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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트디즈니와 케이블TV업체 차터 커뮤니케이션스가 15시간에 걸친 협상 끝에 일주일간 이어진 디즈니 채널의 블랙아웃 사태를 종식시키기로 지난 11일(현지 시간) 합의했다. 이번 합의로 차터의 케이블TV 가입자는 디즈니 채널과 ESPN을 다시 시청할 수 있게 됐다. 차터는 지난달 기준 1,500만 명에 달하는 방대한 가입자 수를 자랑하는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스트리밍 서비스다.
디즈니 블랙아웃
ESPN의 라이브 스포츠는 미국인이 케이블 번들에 가입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로 꼽히며, 디즈니는 2019년 Fox의 엔터테인먼트 자산을 인수한 이후 콘텐츠 파워에 있어 주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달 말부터 차터의 유선 방송 스펙트럼 가입자는 ESPN을 비롯한 디즈니 채널을 시청할 수 없었다. 두 회사 모두 협상을 어렵게 할만한 칼자루를 쥐고 있어 상황이 단시간에 해결되기는 요원해보였다.
허나 디즈니도 오랫동안 블랙아웃(송출 차단)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차터는 기존 케이블 번들에서 막대한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으며, 비록 최근 감소세에 있지만 여전히 디즈니의 중요한 수익원이다. 게다가 디즈니의 스포츠 판권 가격은 고정돼 있기 때문에 판권을 극대화하지 못하면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 차터는 ESPN의 선형 구독자 기반에서 약 20%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다행히 양사의 갈등은 합의를 통해 양측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해결됐다. 그간 스트리밍 채널이 포함된 슬림형 패키지를 제공하는 데 있어 더 많은 선택권을 원해 온 차터는 이번 계약으로 차터는 이제 추가 비용 없이 더 슬림한 스펙트럼 TV Select 패키지에 디즈니+를 제공할 수 있게 됐으며, ESPN+는 더 높은 가격의 스펙트럼 TV Select Plus 요금제에서 이용할 수 있게 됐다.
출시를 앞두고 있는 소비자 직접 판매 서비스인 ESPN도 스펙트럼의 Select Plus에서 이용할 수 있다. 또한 스펙트럼의 선형 케이블 패키지는 디즈니의 포트폴리오에서 Baby TV, FXX, Nat Geo Wild, Freeform 등 시청률이 낮은 일부 채널을 차단할 수 있다. 그 대신 차터는 다양한 비디오 패키지 계층에 디즈니의 콘텐츠를 더 유연하게 제공하는 대가로 디즈니가 제안한 구독당 요금 인상분을 지불할 것으로 보인다.
케이블 vs 스트리밍
이번 계약은 단순한 두 거대 기업 간의 타협이 아니다. 업계에서는 케이블로 대표되는 미디어의 수구 세력과 스트리밍이라는 새로운 미디어의 반란 세력 간의 치열한 권력 투쟁이 시작됐다고 풀이한다. 그동안 미디어의 수구 세력은 오랫동안 방송과 광고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를 지켜왔다. 하지만 최근 변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면서 스트리밍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이에 케이블과 위성 같은 전통적인 방송 매체 업계에서는 대한 불안감이 상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디즈니와 차터의 이번 계약은 지난 11일 ESPN의 '먼데이 나이트 풋볼' 방송 직전에 체결됐다. 뉴욕 제츠와 버팔로 빌스의 시즌 개막전인 이 미식축구리그(NFL) 경기는 특히 쿼터백 애런 로저스가 그린베이 패커스를 떠난 후 제츠에서 처음 출전하는 경기로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됐다. 하지만 차터의 가입자들은 자칫 해당 중계를 놓칠 수 있는 상황에 놓여져 있었다. 사실 디즈니와 차터 모두 파국을 원치는 않았다. NFL 경기 중계가 불발될 경우 시청자들의 불만이 극에 달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디즈니와 차터 간의 불화의 핵심은 송신료(Carriage fee)였다. 케이블TV 제공업체가 채널 배포를 위해 지불하는 이 수수료가 이번 분쟁의 분쟁의 불씨가 됐다. 디즈니의 수수료 인상 요구는 케이블TV 구독 취소가 잇따르는 가운데 스트리밍으로의 전환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차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차터는 지난 5일 긴급 기자간담회까지 진행하며 "디즈니가 비디오 생태계를 무너뜨리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윈프리 차터 CEO는 당시 간담회에서 "디즈니가 수익은 케이블TV에서 올리고 투자는 스트리밍에 한다"며 맹비난 했다.
궁지에 몰린 디즈니는 차터가 자신들의 막대한 콘텐츠 투자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디즈니는 해당 지출이 ESPN과 ABC와 같은 자산의 가치를 증폭시켜 가격 상승을 보장한다고 주장했다.
하이브리드 모델의 등장
마라톤 회의 끝에 양측은 결국 협상을 타결시켰다. 오랜 시간 싸워봐야 결국 득되는 쪽은 넷플릭스 등 글로벌 공룡 스트리밍 플랫폼일 게 뻔했기 때문이다. 계약 내용을 살펴보면 차터가 디즈니의 재전송료를 높이는 대신, 디즈니+, ESPN+ 등을 차터의 스펙트럼, 인터넷 고객들에게 무료로 제공하는 것이 골자다.
또 향후 디즈니가 내놓을 ESPN+ 서비스도 차터 고객들에게 무료로 서비스하기로 했다. 이는 양측 모두에게 이득이다. 차터는 디즈니 스트리밍 서비스 확보로 고객 이탈을 최소화할 수 있고 디즈니는 광고 모델 상품을 위한 잠재적인 고객군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 특히 광고 상품의 경우 최대한 많은 고객이 합류해야 더 많은 수익을 받을 수 있다. 밥 아이거 디즈니 CEO가 지적했듯이, 스트리밍 광고 시장은 유선 TV에 비해 날로 번창하고 있다. 또한 최근 분기에 디즈니+의 신규 가입자 중 40%가 광고 지원 요금제를 선택했다.
미국 방송 업계는 디즈니와 차터 협상을 숨죽이며 지켜봤다. 이를 실질적인 시장 변화의 신호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달러와 센트의 문제가 아니었다. 기존 방송에서 스트리밍으로의 시장 주도권 이동을 보여주는 과도기적 상황에 업계의 관심은 더욱 커졌다. 올해 차터가 디즈니에 지불할 것으로 예상되는 전송료는 무려 22억 달러(약 2조9,200억원)에 달하는 만큼 업계의 이해관계자들은 협상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번 합의가 향후 TV 재전송 논의의 표준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케이블 X 스트리밍'이라는 하이브리드 모델이 주목을 받으면서 레거시 미디어와 스트리밍 플랫폼 간의 협업은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지미 피타로 ESPN CEO는 월스트리트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지난 주말의 치열한 협상을 회상하며 특히 스포츠 방송에 필수적인 기존 유료 TV 모델에 대한 디즈니의 헌신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크리스 윈프리 차터 CEO는 “우리는 우리의 모든 목표를 달성했다"고 역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