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폴리시] 더 오래 사는 사람이 두 번 이기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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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명은 건강이 아닌 기회의 문제 사회적 조건의 누적, 생애 갈라놓는 구조 격차를 키우는 것, 제도가 만든 선택
기사는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의 SIAI Business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SIAI 또는 그 소속 기관의 공식 입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대수명은 더 이상 개인의 건강 상태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소득과 자산, 직업과 주거 환경이 맞물리며 수명은 점점 사회적 결과로 드러나고 있다. 얼마나 오래 사느냐는 이제 단순한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적 기회를 얼마나 오래 누릴 수 있는지를 가르는 기준이 되었다. 수명이 긴 집단은 더 오랜 기간 노동하며 소득을 축적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사회적 네트워크와 영향력 또한 확대된다. 반면 수명이 짧은 집단은 불리한 조건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생애가 끝난다. 출발선의 격차가 유지된 상태에서 기대수명까지 짧아질 경우, 기회는 회복의 여지 없이 소진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대수명 격차는 단순한 건강 불균형을 넘어선다. 수명의 차이는 소득과 기회의 격차를 되풀이하며, 그 결과 불평등은 세대를 거쳐 구조로 고착된다. 기대수명 불평등이 오늘날 사회의 핵심 변수로 떠오른 이유다.
출발선이 만든 수명의 차이
기대수명 불평등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한 개인이 평생에 걸쳐 놓여 있던 사회적 조건이 시간과 함께 누적되며 형성된 결과다. 사회경제적 지위는 가족이 보유한 자산 규모와 교육 수준, 거주 지역, 유년기의 영양 상태와 학교 환경을 포괄한다. 이러한 요소들은 성인이 된 이후의 소득 수준과 직업 안정성, 주거 여건으로 이어지며 삶의 궤적을 규정한다. 이 조건들이 생애 전반에서 크게 변화하지 않을 경우, 기대수명 역시 개인의 선택이나 운이 아닌 구조의 산물로 나타난다.
실제 연구들 또한 세대 간 사회경제적 이동성이 낮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확인한다. 저소득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가 상위 계층으로 이동할 가능성은 제한적이며, 다수는 부모 세대와 유사한 소득과 직업 범위에 머문다. 출발선이 고정된 사회에서 수명 역시 예외가 되기 어렵다.
이 구조가 시사하는 바는 분명하다. 기대수명 격차는 불평등한 기회가 생애 전반으로 연장된 결과다. 교육이나 의료 접근성을 일부 개선하는 정책만으로는 출발선의 차이를 상쇄하기 어렵다. 조건이 누적되는 구조 자체를 건드리지 않는 한, 기대수명 격차는 유지될 수밖에 없다.

주: 40세 남성을 기준으로 사회경제적 지위(SES)를 백분위로 나눠 기대수명을 비교한 결과, 소득·자산·교육·직업·인지능력(IQ) 등 단일 요인보다 복합 지표가 훨씬 큰 수명 격차를 설명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겹칠수록 벌어지는 수명 격차
기대수명 격차는 단일한 요인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여러 사회적 조건이 겹쳐질수록 그 차이는 구조적으로 확대된다. 이 때문에 소득이나 교육 가운데 하나만을 기준으로 수명을 분석하면 실제 격차는 과소평가되기 쉽다. 그러나 소득, 교육, 직업, 자산을 함께 반영한 사회경제적 지표를 적용하면 기대수명 차이는 훨씬 선명해진다.
연구 결과 역시 복합적인 사회경제적 지표가 단일 변수보다 더 큰 기대수명 격차를 예측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여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교육 수준만 놓고 보면 격차가 크지 않아 보이지만, 여기에 소득과 직업 안정성, 자산을 함께 고려하면 수명 차이는 뚜렷하게 확대된다.
이러한 격차는 성인이 된 이후에 갑자기 형성되는 문제가 아니다. 차이는 성장 환경에서 이미 만들어진다.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산전 관리의 부족, 환경 오염에 대한 노출, 재정적으로 취약한 학교, 제한된 사회적 연결망을 동시에 경험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조건들은 이후 불안정한 일자리와 낮은 복지로 이어지며,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여지를 줄인다. 결국 기대수명 격차는 특정 시점의 사건이 아니라, 여러 층위의 불리한 조건이 시간에 따라 누적되며 형성된 결과다.

주:40세 여성을 기준으로 사회경제적 지위(SES)를 백분위로 나눠 기대수명을 비교한 결과, 소득·자산·교육·직업 등 단일 요인보다 복합 사회경제적 지표가 더 크고 일관된 수명 격차를 보여준다.
자산이 만드는 회복의 시간
부는 질병을 대하는 방식 자체를 바꾼다. 그 차이는 예방과 치료, 그리고 회복에 투입할 수 있는 시간에서 가장 먼저 드러난다. 자산을 보유한 가정은 조기 검진과 예방 치료, 지속적인 건강 관리에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질병이 발생하더라도 생활 수준을 유지한 채 전문의를 찾아 이동하고, 충분한 재활 시간을 확보할 여지가 있다. 치료 과정이 곧바로 생계 전반을 흔들지 않기 때문에 회복에 집중할 수 있다.
반면 저소득 가정의 상황은 다르다. 치료비와 생계비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고, 의료비 지출은 곧바로 부채로 이어진다. 그 결과 자산 매각이나 소비 축소가 뒤따르며, 유급 병가가 부족한 환경에서는 회복이 끝나기도 전에 일터로 복귀해야 하는 일이 반복된다.
이러한 조건의 차이는 결국 결과로 이어진다. 연구에 따르면 저소득 가정은 중대한 의료 사건 이후 재정적 파탄을 겪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비용 부담 때문에 진료를 미루거나 처방약 복용을 줄이는 선택도 흔하다. 이러한 결정은 단기적으로는 비용을 절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건강 악화로 이어져 수명을 단축시킨다. 반대로 지역사회 차원의 1차 의료 접근성 확대나 의료 부채 보호 정책이 마련될 경우, 저소득층의 건강 수명은 실제로 증가한다. 예방과 조기 치료의 효과가 가장 취약한 집단에서 더욱 크게 나타나는 이유다.
수명 격차 줄이는 정책 선택
기대수명 격차를 줄이는 일은 보건 정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는 구조적 경제 정책의 영역에 속한 문제다. 부유국에서도 저소득층과 고소득층 간 기대수명 차이는 최대 10년 이상 벌어진다. 팬데믹 이후 평균 기대수명은 다시 상승했지만, 회복의 과실은 고르게 분배되지 않았다. 증가분의 대부분은 소득 상위 계층에 집중됐다.
이러한 경향은 2019~2024년 기간 동안 교육 수준, 소득, 사회경제 집단별 기대수명을 분석한 기존 연구와 정부 통계에서 확인된다. 세금 자료와 사회보장 기록을 활용한 분석에서도 사망률 패턴은 일관되게 나타났다. 평균 수명이 회복되는 동안 격차는 줄어들지 않았고, 일부 집단에서는 오히려 확대됐다.
이 지점에서 정책의 역할은 분명해진다. 정책 선택에 따라 기대수명 격차는 완화될 수도, 반대로 심화될 수도 있다. 1차 의료 접근성 확대, 본인 부담 의료비 상한 설정, 유급 병가 보장, 위기 상황에서 가계 소득을 안정시키는 제도는 기대수명 격차를 줄이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반면 고가 치료 중심의 의료 체계나 민간 보험에 대한 세제 혜택에 의존하는 정책은 상위 계층에 더 큰 이점을 제공한다.
평균 기대수명만을 높이고 분포를 외면하는 접근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사회가 평등을 중시한다면, 소득뿐 아니라 수명에서도 유사한 경로를 제공해야 한다. 기대수명 불평등을 줄이는 일은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닌 사회가 감당해야 할 필수적인 정책 과제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Who Lives Longer Wins Twice: Why longevity inequality Is a Policy Emergency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스위스 인공지능연구소(SIAI)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