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러 통신망 사보타주’에 일본-EU 해저 케이블 동맹으로 방어, 북극해 새 루트 구축 협력도
‘중·러 통신망 사보타주’에 일본-EU 해저 케이블 동맹으로 방어, 북극해 새 루트 구축 협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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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통신 인프라 불안정성 심화 일본·EU, 보안 협력 및 공동 대응 체계 구축 가속 북극해 우회 루트 구축도 추진, 전략적 자율성 확보

글로벌 통신망과 해상 물류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지정학적 리스크가 고조되는 가운데, 일본과 유럽연합(EU)이 전방위적인 안보 협력 강화에 나섰다. 양측은 핵심 인프라인 해저 케이블의 보호를 위해 조기 탐지 및 복구 체계를 공동 구축하는 한편, 기존의 주요 해상로를 우회하는 북극항로 개척을 통해 전략적 자율성 확보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는 특정 국가의 해상 봉쇄나 파괴 공작 등으로부터 경제 안보를 보호하고, 글로벌 공급망의 유연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적 포석으로 풀이된다.
손상 케이블 조기 탐지 연구 합의
27일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EU와 일본 정부는 해저 케이블의 설치, 유지 등을 위한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양국 정부는 내달 열리는 양측의 디지털 파트너십 장관급 회의 공동 성명에 협의 결과를 반영할 예정으로, 케이블 절단이나 손상, 수상한 선박 접근 등을 염두에 두고 불법 행위의 조기 탐지와 복구, 유사시 대응에서 협력할 방침이다. 해저 케이블은 태평양과 대서양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 약 500개가 설치돼 있으며 총 연장 150만㎞에 이른다. 국제 통신의 99%를 담당하는 핵심 인프라로, 양국 협력이 현실화할 경우 일본과 유럽 간 통신 속도는 약 30% 향상될 것으로 예상된다.
EU는 해저 케이블을 전략적 안보 자산으로 규정하고 대응 수위를 끌어올리고 있다. EU 집행위원회는 보안 투자 확대와 ‘케이블 보안 툴박스’ 도입을 통해 감시·복구 체계를 통합하는 한편, 일본과의 협력을 통해 글로벌 데이터망의 복원력과 통제력을 동시에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 축을 이동시키고 있다. 일본 역시 해저 케이블을 국가 안보 핵심 인프라로 격상하며 대응 체계를 재편 중이다. 일본 정부는 자국 기업 지원과 설치·감시 역량 확대를 병행하며 독자적 운영 능력 확보에 나서는 동시에, EU와의 협력을 통해 보안 기준과 기술 연계를 강화하며 공동 대응 체계를 구축하는 데 한창이다.
일본과 유럽 모두 해저 케이블 분야에서 강점을 가지고 있다. 가장 큰 기업인 프랑스의 알카텔 잠수함 네트워크는 전 세계 시장 점유율 40%를, 일본 기업 NEC는 20%의 점유율을 보유하고 있다. 이 두 회사 외에도, 해저 케이블을 소유하고 이를 설치하고 유지하는 통신 사업자들도 협력 틀에 참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최근 비디오 및 인공지능(AI) 서비스 수요 증가로 인해 해저 케이블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일본은 북미와 아시아를 잇는 허브로, 많은 케이블이 일본의 해역을 통과한다.
러시아·중국 등 공격으로 빈번한 손상
양국 협력의 배경에는 글로벌 해저 케이블에 대한 절단 우려가 자리 잡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된 2022년 2월 이후 발트해 해저 케이블 손상이 빈번히 발생했다. 북유럽에 위치한 발트해는 상업 활동이 활발한 항로로, 러시아를 포함한 9개국이 연결돼 있다. 해저 통신 케이블을 훼손해 적대 국가의 통신망에 영향을 주는 건 사보타주(파괴 공작) 수법 중 하나다. 배가 닻을 해저까지 내려 끌고 지나가면서 케이블을 끊는 방식이다. 전 세계 자금 흐름의 99%가 해저 케이블을 거치기 때문에 물리적 공격은 금융 시스템의 안정성을 흔든다. 원유 수송로가 막히면 대체 항로라도 모색할 수 있지만, 해저 케이블이 손상되면 대안도 마땅치 않다.
EU 국가들은 특정 국가의 이름을 밝히진 않았으나, 러시아가 배후에 있을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서방 국가들은 이전부터 러시아 측이 서방의 우크라이나 지원을 막으려고 해킹과 기반 시설 방화 등 각종 사보타주를 동원한 '하이브리드' 전술을 쓴다고 주장해 왔다. 실제 2023년 북해 해역에서 러시아 첩보선이 해저 케이블과 가스관 등을 염탐하며 파괴 공작을 준비하다가 네덜란드 당국에 적발된 사실도 있다.
일본 인근인 대만 해역에서도 중국 선박에 의해 해저 케이블이 끊기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2024년 11월 중국 벌크선은 대만 해역에서 2개의 데이터 케이블을 절단했으며, 지난해 초에는 또 다른 중국 소유 선박이 대만 북쪽해안을 가로지르며 태평양 케이블을 손상했다. 서방 국가들과 대만은 해저 케이블 절단 해역에서 중국 화물선의 활동이 포착됐다는 점을 들어, 이런 상황이 중국의 ‘회색지대 전술’(실제 무력 충돌·전쟁으로 확대되지 않을 정도의 저강도 도발로 안보 목표를 이루려는 군사 행동)일 수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중국은 최근 몇 년 동안 대만 주변에서 전면전 수준은 아니지만 주권과 보안을 꾸준히 위협하는 회색 지대 작전을 강화해 왔다.
미국과 전쟁 중인 이란도 해저 케이블 절단 카드를 꺼내 들며 공격 수위를 높이고 있다.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IRGC)와 연계된 이란 반관영 매체 타스님통신은 22일(현지시간) ‘호르무즈 해협, 페르시아만 연안국 인터넷 케이블의 핵심 동맥’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만약 자연재해, 선박의 닻 투하, 해상사고, 혹은 고의적 행위 등 어떤 이유로든 해협의 주요 케이블 몇 개가 동시에 끊길 경우 ‘디지털 재앙’이 벌어진다”며 “인터넷은 심각한 단절이나 광범위한 장애를 겪게 되고, 일일 경제 손실은 수억 달러에서 수십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는 미국의 호르무즈 해협 역봉쇄에 대응해 이란군이 물류 봉쇄는 물론, 케이블을 끊을 수 있다는 경고로 읽힌다. 연안 국가들을 잇는 최소 7개의 해저 통신 케이블이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는데, 여기엔 아시아와 중동·유럽에 걸친 팰컨(FALCON)과 AAE-1, TGN-걸프, SEA-ME-WE 등 대형 해저 케이블도 포함되는 만큼, 일본과 유럽도 안전에서 자유롭지 않다.

북극해에서 새 길 찾는 일본과 유럽
일본과 유럽의 협력은 해저 케이블에 그치지 않는다. 양국은 북극해를 통해 북미를 경유해 일본과 유럽을 연결하는 신규 루트 구축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북극항로는 북극해를 통과해 아시아 대륙과 유럽을 잇는 항로로, 2개의 길이 있다. 하나는 아시아(태평양)에서 북아메리카 대륙 북쪽을 지나 서쪽으로 유럽까지 가는 북서항로, 다른 하나는 아시아에서 유라시아 대륙(주로 시베리아) 북쪽을 지나 동쪽으로 베링 해협까지 가는 북동항로다. 노르웨이 청년인 로알 아문센에 의해 1906년 북서항로가, 1920년 북동항로가 각각 처음 개척됐다.
러시아는 오래 전부터 북극항로를 포함한 북극권 개발에 눈독을 들여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011년 “북극은 세계 최대의 시장인 유럽과 아시아 태평양을 연결하는 가장 짧은 항로”라며 북극항로가 비용을 최적화할 수 있는 훌륭한 기회라고 주장한 바 있다. 러시아는 북극항로 연안 항해 및 화물 운송 등을 늘리기 위해 1년에 최소 2차례 상트페테르부르크와 극동 지역 항구를 오가는 정기항로를 개설하고 있다. 여기에는 선박이 원활히 드나들게 하기 위한 준설작업도 포함된다. 또한 러시아는 ‘천연자원의 땅’ 추코트카 개발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러시아는 이 지역을 북극항로의 해상 무역 관문으로 만드는 게 목표다.
영토가 직접 속하지 않은 중국도 2018년 ‘빙상 실크로드’ 프로젝트를 발표하며 북극항로 개척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빙상 실크로드는 북극항로를 활용해 중국과 유럽을 연결하는 해상 물류 루트를 구축하고, 이를 통해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육해상 실크로드)를 북극까지 확장한다는 국가 비전이다. 물론 북극항로가 단기간 내 기존의 중국~유럽 운송로를 대체하기엔 리스크도 있다. 북극항로는 해빙 변동과 급작스러운 기상 변화로 인한 예측 불가능성이 여전히 커서 정시성이 보장되기 힘들다. 그럼에도 북극항로는 기존의 운송로를 대체 혹은 보완할 수 있는 유력 대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일본과 EU 역시 이번 협력을 통해 신규 루트를 확보할 경우 전통적인 해상 운송로를 통과하지 않고도 물류를 주고받을 수 있게 돼 운송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하고 비용 절감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이는 글로벌 공급망의 유연성을 확보함과 동시에 에너지와 원자재 수급의 경로를 다변화해 특정 지역의 돌발 상황에 대한 대응력을 높이는 핵심 동력으로 작용한다. 지정학적 측면에서도 해당 항로는 전략적 의미를 지닌다. 새 항로가 안정적으로 가동될 경우, 일본은 남중국해와 대만해협을 경유하는 기존 해상 루트에 대한 의존도를 낮출 수 있게 된다. 이는 중국과 대만 간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거나 실제 충돌로 이어질 경우에도 일본이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수준을 상당 부분 완화시키는 요인이 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 목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