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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2016년 이후 세 번째 요청 "5000:1 고정밀 지도 있어야 정확한 길 안내 가능" 정부, 안보·기밀 정보 유출 위험 고려

구글이 2016년 이후 9년 만에 한국 정부에 고정밀 지도 데이터의 해외 반출을 요청했다. 구글이 원하는 지도는 5,000cm 거리를 지도상 1cm로 표현한 매우 정밀한 지도다. 건물, 도로, 지형까지 세부 사항이 표기돼 있다. 구글은 서버를 한국에 설치하지 않아 고정밀 지도 데이터를 활용하려면 정부로부터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정부는 남북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고정밀 지도 데이터와 위성영상을 결합할 경우 군사 목적으로 악용될 소지를 우려하고 있다.
15일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구글은 지난 2월 국토지리정보원에 1대 5,000 축척의 국내 고정밀 지도 정보를 해외 구글 데이터센터로 이전할 수 있게 해달라는 신청서를 제출했다. 지난 2007년, 2016년 이후 세 번째 요청이다. 1대 5,000 지도는 50m 거리를 지도상 1㎝로 표현해 골목길까지 자세히 식별할 수 있는 지도다. 현재 구글은 1대 2만5,000 축척의 지도를 활용해 국내에서 ‘구글맵(Google Maps)’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구글은 한국 고정밀 지도를 요구하는 주된 근거로 국내를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의 불편을 들고 있다. 외국인 관광객이 사용하는 ‘글로벌 스탠더드’ 구글맵은 유독 한국에서 정확도가 낮은데, 구글은 한국 고정밀 지도를 활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실제 국내에서는 구글맵으로 지도를 볼 수 있지만 경로 안내 기능은 대중교통만 제공한다. 차량, 도보, 자전거 경로 안내는 받을 수 없다. 이 때문에 외국인 관광객이 길 찾기 서비스를 활용하려면 네이버 지도, 티맵 등 국내 지도 애플리케이션을 내려받아 영어로 전환해 활용해야 한다. 구글에 따르면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지도 데이터의 해외 반출에 대한 규제가 있는 유일한 나라다.

글로벌 스탠더드 vs 국가 안보
앞서 우리 정부는 안보 우려를 들어 구글의 요청을 두 차례 거절했다. 안보당국은 1대 5,000 지도 데이터가 도시 계획이나 자율주행에 사용될 정도로 정밀하기 때문에 구글이 자체 위성에 이 정보를 결합했을 시 주요 보안 시설에 대한 정밀 타격이 가능해질 위험이 있다고 진단했다. 이에 정부는 2016년 당시 고정밀 지도 데이터의 해외 반출 조건으로 한국에 데이터센터를 설치하고, 군사 시설 등 보안 시설을 가림(블러) 처리하거나 국내에서 제작한 보안 처리된 영상을 활용할 것을 제시했으나, 구글은 “협의 대상이 아니다”라며 정부 요구를 거절했다.
구글은 현재 전 세계 11개 국가에 29여 개 데이터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대만·일본·싱가포르에 데이터센터를 두고 있고, 태국과 말레이시아에도 시설을 짓는 중이지만 한국은 검토하지 않고 있다. 이번에 구글은 반출 요청 신청서에 우리 정부가 요구한 보안 시설 블러 처리 조치를 따르겠다고 밝혔다. 2016년 우리 정부가 제안한 지도 반출 조건을 거절한 때와 비교하면 이번엔 구글이 한발 물러선 모양새다.
다만 문제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다. 먼저 구글의 요구를 받아들이면 국내 보안 시설 좌표를 모두 구글에 제공해야 한다. 해외 기업에 민감한 기밀이 넘어간다는 점은 별 차이가 없는 셈이다. 한국지도학회지에 게재된 보고서에 따르면 고정밀 지도를 위성영상과 중첩하면 군사 핵심 시설 중 하나인 수도방위사령부 내 침투로, 보급선, 이동 경로 등을 파악할 수 있다. 이처럼 국가 안보상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지금까지 정부가 해외 기업에 고정밀 지도를 제공한 사례는 없었다. 과거 애플, BMW 등이 상업용 지도 데이터 반출을 요청했지만 모두 불허했다.
또 이번에 구글이 제출한 국외 반출 허가 신청서에는 정부 요청 시 보안 시설을 가림 처리하겠다는 내용이 명시적으로 기재되지 않았다. 먼저 데이터를 제공했다가 구글 정책이 변경될 경우 이를 제재할 수단이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여전히 데이터센터 건립 계획은 없고, 단지 지도 정보 보안 관련 문제가 생길 경우를 대비해 관련 책임자를 지정하고 핫라인(hot line·위기 상황 전용 전화)을 구축하겠다고 요청서에 기재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화 입장 구글, 국제 정세 변수로
구글이 한국 정부에 고정밀 지도를 줄기차게 요구하는 속내는 ‘구글 생태계’를 구현하려는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구글은 길 찾기 등 정보 전달과 오락을 접목한 자동차용 운영체제 ‘안드로이드 오토모티브’를 서비스하고 있다. 해외에서는 지도에 광고를 표시하거나 특정 위치를 지나는 사람에게 원하는 광고를 노출하는 방식으로 광고 수익을 내고 있다. 이 밖에도 자율주행차, 드론, 사물인터넷 등 신사업 분야 데이터를 쌓고 실험하려면 지도 정보가 필수적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 달라진 국제 정세는 주요 변수로 꼽힌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지난달 31일 낸 '2025 국가별 무역장벽 보고서'에서 한국이 지도 데이터 반출을 허용하지 않는 것을 '디지털 무역 장벽'이라 지적하며 구글에 힘을 보탰다. 구글은 과거부터 미국무역대표부(USTR) 등을 통해 꾸준히 지도 반출 거부가 ‘비관세 장벽’에 해당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현 시점 트럼프 행정부가 FTA(자유무역협정) 체결국이자, 우방국인 한국에 25%의 높은 관세를 부과한 직후여서 압박감은 상당하다. 향후 지도 데이터 미반출이 관세율 인상 핑계가 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지도 반출 여부는 ‘지도 국외 반출 협의체’ 회의를 통해 결정된다. 회의에는 국토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외교부, 통일부, 국방부, 행정안전부, 산업통상자원부, 국가정보원 등이 참여한다. 규정상 신청을 받은 후 60일 이내 반출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데 1회에 한해 60일 연장할 수 있다. 2016년 구글 요청 때는 6월 신청서를 접수했으나 1회 연장된 후 최종적으로는 11월 불허 결정됐다. 이번 신청서는 2월 접수됐다. 구글의 지도 반출 ‘삼수’ 최종 결론은 7, 8월경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