의 가치를 잃은 채 그릇된 길로 가고 있으므로 현 궤도를 수정할 수 있도록 미국이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 NSS 유럽 부문의 주요 골자다.
트럼프 행정부는 '유럽의 위대함 제고'라는 NSS의 한 파트를 유럽 국가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데 할애했다. 개방적 이민 정책과 과도한 규제 등으로 유럽 국가들의 국가 정체성이 훼손되고 있으며, 국제사회에서 유럽의 존재감도 미미한(unrecognizable) 수준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 미국 정부의 시각이다. NSS는 “우리는 유럽이 유럽적인 상태로 남길 원한다”면서 문명적 자긍심을 회복하고 실패한 숨 막히는 규제를 철폐할 것을 촉구했다. 현재 추세가 지속할 경우 유럽이 신뢰할 만한 동맹국으로 남을지 불확실하다고도 했다.
이는 J.D 밴스 부통령이 지난 2월 뮌헨안보회의에서 “독일의 주류 정당이 (극우 성향 정당인) 독일을위한대안(AfD)과 연립을 거부하는 건 민주주의에 역행한다”며 유럽 민주주의에 훈계를 늘어놓은 데 대한 확장판에 가깝다. NSS는 “애국적 유럽 정당들의 영향력 증대가 큰 낙관의 이유가 된다”며 “유럽 각국 내부에서 현재의 잘못된 흐름에 대한 저항을 북돋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미국의 목표는 “유럽이 현재 궤도를 바로잡도록 돕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같은 유럽 분열 전략은 러시아가 오랫동안 서방 세력에 대항해 시도해 온 전략이다. 이에 일부 전문가들은 미국이 러시아의 전략을 차용해 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미 역사학자 티머시 스나이더는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새 NSS는 러시아 국가 안보 문서에서 볼 수 있는 형식과 유사하다”며 “NSS가 러시아의 이념적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다”고 말했다. 실제 러시아는 이러한 미국의 변화를 반기고 있다. 마리아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은 "유럽 내 '전쟁 세력'에게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효과가 있기를 바란다"고 논평했다.

동맹 아닌 부담 대상으로 전락
전문가들은 유럽을 미국 전략 자산에 무임승차하는 존재로 판단해 온 트럼프 행정부의 인식이 이번 NSS로 공식화됐다고 분석한다. 미국 우선주의 노선에 있어 유럽에 대한 지원은 재정 부담만 된다는 인식은 트럼프 대통령의 강성 지지층인 ‘마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 전반에도 깔려있다. 밴스 부통령,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 등 트럼프 대통령의 측근들도 이 같은 주장에 힘을 싣는 발언을 공개 석상에서 줄곧 이어왔다.
양측 파열음은 우크라이나 전선에서도 불거진 바 있다. 미국은 유럽이 주도해 온 '우크라이나의 완전한 승리'를 "비현실적 기대(unrealistic expectations)"라고 일축했다. 이는 미국이 더는 우크라이나의 영토 수복을 돕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미국은 이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지도국으로서 러시아를 억제하던 역할을 내려놓고, 러시아와 EU 사이의 '심판' 또는 '중재자'를 자처하며 발을 빼는 모양새다.
여기에 방위비 압박이 정면으로 겹친다. 헤그세스 장관은 한국·폴란드·발트 3국의 국방비 확대 사례를 ‘모범 동맹’으로 지목하며 “미국은 이들에게 특별한 혜택을 부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반대로 “집단방위의 역할을 하지 않는 동맹은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며 유럽을 향한 경고를 분명히 했다. 그간 트럼프 대통령은 유럽 지도부를 “약하고 정치적 올바름에 매몰됐다”고 비판하며 우크라이나 대응부터 이민 통제 실패까지 연달아 문제를 제기해 왔다. 이는 이번 NSS가 지적한 유럽의 구조적 쇠퇴 진단과 정확히 맞물린다. 새로운 NSS가 전통적 대서양 동맹의 틀을 사실상 해체하고 유럽을 ‘스스로 지키고 스스로 지불하는’ 자립 블록으로 전환하도록 요구하는 전략적 전환점으로 평가되는 이유다.
빅테크 규제 갈등, ‘체제 전쟁’으로 비화
아울러 유럽에 대한 이번 메시지에는 미국 빅테크 보호 의도도 깔려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유럽은 그동안 미국 기업에 디지털서비스법(DSA)을 근거로 강경한 제재를 가해 왔다. 또한 유럽은 세계 최초의 포괄적 AI 규제법인 'AI법(AI Act)'을 통해 미국 빅테크 기업들의 독주를 막고 유럽의 '디지털 주권'을 지키려 하고 있다. 미국은 이를 미국 기업에 대한 부당한 탄압이자 표현의 자유 억압으로 규정했다. 유럽이 자국 디지털 산업 육성을 위해 미국에 불합리한 제재를 휘두르고 있다는 지적이다.
가뜩이나 유럽에 대한 불만이 가중된 상황에서 최근 EU가 X에 부과한 과징금은 기름을 부었다. EU 집행위원회는 지난 5일 X의 계정 인증 표시와 광고 정책이 DSA에 어긋난다며 1억2,000만 유로(약 2,060억원) 규모의 과징금 철퇴를 내렸다. EU 규제당국은 약 2년간의 조사 끝에 X가 DSA을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당국은 X가 인증 계정용 블루 체크마크를 기만적으로 설계하고, 광고 저장소의 투명성을 확보하지 않았으며, 연구자에게 필요한 공공 데이터를 제공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8일 백악관에서 열린 농업인 행사에서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나중에 전체적인 보고를 받은 뒤 말하겠다"면서 추후 대응 가능성을 시사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어 "유럽은 여러 일을 할 때 매우 조심해야 한다"면서 "우리는 유럽을 유럽으로 유지하길 원하지만, 유럽은 좋지 않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업계에서는 미국이 1974년 무역법 301조를 발동해 유럽산 제품에 보복 관세를 매기거나, 데이터 전송을 차단해 유럽의 디지털 산업을 고립시키는 방식으로 맞대응할 공산이 크다고 보고 있다.
외교 전문가들은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의 전통적 외교정책을 얼마나 급격히 재편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입을 모은다. 일각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평화를 유지하고 전 세계에 서구적 가치를 확산시켜 온 대서양 동맹 내 분열이 심화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영국 싱크탱크 채텀하우스의 카티아 베고 선임 연구원은 "그간 유럽 정상들은 인구 감소 리스크를 ‘손쉬운 이민 확대’로 봉합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치안·사회 통합·인재 양성 같은 국가 기초 체력이 동시다발적으로 약화되며 외부 충격에 취약한 상태로 전락했다"며 "유럽 지도자들은 이제 미국과의 정통적인 대서양 관계는 끝났다고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