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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적·반경쟁적 정책 및 관행 조사
“외국의 착취에 필요한 대응 나설 것”
공정거래법 개정안 추진 난항 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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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구글, 메타 등 자국 빅테크를 규제하는 외국 정부에 대한 대응책으로 ‘보복관세’ 카드를 꺼내 들었다. IT 업계에서는 그간 미국이 공정거래법 개정안 등 우리 정부의 규제 움직임에 반대 의사를 피력해 온 만큼 한국 또한 보복관세의 사정권에 놓였다는 분석을 내놨다. 다만 일각에서는 한국의 빅테크 제재가 매우 약한 수준으로 이뤄진다는 점에서 예민한 반응을 삼가야 한다는 해석 또한 제기된다.
기업 성장·활동 억제 여부 조사 명령
23일(이하 현지시각) 외신에 따르면 21일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기업에 피해를 주는 외국 정부의 ‘일방적·반경쟁적 정책과 관행’을 조사하라는 내용의 행정부 지시 각서에 서명했다. 해당 각서는 △미국 기업에 부과한 세금 △미국 기업의 성장이나 활동을 억제하는 규제 △미국 기업의 지식재산권을 위태롭게 하는 모든 행동·정책·관행 △미국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약화하는 모든 행동·정책·관행 등을 고려해 외국 정부에 대응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백악관은 이번 조치가 미국 기업에 대한 “외국의 착취를 막기 위한 것”이라면서 “더 이상 엄청난 벌금과 세금을 통해 실패한 외국 경제를 떠받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 또한 “외국 정부가 미국 기술기업을 상대로 역외 권한을 행사해 성공을 방해하고 수입을 도용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관세를 부과하고, 필요한 대응 행동을 취하겠다”고 밝혔다.
이런 가운데 한국도 조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각서에 명시된 △국경 간 데이터 이동 제한 △현지 콘텐츠 제작비 요구 △망 사용료 수수료 부과 등 규제가 한국에서도 시행 중이라고 볼 여지가 크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지리 정보 반출 금지 △외국 기업 망 사용료 부과, ‘소수 온라인 플랫폼 대기업 독과점 규제(플랫폼법)’ 등 한국 정부의 각종 규제 추진안 또한 줄줄이 타격을 입을 전망이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을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무역대표부(USTR)에 프랑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페인, 튀르키예, 영국 등 6개국이 시행·논의 중인 디지털서비스세금(DST)에 대해 무역법 301조 조사를 재개할지 여부를 판단하라고 구체적으로 지시했다. USTR은 트럼프 1기 행정부인 2019년과 2020년에도 이들 6개국을 조사한 바 있다.
플랫폼법, 적용 실효성에 의구심
그간 공정거래위원회와 여당은 ‘공룡 플랫폼’의 전횡을 차단하기 위한 공정거래법 개정을 추진해 왔다. 사후 추정을 통해 시장지배적 사업자의 자사우대, 끼워팔기 등 4대 금지 행위를 신속하게 제재하고, 관련 매출의 8%에 이르는 과징금을 부과하겠다는 것이 개정안의 골자다. 지배적 사업자에는 국내 기업인 네이버와 카카오는 물론 미국 빅테크 구글, 메타 등도 포함된다.
미국상공회의소와 USTR은 이 같은 한국 정부의 움직임에 반대해 왔다. 기존 시장 점유율이 높은 미국 빅테크는 규제 대상이 되는 반면, 알리익스프레스·테무 등 중국산 후발 주자들은 반사이익을 볼 것이란 주장이다. 제이미슨 그리어 USTR 대표 후보자는 이달 6일 한국을 포함한 해외 국가들의 온라인 플랫폼 규제 추진 상황에 대해 “용납할 수 없다”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한국 빅테크들 역시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국내외 빅테크 모두를 ‘지배적 플랫폼 사업자(법 적용 대상)’로 지정할 것이란 정부의 방침에도 법 적용의 실효성이 담보되지 않아 토종기업만 규제의 그늘에 놓일 것이란 우려에서다. 정부의 통제하에 있는 국내 기업들은 사전 규제를 충실히 이행할 수밖에 없지만, 해외 기업들은 본사 방침이나 통상 현안 등을 이유로 사전 규제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크다는 비판이다.
국회입법조사처의 연구에서도 해외 플랫폼 사업자는 지배적 플랫폼 사업자의 요건 중 하나인 ‘GDP의 일정 비율을 기준으로 하는 연매출액’의 산정이 어려운 것으로 조사됐다. 공정위는 회계장부에 매출액을 제대로 신고하지 않는 해외 플랫폼 사업자를 직권으로 확인한 뒤 국내 영업을 못 하도록 하는 등의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밝혔는데, 현실적으로 공정위의 집행이 가능한지 여부는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는 게 입법처의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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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일본과 비교하면 한국은 ‘솜방망이’
일각에선 미국의 이번 조처가 유럽을 겨냥한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공정거래 위반에 대한 한국의 처벌이 매우 약한 수준인 만큼 실제 갈등이 격화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평가다. 현행 공정거래법에 따르면 특정 사업자가 높은 시장 점유율을 기반으로 경쟁을 저해하는 행위에 대해선 관련 매출액의 최대 6%를 과징금으로 부과할 수 있지만, 실제 부과되는 과징금은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에서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천준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공정위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의하면 2021년부터 지난해 9월까지 온라인 플랫폼이 시장지배적지위 남용 혐의로 제재를 받은 사건은 총 5건이다. 이들 5건에 대한 제재에는 최대 기준의 절반인 3% 이하의 과징금만 부과됐다. 구글의 ‘모바일게임 입점 방해’ 2건에 대해서도 각각 2.3%, 2.7%의 부과율을 적용했다.
이는 유럽, 일본 등 주요국과 비교해 매우 약한 수준의 제재다. 유럽연합(EU)은 디지털시장법(DMA)을 통해 반칙행위를 한 대형 플랫폼에 전 세계 매출의 10%를, 반복 시 최대 20%를 과징금으로 부과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일본 역시 구글, 애플 등을 견제할 ‘스마트폰법’을 제정하면서 법 위반 시 과징금을 일본 내 매출의 최대 30%까지로 설정했다. 빅테크 규제에 따른 미국의 보복관세에서 한국은 우선 고려 대상이 아니라는 해석이 힘을 얻는 배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