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테크] 유럽 에너지 위기, 수입 의존이 발목 잡는다
[딥테크] 유럽 에너지 위기, 수입 의존이 발목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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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의존 축소에도 공급망 취약성 지속 발전설비·저장시설 부족이 남긴 구조적 과제 에너지 안보 해법은 인프라 투자와 수입 대체
본 연구 기사는 유럽 경제 연구소 The Economy의 연구위원(Fellow)들이 작성한 The Economy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The Economy 또는 집필자의 소속 기관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2024년 기준 유럽연합(EU)의 에너지 수입 의존도는 57%에 달한다. 2022년 정점을 기록했던 가스 가격이 안정세를 보이고 있지만 유럽의 에너지 위기가 해소됐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다. 러시아산 파이프라인 가스 의존은 크게 줄었으나 그 자리를 글로벌 액화천연가스(LNG) 시장과 해상 수송로, 전력망 부담, 재정 지출 확대가 대신하고 있다. 에너지 소비의 절반 이상을 해외 공급에 의존하는 구조가 유지되는 한 유럽 경제는 국제 에너지 시장의 변동성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더 큰 문제는 위기 대응 방식에 있다. 유럽 각국은 에너지 가격 급등에 따른 가계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대규모 재정을 투입했지만 발전설비와 저장시설, 전력망 등 공급 기반 확충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취약계층 지원은 불가피한 정책 수단이었으나 에너지 안보를 강화하는 근본 대책이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보조금 중심 대응, 공급 기반 확충 지연
2021년부터 이어진 유럽 에너지 위기의 근본 원인으로는 단기 가격 안정에 무게를 둔 정책 기조가 꼽힌다. 유럽 각국 정부는 에너지 가격 급등에 따른 가계와 기업의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대규모 재정을 투입했다. EU 집행위원회에 따르면 EU의 에너지 보조금 지출은 2021년 2,130억 유로(약 375조원)에서 2022년 3,970억 유로(약 700조원)로 급증했으며 2023년에도 3,540억 유로(약 624조원)에 달했다. 유럽 싱크탱크 브뤼헐(Bruegel) 역시 유럽 각국 정부가 소비자 보호를 위해 수천억 유로 규모의 지원책을 시행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막대한 재정 지원이 공급 역량 확대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발전설비와 저장시설, 송배전망 등 핵심 인프라 투자는 상대적으로 더딘 흐름을 보였다. 보조금은 단기적으로 에너지 비용 부담을 낮추지만 발전소와 송전망, 저장시설 구축은 장기간 에너지 안보를 뒷받침한다.
실제로 위기 대응에 투입된 재원의 일부만이라도 인허가 절차 개선과 전력망 확충, 전략적 저장시설 구축, 안정적인 저탄소 전원 확보에 배분됐다면 유럽의 에너지 대응 역량은 지금보다 훨씬 강화됐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수요 감축 중심의 대응 역시 분명한 한계를 노출했다. 산업 생산 둔화와 가계 소비 축소로 가스 사용량은 감소했지만 이를 에너지 체계 안정성 향상으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난방비 부담으로 에너지 사용을 줄인 가계와 생산량을 축소한 기업은 공급 부족이 경제 전반에 상당한 비용을 초래했음을 보여준다.

러시아 의존 축소 이후의 과제
이와 동시에 유럽은 러시아산 가스 의존도를 낮추는 성과도 거뒀다. EU 이사회에 따르면 러시아산 파이프라인 가스 수입 비중은 과거 40% 수준에서 지난해 6%까지 감소했다. 그러나 공급 위험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러시아산 가스 의존은 줄었지만 국제 LNG 시장과 해상 운송망, 글로벌 에너지 가격 변동에 대한 노출은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 같은 구조적 취약성은 올해 중동발 지정학적 위기 과정에서 다시 드러났다. EU 집행위원회의 올해 봄 경제전망에 따르면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봉쇄되면서 전 세계 해상 원유 수송량의 약 15%, LNG 수송량의 약 20%가 영향을 받았다. 이에 따라 가스 가격은 단기간에 50%, 원유 가격은 65% 상승했다. EU의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1.1%에 머물렀고, 물가상승률은 3.1%로 높아졌다. 국제 에너지 시장 충격이 성장 둔화와 물가 상승 압력을 동시에 키운 셈이다.
독일 사례 역시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 공급 안정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방증한다. 문제는 탈원전 자체보다 원전을 대체할 전력 체계가 충분히 구축되지 않은 상태에서 안정적인 전력원을 빠르게 축소한 데 있었다. 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아질수록 전력망과 저장시설, 예비 발전설비의 역할도 커진다. 하지만 관련 기반 시설이 충분하지 않으면 태양광과 풍력 발전량이 감소하는 시기에 가스 발전 의존도가 다시 확대될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충분한 인프라 없이 추진되는 에너지 전환은 에너지 가격 변동성을 높이고 정부를 기후 목표와 가계 부담, 산업 경쟁력 사이의 딜레마로 내몰 수 있다.

공급 역량 확대한 아시아
반면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주요국은 에너지 안보를 국가 차원의 인프라 구축 과제로 접근했다는 점에서 유럽과 대비된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중국의 유틸리티 규모 태양광 설비 용량은 2024년 880기가와트(GW)를 넘어섰다. 같은 해 신규 설치된 태양광 설비는 277GW로 미국 전체 유틸리티 규모 태양광 설비 용량을 웃돌았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24년부터 2030년까지 중국이 3,207GW 규모의 재생에너지 발전설비를 추가 구축할 것으로 전망했다. 중국은 여전히 석탄 의존도가 높다. 그럼에도 태양광과 풍력, 원자력, 배터리, 초고압 송전망 등을 국가 안보와 산업 경쟁력을 뒷받침하는 전략 인프라로 규정하고 지속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실제로 올해 중동발 공급 불안이 확대되자 대만은 석탄 발전 가동을 늘렸고, 한국은 원전 발전량을 확대했다. 일본 역시 화력발전 비상 대응 체계를 점검하며 공급 안정성 확보에 나섰다. 국가별 정책 방향에는 차이가 있지만 위기 상황에 활용할 수 있는 발전설비와 저장시설, 송배전망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이는 에너지 안보가 위기 발생 이후의 대응보다 평상시 축적한 공급 역량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에너지 안보의 새로운 과제
결국 유럽의 과제는 수입 연료 의존도를 낮추는 데 있다. 에너지 싱크탱크 엠버(Ember)에 따르면 지난해 풍력과 태양광은 EU 전체 전력 생산의 3분의 1을 차지하며 화석연료 발전 비중 29%를 넘어섰다. 재생에너지 확대가 성과를 내고 있지만 수력과 풍력 발전량이 감소하는 시기에 수입 가스 의존도가 높아진다면 에너지 안보 문제는 계속 남게 된다. 이에 따라 유럽은 취약계층 보호를 위한 단기 지원은 유지하되 전력망 현대화와 국가 간 전력망 연계 확대, 대규모 저장시설 구축, 재생에너지 인허가 절차 개선, 안정적인 전력 공급원 확보 등 공급 역량 강화에 정책 역량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일각에서는 재정 부담 확대와 성장 둔화를 이유로 대규모 에너지 투자를 우려한다. 공급 확대가 기후 목표 달성을 저해할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안정적인 탈탄소 전력 인프라 확충은 에너지 안보 강화와 탄소 감축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수단으로 평가받는다. 에너지 위기 때마다 반복되는 대규모 재정 지출을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지금 유럽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자체 에너지 생산과 더 빠른 전기화, 안정적인 전력 공급 기반 확충, 그리고 지원 정책과 에너지 안보를 구분하는 명확한 전략이다. 위기 대응을 넘어 위기 발생 자체를 억제하는 준비 태세로의 전환이 시급하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Europe’s Energy Crisis Was Not Solved, Only Moved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The Economy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