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파이낸셜] 같은 양적완화에도 엇갈린 물가, 경기 여력·공급난이 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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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양적완화에도 저물가 지속 2021년 공급난·가계 저축에 물가 급등 경제 여건에 맞춘 양적완화 운용 필요
본 연구 기사는 유럽 경제 연구소 The Economy의 연구위원(Fellow)들이 작성한 The Economy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The Economy 또는 집필자의 소속 기관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세 차례에 걸쳐 양적완화(QE)를 시행하며 보유 자산을 4배 가까이 늘렸다. 대규모 유동성 공급에도 이후 10년간 물가상승률은 대부분 목표치인 2%를 밑돌았다. 2020년 코로나19로 경제가 급격히 위축되자 연준은 다시 대규모 유동성 공급에 나섰다. 그러나 이번에는 결과가 달랐다. 2년도 채 지나지 않은 2022년 6월 미국의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 동월 대비 9.1% 급등하며 1981년 이후 41년 만에 최고 상승률을 기록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는 대규모 양적완화에도 저물가가 이어졌지만, 코로나19 이후에는 물가가 빠르게 치솟은 것이다.
같은 정책이 상반된 결과로 이어진 배경에는 당시의 경제 여건이 자리한다. 2008년에는 경기침체로 생산과 고용을 늘릴 여력이 충분했지만, 2021년에는 경제가 빠르게 회복하며 완전고용에 가까워졌다. 여기에 공급망 차질과 가계에 축적된 저축이 맞물리면서 물가 상승 압력도 커졌다. 이처럼 양적완화가 물가에 미치는 영향은 당시 경제 여건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같은 경기 부양책, 달랐던 결과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미국에서는 약 90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금융권의 자금 거래가 얼어붙었다. 은행 간 대출마저 사실상 중단되자 연준은 기준금리를 제로 수준까지 내린 뒤 장기 국채와 주택저당증권(MBS)을 매입하는 양적완화에 나섰다. 금융위기 이전 약 1조 달러(약 1,411조원)였던 연준의 보유 자산은 3차 양적완화가 종료될 무렵 약 5조 달러(약 7,055조원)까지 늘었다. 이후 실업률은 꾸준히 하락했고 경제도 회복세를 보였다. 반면 물가상승률은 이후 10년간 대부분 연준 목표치인 2%를 밑돌았다. 물가가 좀처럼 오르지 않으면서 당시에는 인플레이션보다 저물가 장기화에 대한 우려가 컸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연준은 2020년 3월 코로나19로 경기가 급격히 위축되자 다시 양적완화를 시행했다. 이번에는 2008년 금융위기 당시보다 훨씬 많은 자금이 단기간에 풀렸다. 연준의 보유 자산은 약 4조 달러(약 5,644조원)에서 2년 만에 9조 달러(약 1경2,699조원)에 육박하는 규모로 불어났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수년에 걸쳐 늘어난 규모보다 많은 자금이 훨씬 짧은 기간에 공급된 셈이다. 미 의회도 ‘코로나바이러스 지원·구호·경제안정법(CARES Act)’과 ‘미국구조계획법(American Rescue Plan)’ 등 6개 법안을 통해 약 5조 달러(약 7,055조원)를 지원하며 경기 부양에 힘을 보탰다.
대규모 부양책에 힘입어 2020년 경기침체는 급격한 위축에도 빠르게 회복됐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 이후와 달리 물가도 함께 치솟았다. 연준이 인플레이션을 ‘일시적 현상’으로 판단하는 사이 물가상승률은 가파르게 높아졌고 수백만 가구의 생활비 부담도 늘었다. 2008년 금융위기 극복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던 양적완화가 이번에는 40년 만의 인플레이션을 불러온 원인으로 지목되기 시작했다.
경기 여력에 따라 달라진 물가 흐름
두 시기의 차이는 양적완화가 시행될 당시 경제가 추가 수요를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면 분명해진다. 2008년 미국 경제는 경기침체가 장기화하면서 이른바 ‘깊은 유동성 함정’에 빠졌다. 실제 생산이 잠재 생산에 크게 못 미쳤고 공장 가동률도 낮았다. 실업자가 많아 생산과 고용을 확대할 여력도 충분했다. 이 때문에 시중에 풀린 자금은 위축된 소비와 투자를 되살리는 데 주로 쓰였다.

2021년에는 경제 상황이 달라졌다. 코로나19 초기 경기 충격은 컸지만, 회복 속도도 빨랐다. 연준이 대규모 자산 매입을 이어가던 시점에는 미국 경제가 당시 정책당국의 예상보다 빠르게 완전고용에 근접했다. 추가 수요를 받아들일 여력이 크지 않은 ‘얕은 유동성 함정’에 가까워진 것이다. 생산과 고용을 추가로 늘릴 여력이 줄어든 상황에서는 경기 부양 효과도 제한될 수밖에 없다. 시중에 풀린 자금이 생산과 고용 증가로 이어질 여지는 줄고 상품과 서비스 수요가 공급 능력을 웃돌 가능성은 커진다. 2021년에는 이러한 경기 여건이 양적완화의 물가 상승 압력을 높이는 토대가 됐다.

공급난과 가계 저축의 동시 충격
그러나 경기 여력의 차이만으로 2021년 이후 인플레이션의 규모와 확산 과정을 모두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는 공급망 차질과 가계에 축적된 저축이 동시에 맞물렸기 때문이다. 우선 팬데믹으로 해상 물류가 차질을 빚고 반도체 부족이 장기화하면서 자동차를 비롯한 제조업 생산이 제약을 받았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에는 에너지 가격까지 급등했다. 이전 10년간 메가와트시(MWh)당 5~35유로(약 8,000~5만7,000원) 수준이었던 네덜란드 TTF 천연가스 가격은 2022년 8월 300유로(약 48만원)를 넘어섰다. 유로존 소비자물가 상승률도 같은 해 10월 10.6%까지 치솟았으며 이 가운데 에너지 기여도는 4%포인트를 웃돌았다.
공급 차질의 여파는 다른 품목으로도 번졌다. 반도체 부족으로 신차 생산이 줄면서 중고차 가격이 뛰었고, 주거비와 서비스 물가에도 상승 압력이 이어졌다. 금리 인상만으로 이 같은 공급 문제를 해소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금리를 올리면 소비와 투자를 줄일 수 있지만 항만 적체나 에너지 공급 부족을 직접 해소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서다. 이런 상황에서 팬데믹 기간 가계에 쌓인 저축이 물가 상승 압력을 더 키웠다. 정부의 대규모 현금성 지원이 가계에 직접 지급된 가운데 이동 제한으로 소비가 줄면서 상당한 자금이 사용되지 않은 채 남았다. 가계 저축률도 수십 년 만의 높은 수준까지 상승했다.
경제활동이 재개되자 그동안 억눌렸던 소비는 빠르게 회복됐지만 공급은 이를 따라가지 못했다. 가계가 축적한 저축을 바탕으로 지출을 늘리는 동안 연준의 채권 매입과 정부의 추가 재정 지원도 계속됐다. 제한된 공급에 소비가 몰리면서 물가 상승세는 한층 가팔라졌다. 이와 같이 공급 부족과 빠르게 늘어난 수요가 겹치면서 인플레이션이 높은 수준으로 치솟았다.
경제 여건에 맞춘 위기 대응
이러한 경험은 향후 경기침체에서 과거와 같은 규모의 양적완화를 일률적으로 적용하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따라서 중앙은행은 대규모 자산 매입에 나서기 전 생산과 고용을 늘릴 여력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우선 판단해야 한다. 실제 생산이 잠재 생산을 크게 밑도는 상황이 장기간 이어진다면, 시중에 자금을 풀어 소비와 투자를 늘려도 물가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일 수 있다. 반면 완전고용에 가까운 상황에서는 추가 수요가 생산 증가로 이어질 여지가 작아지는 만큼, 자산 매입 규모와 속도 조절이 요구된다.
재정과 금융시장 여건에 대한 고려도 필요하다. 정부의 원리금 상환 부담이 커질수록 대규모 경기 부양을 지속하기 어려워진다. 세계적인 안전자산으로서 달러가 누려온 ‘편의수익률(convenience yield)’이 낮아지고 있다는 점도 과거보다 정책 운용 부담을 높이는 요인이다. 또한 금융시장 불안이 정책 효과에 미치는 영향도 커졌다. 크레디트스위스(CS) 사태에서는 기타기본자본(AT1) 채권 투자자들이 투자금을 전액 잃으면서 긴급 구제 조치가 투자자의 위험 판단과 채권 가격을 크게 바꿀 수 있다는 점이 드러났다. 이 같은 금융불안이 확산되면 자금조달 여건도 빠르게 악화할 수 있는 만큼. 중앙은행은 경기와 물가, 금융시장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정책 강도를 결정해야 한다.
과거 위기에서 효과를 거둔 정책이 다음 위기에서도 같은 결과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경제 구조와 경기 상황이 달라지면 필요한 정책의 규모와 시점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양적완화 역시 당시 경제 여건에 맞춰 규모와 시점을 조절할 필요가 있다. 다음 위기에서는 과거의 성공을 재현하는 것보다 달라진 경제 여건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에 맞는 대응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Quantitative Easing and Inflation: Why the Same Policy Produced Different Outcomes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The Economy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