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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주요 기업들 중국 자본 차단 선언
중국 대미 기술투자 감소세 돌입
AI 패권 놓고 ‘미·일 vs 브릭스’ 경쟁
미국 주요 기술기업들이 국가안보를 전면에 내세우며 중국을 비롯한 적성국 자본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나섰다. 정부의 행정명령만으로는 외국 자본의 자국 시장 잠식을 막을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글로벌 기술 산업이 신냉전 체제에 돌입했다는 평가가 줄을 잇는 가운데 미국은 일본과, 중국은 러시아와 손을 맞잡으며 경쟁 구도를 선명히 했다.
기업 떠받치는 자본 투명성 제고
23일(이하 현지 시각)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인공지능(AI)과 반도체 등 첨단기술 분야의 미국 투자회사 약 20곳은 최근 ‘클린 캐피털 인증(Clean Capital Certification) 이니셔티브’에 서명하고 중국과 러시아, 이란, 북한 등으로부터의 자금 조달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참여 기업으로는 일론 머스크의 xAI 투자사인 문샷캐피탈, AI 무기 제조업체 안두릴의 투자사 말린스파이크 파트너스, 스노우포인트, 스타우트 벤처스 등이 있다.
이번 인증을 주도한 비영리 단체 퓨처 유니언은 “많은 미국 기업이 중국 등과의 단절을 선언했지만, 그들의 기업을 떠받치고 있는 자본에 대한 투명성은 담보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며 “기술이 잘못된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권위주의, 잘못된 정보, 분열의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어 “정부의 국가안보기술 행정명령은 반도체나 AI 일부 분야에만 적용돼 외국 자본의 투자를 효과적으로 제한할 수 없다”고 움직임에 나선 배경을 밝혔다.
해당 소식이 전해지자, 중국 정부는 즉각 반발했다. 중국 상무부는 20일 공식 입장을 통해 “미국이 기술 패권주의로 글로벌 혁신 생태계를 훼손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결국 중국 정부는 홍콩과 싱가포르 소재 투자사를 통한 우회 투자 확대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 또한 인도와 아랍권 국가들을 경유한 투자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다만 이 같은 정부의 날 선 반응에도 중국의 대미 기술투자는 이미 감소세에 접어든 상태다. 글로벌 시장분석기관 로디움에 따르면 중국의 미국 기술기업 투자는 2016년 450억 달러(약 66조원)로 정점을 찍은 후 2022년에는 10억 달러(약 1조4,600억원) 미만으로 축소됐다. 러시아도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사실상 대미 투자를 중단한 상태다. 미국은 이런 자금 공백을 아랍에미리트(UAE), 사우디아라비아 공공투자기금 등 중동 자본으로 메우고 있다.
기업도 돈도 빠져나간 중국·러시아
중국이나 러시아에 기반을 두고 사업을 영위하던 미국 기업들도 줄줄이 떠나는 추세다. 대표적으로 중국 진출 40년 만에 사업 축소에 돌입한 IT 기업 IBM을 꼽을 수 있다. IBM은 지난 8월 중국 내 연구개발(R&D) 부문 철수를 발표했다. 베이징과 상하이, 다롄 등에 위치한 IBM 중국 연구소에는 약 1,600명의 중국인 직원이 재직 중이었다. 시장에서는 IBM의 중국 사업 축소를 두고 미·중 기술 경쟁과 지정학적 갈등, 중국 내 자국 제품 소비 선호 움직임 등이 복합 작용한 결과로 풀이했다.
유형의 실체가 없는 자본은 더 빠른 속도로 중국을 빠져나갔다. 중국 외환관리국(SAFE)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에 대한 외국인직접투자(FDI) 금액은 330억 달러(약 44조원)로 전년(1,802억 달러·약 240조원)과 비교해 82%가량 쪼그라들었으며, 2년 전인 2021년(3,441억 달러·약 458조원)과 비교하면 9.6% 수준에 불과했다. 2년 사이 중국에 대한 외국 자본의 투자가 10분의 1 수준으로 급감한 셈이다.
러시아도 상황이 비슷하다. 예일대 경영대학원 연구에 의하면 올 하반기 기준 러시아에서 546개의 외국 기업이 철수했고, 504개 기업이 영업을 중단했다. 주요 제재 분야인 IT, 항공, 자동차 분야의 기업 대다수가 철수했거나 영업을 중단한 상태이며, 이들 중 몇몇은 중앙아시아 등 인근 국가로 거점을 옮기기도 했다. 현재 러시아에 남아 사업을 계속 영위 중인 외국 기업은 식품, 소비재 등 극히 일부에 그친다.
내년 1월로 예정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재집권은 이러한 흐름을 가속할 전망이다. 트럼프 당선인은 이전 집권 당시는 물론 이번 선거 기간에도 적대국의 기술 탈취를 경계하는 태도로 일관하며 강도 높은 제재를 시사해 왔다. 이 때문에 트럼프 당선인의 선거 승리 이후 한 달간 중국에서는 2,346억 달러(약 340조원)의 외국 자본이 빠져나가기도 했다.
기술 산업 양극화 목전
전문가들은 이런 일련의 변화가 글로벌 기술 산업의 양극화를 부추길 것이라고 내다봤다. 서방 진영과 중국·러시아를 축으로 하는 기술 블록이 형성되면서 주변 국가들은 진영 선택을 강요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 같은 경향은 반도체와 AI 등 첨단기술 분야에서 두드러질 전망이다.
미국은 가장 먼저 일본에 손을 내밀었다. 지난 15일 트럼프 당선인은 플로리다에 위치한 자택 마러라고에서 손정의 소프트뱅크그룹 회장과 회동했다. 이튿날 함께 카메라 앞에 선 이들은 미국 AI 분야를 중심으로 1,000억 달러(약 146조6,000억원)를 투자하고, 10만 명의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선언했다. 트럼프 당선인과 손 회장은 8년 전인 2018년 12월에도 비슷한 선언을 한 바 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8년 전에는 500억 달러 투자와 5만 명 일자리 창출을 약속했다는 점이다.
8년 사이 AI 기술이 급진전을 이룬 만큼 이번 2차 동맹의 성공 가능성은 훨씬 높다고 업계는 보고 있다. 손 회장의 투자가 미국 내 AI 및 첨단 산업의 발전을 가속화하고, 미국 제조업의 부활을 앞당기는 촉매제 역할을 할 공산이 크다는 평가다. 특히 일본의 미국 직접투자가 지난해 말 기준 누적 7,833억 달러인 상황에서 1,000억 달러에 달하는 대규모 투자는 트럼프 행정부에 강력한 원군이 될 전망이다. 미국과 중국의 기술패권 경쟁에서 승부의 균형추가 미국으로 기울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러시아도 즉각 움직임에 나섰다. 러시아는 이달 초 중국, 브라질, 인도,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브릭스(BRICS) 회원국들과 손잡고 AI 기술 개발을 위한 국제 연합체 구성에 나섰다. 해당 연합체에는 브릭스 국가들의 AI 관련 협회와 개발 기관은 물론 세르비아, 인도네시아 등 비(非)브릭스 국가들도 참여를 검토 중이다.
러시아 정부는 AI 활용과 투자 확대를 통해 국가 경쟁력을 높이고, 2030년까지 전체 러시아 노동자의 80%가 AI 기술을 활용할 수 있도록 역량을 강화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AI 연합 네트워크가 이러한 비전을 실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란 기대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11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AI 기술 국제회의(AI Journey)에 참석해 “러시아는 글로벌 AI 경쟁에서 평등한 위치를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동맹국들의 적극적 참여와 지지를 독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