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수정
바이든, AI 반도체 수출 제한 범위 넓힌다 120여 개 국가 영향권, 美 기술 기업들 '불안' 캘리포니아주 'SB1047' 등 AI 규제 관련 충돌 이어져
미국의 기술 기업들이 조 바이든 행정부의 인공지능(AI) 반도체 수출 통제 강화 방침에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AI 반도체 수출 통제 범위가 전 세계로 확대되면 미국산 AI 반도체의 시장 경쟁력이 약화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일각에서는 바이든 행정부의 이 같은 수출 통제 조치가 오히려 중국 AI 산업의 성장을 돕는 '악수'가 될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美 AI 반도체 수출 통제, 전 세계로 확대
13일 IT 업계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은 최근 임기 종료를 앞두고 강력한 AI 반도체 수출 규제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해당 규제는 전 세계 국가를 3개 등급으로 분류하고, 차등적으로 미국산 AI 반도체 수출을 제한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한국·일본·대만·영국·프랑스·독일·캐나다·네덜란드 등 18개 우방국으로 구성된 '1단계 그룹'은 미국산 AI 반도체를 자유롭게 수입할 수 있다. 반면 중국·러시아·북한·이란·이라크·시리아 등 20여 개 적대국이 포함된 '3단계 그룹'은 수입이 사실상 전면 금지되며, 나머지 100여 개국은 반도체 구매량에 상한이 설정된다.
앞서 바이든 행정부는 지난 2022년 중국에 첨단 AI 반도체를 판매하지 못하도록 하는 규제를 도입한 바 있다. AI 기술이 국가 안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만큼, 신뢰할 수 있는 국가에만 고성능 반도체를 판매해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이후 바이든 행정부는 수차례에 걸쳐 수출 제한 범위를 넓혀왔으며, 지난해 12월에는 AI 연산을 보조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고대역폭메모리(HBM)의 중국 수출도 막았다. 바이든 행정부가 현재 추진하는 새 규제가 현실화할 경우, 이 같은 AI 반도체 수출 통제 조치는 사실상 전 세계 범위로 확대된다.
AI 반도체 시장 90%를 점유한 엔비디아를 비롯해 마이크로소프트(MS), 오라클, 구글, 아마존 등 미국 기술 기업들은 이번 규제가 자국 기술 산업에 치명타가 될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네드 핀클 엔비디아 글로벌 업무 담당 부사장은 성명을 통해 "바이든 대통령이 미국 경제에 해를 끼치고 미국의 적대자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만들지 않길 바란다"고 비판했다. 켄 글릭 오라클 부회장 역시 블로그를 통해 "미국 기술 업계를 타격한 가장 파괴적인 규제로 기록될 것"이라며 "업계와 협의 없이, 행정부가 바뀌기 불과 며칠 전 이런 규모의 규칙을 비밀리에 발행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중국엔 오히려 호재" 비판 속출
일각에서는 이번 규제로 인해 미국이 중국의 AI 산업 성장을 돕는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바이든 행정부의 새로운 규제 대상에 포함되는 국가는 120여 곳에 달한다. 미국 기술 기업들은 이들 국가의 고객들이 강력한 규제하에 놓인 미국산 반도체 대신 품질이 낮더라도 안정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중국산 반도체를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하고 있다. 실제로 이들 국가의 AI 반도체 수요가 중국으로 이동할 경우 미국 기술 기업들의 글로벌 AI 반도체 시장 지배력은 점차 약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정계에서도 AI 반도체 수출 규제와 관련한 반대 의견이 속출하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름을 밝히길 거부한 3명의 관리를 인용해 지나 러몬도 상무장관이 해당 규제에 반대 의사를 밝혔다고 전했다. 상원 상무위원회 양당 의원들 역시 지난해 12월 19일 바이든 행정부에 서한을 보내 “(AI 반도체 수출 규제는) 해외에서 미국의 기술을 판매하는 것을 심각하게 방해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다만 미국 내 데이터센터 건설 증가를 기대하는 철강업계와 건설업계, 전기공, 냉난방공조(HVAC) 기술자, 발전업계 등은 이번 규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은 AI 반도체의 무분별한 수출을 제한하면 미국 자체 산업 생태계가 강화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중국의 AI 반도체 경쟁력이 미국을 따라잡지 못하는 만큼, 기업들이 미국산 대신 중국산 AI 반도체를 선택할 가능성은 낮다는 반론도 나온다.
끊이지 않는 AI 규제 관련 잡음
한편 미국에서 AI 규제로 인해 잡음이 생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관련 업계는 이미 지난해 캘리포니아 주의회에서 발의된 AI 규제 법안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최첨단 인공지능 모델을 위한 혁신법(SB1047)’으로 인해 한 차례 홍역을 치렀다. SB1047는 AI 모델 배포 전 안전 테스트를 의무화하고, AI 모델이 5억 달러(약 7,350억원) 이상의 피해 또는 사망 사고를 일으키는 경우 개발업체가 책임을 지도록 하는 규정 등을 담고 있다. 다만 해당 법안은 훈련 비용이 1억 달러(약 1,470억원)가 넘는 고성능 AI 모델에 한해 적용된다.
메타, 구글, MS 등 주요 AI 업체들은 SB1047에 대한 반대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했다. 오픈AI는 “(SB1047이) 캘리포니아에 있는 세계적 수준의 엔지니어와 기업가들이 더 큰 기회를 찾아 다른 곳으로 떠나게 할 것”이라는 내용의 서한을 캘리포니아 주지사에게 보내기도 했다. 해당 법안이 AI 분야의 글로벌 리더인 캘리포니아의 지위를 위협할 것이라는 주장을 펼친 것이다.
실리콘밸리의 유명 벤처캐피털(VC)인 앤드리슨 호로비츠 역시 해당 규제의 비현실성에 대해 지적했다. 마틴 카사도 앤드리슨 호로비츠 제너럴 파트너는 "혁신적인 기술과 규제는 수십 년 동안 계속된 담론이었다"라며 "하지만 모든 AI 담론의 문제는 그것이 난데없이 등장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라고 발언했다. SB1047을 비롯한 AI 규제가 현재 직면한 문제가 아닌 '미래에 나타날 수 있는' 문제를 막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비판이다.
해당 법안은 관련 업계의 강력한 반대를 뚫고 캘리포니아 상원과 하원을 통과했으나, 지난해 9월 개빈 뉴섬 주지사의 거부권 행사로 인해 입법이 무산됐다. 당시 뉴섬 주지사는 해당 법안이 가장 크고 비싼 AI 모델에만 적용돼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며, 저명 AI 학자인 페이페이 리 스탠퍼드대 교수 등과 함께 새로운 법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