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發 리스크에 호주 연료 수급 비상, 산업계 위기 속 정부 '고육지책' 쏟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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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할 길이 없다" 호주 에너지 공급망 붕괴 위기 연료 수급 불안으로 현지 산업계 곳곳에서 잡음 이어져 정부는 에너지 안보 확보·시장 충격 상쇄에 총력

호주의 연료 부족 문제가 나날이 심화하고 있다. 핵심 연료 공급국인 한국이 중동 분쟁의 영향으로 석유제품 수출 속도를 늦춘 가운데, 대체 수급처 확보에도 제동이 걸리며 에너지 공급망 전반이 휘청이는 양상이다. 전례 없는 혼란 속 자국 산업계가 막대한 충격에 휩싸이자, 호주 정부는 고유황유를 방출하고 디젤 연료의 환경 규제를 완화하는 등 활로 모색에 힘을 쏟고 있다.
호주 짓누르는 연료 공급난
25일(이하 현지시각)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크리스 보웬 호주 기후변화·에너지부 장관은 전날 의회에 최소 600개 주유소에서 일부 연료가 품절되는 현상이 발생했다고 밝혔다. 공급 부족이 발생한 주유소는 전체의 10% 수준으로, 인구 밀집 지역인 뉴사우스웨일스(NSW)와 빅토리아주에 집중적으로 위치해 있었다. 현재 호주 전체의 디젤 비축분은 단 30일 치에 불과하며, 휘발유 잔여 분량 역시 38일 치에 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같은 수급 불안이 발생한 근본적 원인으로는 호주 에너지 공급망의 구조적 취약성이 꼽힌다. 호주는 연료 수입 의존도가 특히 높은 국가로, 휘발유·경유·항공유의 3분의 2 이상을 해외에서 들여온다. 문제는 호주의 최대 연료 공급국인 한국이 지난 13일 석유제품 수출량을 지난해 평균 수준으로 제한하는 ‘수출 상한제’를 전격 시행했다는 점이다. 이에 더해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 이후 전 세계 석유 물동량의 20%가 통과하는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봉쇄되며 대체 공급처 확보마저 어려워졌다.
이런 가운데 현지 시장의 연료 수요는 오히려 폭증하고 있다. 호주 석유유통협회(ACAPMA)의 로완 리 최고경영자(CEO)는 블룸버그에 "전쟁 이후 연료 수요가 두 배로 증가했다"며 "가격 상승을 우려한 선제 구매가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그러나 호주 정부는 현재의 연료 부족 사태가 구조적인 공급 위기라기보다는 일시적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보웬 장관은 현 상황과 관련해 "재고가 부족한 경우라도 보통 24~48시간 내 보충된다"고 설명했다.
현지 산업계의 혼란
호주 내부에서는 정부의 이러한 입장에 대한 의구심이 좀처럼 가시지 않고 있다. 호주 산업계 전반에서 연료 부족으로 인한 충격이 가시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급난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업종은 호주 수출의 핵심 축인 광업계다. 광산탐사협회(AMEC)의 워런 피어스 CEO는 일부 주니어 광산업체들이 현장에서 사용 가능한 연료가 5일 치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연료 수급이 지연될 경우 즉각적인 생산 중단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경고다. 호주 광물위원회(MCA)의 타니아 콘스터블 CEO 역시 소형 광산과 탐사 업체들이 연료 공급과 가격 측면에서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호주의 광산 및 탐사 기업 블루캡 마이닝은 연료 확보에 차질을 겪은 끝에 조업을 축소하고 직원들을 귀가시키기도 했다.
가을 파종기를 앞둔 호주 농부들 역시 연료 및 비료 부족으로 신음하는 중이다. 군사적 분쟁이 발발한 중동 지역에는 카타르,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등 주요 질소 비료 생산국이 다수 위치해 있다. 현시점 걸프 인근에서 발이 묶여 출항하지 못하고 있는 비료 관련 화물은 110만 톤(t)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수급에 문제가 생기며 질소 비료 가격은 폭등했고, 호주를 비롯한 각국의 농가 운영비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치솟았다. 해미시 맥킨타이어 호주 전국농민연맹(NFF) 회장은 "연료와 비료 없이는 농업의 어떤 일도 이루어질 수 없다"며 파종 규모 축소가 결국 작물 생산량 감소와 식료품 가격의 변동성 확대로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현지 물류업계에서도 식료품 가격 상승에 대한 경고가 나오고 있다. 호주의 공급망·농식품 물류 전문가 엘리자베스 잭슨은 최근 호주 공영 방송 SBS Australia의 팟캐스트에 출연해 "식료품 가격 상승은 시간 문제”라며 "소비자들이 몇 주 안에 가격 인상을 체감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디젤 의존도가 높은 호주 물류업계 특성상 연료 가격이 상승하면 운송 비용 역시 증가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부담이 결국 소비자 가격에 전가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잭슨은 “호주 농장에서 나오는 제품들은 모두 디젤 차량으로 운반한다”며 “가장 기본적인 제품, 즉 가공 과정을 거치지 않는 신선한 과일과 채소에서부터 가공된 수출 식품까지 모두 이런 운송 시스템에 의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트랙터와 같은 식품 생산 과정에 필요한 기계화 측면에서도 디젤 의존도가 높다”고 덧붙였다.

호주 정부, 제재 완화로 사태 대응
호주 항공업계에도 비상이 걸렸다. 항공기에 쓰이는 제트연료는 여타 정유 제품보다 품질 기준이 까다롭고 변질 위험이 커 장기 비축이 어렵다. 시장에서 공급망 충격에 가장 취약한 연료로 꼽힐 정도다. 이에 따라 세계 각국은 중동 분쟁 발발 이후 자국 내 수요 충족을 위해 제트연료 수출 제한·금지 조치를 속속 시행 중이다. 제트연료의 상당 부분을 수입하는 호주 입장에서는 수급 난도가 대폭 상승한 셈이다. 이달 초 기준 호주의 제트연료 비축량은 32일분에 불과한 것으로 확인됐다. 현지 업계에서는 이 같은 흐름이 지속될 경우 당장 다음 달부터 호주 항공기의 정상 운항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산업계 곳곳에서 연료 부족으로 인한 잡음이 발생하는 가운데, 호주 정부는 에너지 안보를 위해 기존 시중 공급을 제한했던 고유황유(연료에 함유된 황이 2% 이상인 연료)를 잠정 방출하는 강수를 뒀다. 해당 조치는 지난 13일 발표됐으며, 이후 60일간 한시적으로 시행된다. 정부는 고유황유 방출을 통해 매달 약 1억 리터의 추가 연료 공급이 가능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는 호주 전역의 이틀 치 연료 사용량에 해당하는 규모다.
24일에는 의회를 통해 향후 6개월간 디젤의 인화점(Flashpoint) 기준을 기존 61.5℃에서 60.5℃로 낮추는 방안이 발표되기도 했다. 이는 호주보다 상대적으로 인화점 기준이 낮은 미국, 캐나다, 유럽 등에서 생산된 디젤을 신속하게 수입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25일에는 가격 담합, 허위 광고 등 불공정 거래 행위를 저지른 정유사·유통사에 부과하는 최대 벌금을 기존 5,000만 호주달러(약 520억원)에서 1억 호주달러(약 1,040억원)로 인상하는 법안도 도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