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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증세의 역설” 실리콘밸리 거물들 대이탈 조짐, 스위스와 대비되는 정책 셈법

“부자 증세의 역설” 실리콘밸리 거물들 대이탈 조짐, 스위스와 대비되는 정책 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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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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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의 사회적 책임을 자각하며 공정하고 균형 있는 시각을 최우선으로 합니다. 꾸준한 추적과 철저한 리서치를 바탕으로 사실만을 전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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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만장자세 역풍 시작된 캘리포니아
자산가들 ‘플랜B’ 확산 조짐, 세원 이탈 가시화 
부자 떠나면 국가도 손실, 분배보다 성장 택한 스위스

미국 캘리포니아가 억만장자세 도입을 추진하자 실리콘밸리 창업자들과 자산가들이 거주지 이전과 자산 분산에 속도를 내고 있다. 증세를 통한 세수 확대가 정치적 명분을 얻고 있지만, 과세 대상 자체가 이동할 경우 정책 효과가 약화될 수 있다는 지적도 커지는 상황이다. 스위스 유권자들이 최근 부자 증세안을 부결시킨 배경 역시 이러한 현실적 인식과 맞닿아 있다.

팔란티어 공동창업자 피터 틸, 아르헨티나로 이주 검토

31일(이하 현지시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피터 틸 팔란티어 공동창업자는 최근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1,200만 달러(약 180억원) 규모 저택으로 이주했으며 자녀들을 현지 학교에 등록한 것으로 알려졌다. 틸 가족이 머무는 곳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최고급 주거지인 팔레르모 치코 내 바리오 파르케(Barrio Parque)다. 이 지역은 각국 대사관, 재계 거물, 정치 엘리트들이 밀집한 전통 부촌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 내에서도 가장 폐쇄적이고 보안 수준이 높은 주거 권역으로 꼽힌다. 현지에서는 ‘아르헨티나판 빌리어네어스 로(Billionaires’ Row)’로 불린다.

틸은 아르헨티나 대저택 매입에 이어 우루과이 인근 토지까지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틸은 최근 수개월간 부에노스아이레스 현지 사회에도 적극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아르헨티나 최대 라이벌 축구 경기인 보카 주니어스와 리버 플레이트의 수페르클라시코를 직접 관람했고, 지역 체스클럽 토너먼트에도 참가해 3위를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권 접촉도 활발하다. 그는 지난 4월 대통령궁 카사 로사다에서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과 회동했으며, 이후 경제·규제개혁 관련 핵심 참모진과 연쇄 접촉을 이어간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현재까지 틸의 아르헨티나 이주는 ‘영구 이민’으로 확정된 상태는 아니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틸 가족은 아르헨티나에 거주 중이지만 미국 시민권을 유지하고 있으며, 아르헨티나 시민권 신청도 확인되지 않았다. FT 역시 틸의 체류를 “일시적 이전”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부유층이 생활권·교육권·투자거점을 동시에 옮기는 행보라는 점에서 단순한 해외 방문으로는 보기 어렵다는 데 의견이 모인다. 더욱이 틸의 아르헨티나 선택은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의 자유시장 실험과 맞물린다. 밀레이 정부는 급진적 재정 긴축, 규제 완화, 작은 정부 노선을 전면에 내세우며 남미 경제 정책의 통념을 흔들고 있다. 틸은 오래전부터 국가 권력의 비대화와 조세 압박에 비판적 태도를 보여온 인물이다. 그가 아르헨티나를 주목하는 배경 역시 정치적 성향의 일치와 함께, 고세율 관할권을 피하려는 자산가 특유의 위험 분산 논리가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억만장자세 부과하는 캘리포니아 탈출

실제로 틸의 이주를 자극한 직접적인 계기 중 하나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정치적 움직임이 지목된다. 최근 캘리포니아에서는 일명 ‘억만장자세(Billionaire Tax)’ 도입을 위한 주민발의안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억만장자세 도입을 추진해 온 전미 서비스노조 서부의료지부(SEIU-UHW)가 150만여 명의 서명을 받아내면서다. 주민투표 안건으로 올리기 위해서는 87만5,000명의 서명을 받아야 하는데, 올 초부터 진행한 서명 운동에서 기준을 훌쩍 넘는 실적을 냈다.

억만장자세는 캘리포니아에 사는 순자산 10억 달러(약 1조5,000억원) 이상 부유층이 자산 규모의 5%를 일회성 세금으로 내는 방식이다. 예정대로 추진할 경우 올해 1월 1일 기준 캘리포니아 거주자에게 적용된다. 서명 운동을 추진한 SEIU-UHW 측은 “억만장자세를 걷으면 세수를 1,000억 달러(약 150조원) 가량 확보할 수 있다”며 걷은 세금의 90%를 의료서비스, 10%는 공교육과 빈민층 식량 지원에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억만장자세를 지지하는 쪽은 자산이 개인의 성취면서도, 사회가 만든 인프라·제도·노동의 산물이란 점을 강조한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메디케이드’(저소득층 의료보험) 예산을 삭감하는 등 재정 위기 상황에선 부유층이 더 많은 세금을 부담하는 게 공정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반대론자들은 부유층만 겨냥한 예외적 과세를 받아들일 경우 조세 체계의 예측 가능성을 떨어뜨리고, 법적 안정성을 흔드는 선례가 된다고 우려한다. 소득이 아닌 자산에 과세하는 방식이 미 수정헌법 제16조가 규정한 ‘소득(Income)’의 개념을 벗어난다는 근거를 든다. 소득세는 벌어들인 소득에 대해서 세금을 물려야 하는데, 아직 실현하지도 않은 주식 등 자산에 대해 세금을 물릴 수 있느냐는 지적이다.

실리콘밸리가 있는 캘리포니아는 미국 50개 주 가운데 억만장자가 가장 많이 사는 곳이다.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억만장자만 200여 명으로 추산된다. 이렇다 보니 빅테크 창업자를 중심으로 반발이 거세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 1월 틸을 비롯해 팔머 러키(안두릴 공동창업자), 크리스 라슨(리플 공동창업자) 등이 비공개 메신저 시그널에 그룹 채팅방 ‘세이브 캘리포니아(Save California)’를 만들어 억만장자세 도입을 막기 위해 논의해 왔다며 “억만장자세가 실리콘밸리 거물을 하나로 뭉치게 했다”고 보도했다. 이들은 “억만장자세로 많은 혁신 기업이 캘리포니아를 떠날 것”이라며 “기업이 떠나면 증세는커녕 매년 1억 달러 이상 세금 손실이 발생한다”고 경고했다.

이미 시장에서는 탈(脫)캘리포니아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다. 가디언에 따르면 구글 공동창업자 래리 페이지는 지난해 캘리포니아 내 기업 45곳을 폐업·이전했다. 거주지도 플로리다주 마이애미로 옮겼다.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도 플로리다에 집을 샀으며, 세르게이 브린 구글 공동창업자는 억만장자세에 반대하는 시민단체 ‘더 나은 캘리포니아 건설’에 4,500만 달러(약 670억원)를 기부했다. 이밖에 트래비스 캘러닉 전 우버 CEO, 래리 엘리슨 오라클 창업자 등도 캘리포니아 부동산을 처분하고 다른 곳으로 옮길 계획을 언급했다.

캘리포니아는 주 소득세가 최대 13.3%다. 법인세도 8.8%로 높은 편이다. 반면 최근 빅테크가 눈길을 돌리는 플로리다·텍사스주는 주 소득세를 내지 않는다. 억만장자세에 부정적인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는 2024년 본사를 캘리포니아에서 텍사스 오스틴으로 옮겼다. 캘리포니아 조세재단은 억만장자 이탈과 그에 따른 경제적 파급 효과로 주 세수가 연간 35억3,000만~44억9,000만 달러(약 5조3,500억~6조8,000억원) 감소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스위스는 국민 80%가 ‘수퍼리치 증세’ 반대

현재 캘리포니아에서 벌어지는 논란은 부유세의 근본적 딜레마를 드러낸다. 증세를 통해 세수를 확보하려는 목적과 달리 과세 대상 자체가 관할권 밖으로 이동할 경우 세원 기반이 약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본 이동성이 높은 국가들은 이 같은 위험을 정책 결정 과정에서 중요한 변수로 반영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스위스다. 스위스는 오랜 기간 글로벌 고액자산가(HNW)와 패밀리오피스(FO)가 몰려드는 대표적 조세 안정 국가로 자리 잡아 왔다. 자산가 유입이 세수와 투자, 금융산업 기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제 구조를 갖춘 만큼, 스위스 사회는 고소득층 과세를 단순한 재분배 의제로만 다루지 않는다. 세율 인상이 자본 이탈로 이어질 경우 단기 세수 확대보다 장기 과세 기반 훼손이 더 클 수 있다는 판단이 정책 논의의 중심에 놓여 있다.

이 같은 인식은 최근 ‘슈퍼리치 과세안’ 국민투표에서도 확인됐다. 지난해 12월 초 치러진 국민투표는 찬성 21.7%, 반대 78.3%로 부결됐다. 스위스 23개 주 전체에서 반대가 과반이었고, 일부 주에서는 반대가 90%를 넘었다. 좌파 성향 청년사회주의자당(JUSO)이 제안한 이 법안은 5,000만 스위스프랑(약 970억원) 이상의 재산을 상속·증여할 경우 세금 50%를 물리는 내용이 핵심이다. 현재 스위스는 연방 정부 차원의 상속세가 없고 주별로 부과하고 있다.

법안 발의자들은 “법안이 통과되면 연간 60억 스위스프랑(약 11조6,000억원)을 거둬들여 부의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다”며 “기후 변화 대응을 위해 오염 물질을 더 많이 배출하는 부자들에게서 세금을 많이 걷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상위 300명의 자산이 8,335억 스위스프랑(약 1,615조원)에 이르는데, 80%가 노동 없는 상속에서 비롯됐다”며 “이런 막대한 재산은 기후에 악영향을 주는 투자, 전용기, 요트뿐 아니라 정치 권력 매수에 쓰인다”고 했다. 이에 연방 정부와 의회는 “세금을 인상하면 자산가들과 기업이 스위스를 떠날 것”이라며 “그렇게 되면 일자리가 위태로워지고 결과적으로 세수가 줄어든다”는 반론을 폈다. “지금도 전체 소득·자산세의 40%를 상위 1%가 부담하고 있다”는 사실도 제시했다.

‘억만장자의 천국’으로 불리는 스위스는 자산 규모 10억 달러 이상 부자가 100만 명당 9명 이상으로, 서유럽 평균보다 5배 많다. 군사·정치적으로 안정된 영세 중립국인 데다, 각종 세금은 대체로 각 주에 일임해 주별로 감세 경쟁이 벌어질 정도여서 자산가와 기업의 매력적 금융 투자처로 꼽힌다. 하지만 최근 들어 파격적 세제 혜택을 앞세운 두바이, 아부다비, 홍콩, 싱가포르 등과 전 세계 억만장자 유치를 놓고 경쟁하는 상황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들이 분배의 정의나 평등 같은 수사보다 국가 경제에 무엇이 궁극적으로 이익인지를 고려한 것이다. 앞서 스위스에선 2015년과 2023년에도 비슷한 부유세 법안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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