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폴리시] 미국과 멀어지고 중국에 밀리고, 달라진 유럽의 위상
입력
수정
유럽 관세 협상서 입지 축소 중국발 공급 과잉에 제조업 타격 달라진 위상에 맞는 중견국 전략 필요
본 연구 기사는 유럽 경제 연구소 The Economy의 연구위원(Fellow)들이 작성한 The Economy Review 시리즈 기고문을 한국 시장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글입니다. 본 시리즈는 최신 기술-경제-정책 이슈에 대해 연구자의 시각을 담아,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사에 담긴 견해는 집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The Economy 또는 집필자의 소속 기관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난해 미국은 유럽연합(EU)에 일본과 같은 15%의 관세율을 적용했다. 60년 넘게 동맹 관계를 이어온 유럽에도 별도의 우대 조치는 없었다. 당초 30%까지 거론됐던 관세율을 절반 수준으로 낮추는 데 만족해야 했다는 점은 유럽의 달라진 협상력을 보여준다. 최근 유럽중앙은행(ECB)과 독일연방은행 경제학자들이 발표한 연구에서도 세계 무역질서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연구진은 미·중 패권 경쟁이 심화하는 과정에서 유럽이 원치 않는 경제적 비용을 부담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미국이 유럽에 일본과 같은 관세율을 적용한 것은 단순히 미·중 경쟁에 따른 부담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변화를 뒷받침한다. 유럽의 경제적 위상과 실제 대외 영향력 사이의 간극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경제의 주요 축을 차지하면서도 미국과 중국을 상대로 과거와 같은 협상력을 발휘하기 어려워진 것이 유럽이 직면한 현실이다.
대미 협상력 약화
유럽의 달라진 입지는 미국과의 무역협상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스코틀랜드 턴베리에서 체결한 무역협정에 따라 자동차를 포함한 대부분의 EU산 제품에는 15%의 관세 상한이 적용됐다. 그 대가로 유럽은 7,500억 달러(약 1,058조원) 규모의 미국산 에너지를 구매하고, 미국에 6,000억 달러(약 846조원)를 추가 투자하기로 했다. 15%는 미국이 불과 몇 주 전 일본과 합의한 관세율과 같았다. EU는 당초 30%의 관세 부과 가능성까지 거론됐던 만큼 이번 합의를 최악의 상황을 피한 결과로 받아들였다. 독일 총리도 수출 의존도가 높은 자국 경제가 더 큰 타격을 피하게 됐다고 평가했다. 일본과 같은 조건을 확보한 것을 성과로 받아들였다는 점은 오랜 동맹 관계와 경제 규모가 더 이상 우대 조건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이러한 변화에는 미국의 외교·안보 전략 재편도 영향을 미쳤다. ECB 연구진에 따르면 이번 합의로 EU가 미국산 자동차에 부과하는 관세는 10%에서 2.5%로 낮아졌다. 관세 문제에 이어 그린란드 주권을 둘러싼 갈등까지 불거지면서 미국과 유럽의 전략적 이해관계가 과거와 달라졌다는 점도 분명해졌다. 냉전 당시 미국과 소련의 대립은 유럽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이에 따라 유럽은 미국의 외교·안보 전략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그러나 미·중 경쟁이 본격화한 이후 전략적 중심은 대만해협과 남중국해를 비롯한 인도·태평양 지역으로 이동하는 추세다. 냉전 종식과 국제질서 재편으로 유럽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뒷받침했던 조건도 달라진 셈이다.

거세지는 중국의 수출 공세
미국과의 관계가 달라지는 동안 중국과의 무역에서는 산업 경쟁력 문제가 부각됐다. EU는 2024년 중국산 전기차에 7.8~35.3%의 상계관세를 부과했지만, 중국의 대유럽 자동차 수출을 억제하는 데는 한계를 보였다. 2024~2025년 중국의 대유럽 자동차 수출은 26% 증가한 약 120만 대를 기록했으며, 중국산 하이브리드 차량 수입은 155% 늘었다. 중국 자동차업체들이 하이브리드 차량 등을 활용해 관세 부담을 피해 간 영향이다.
더 큰 문제는 중국의 생산과 내수 간 불균형이다. 중국은 세계 제조업 생산의 약 30%를 차지하지만 소비 비중은 약 13%에 그친다. 내수에서 소화하지 못한 생산 물량이 해외시장으로 향할 가능성이 큰 구조다. EU 집행위원회는 이러한 불균형이 이어질 경우 2027년 세계 철강 과잉생산 능력이 7억2,100만 톤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EU 전체 연간 철강 소비량의 약 5배에 해당하는 규모다.
독일 덮친 ‘제2의 차이나 쇼크’
중국발 공급 과잉의 여파는 유럽 최대 경제국인 독일에서 두드러진다. 독일의 자동차 생산량은 2017년 560만 대에서 2024년 400만 대 아래로 감소했다. 글로벌 회계·컨설팅 법인 EY(Ernst & Young)에 따르면, 지난해 독일의 대중국 자동차 수출액은 전년 대비 3분의 1 줄어든 136억 유로(약 22조원)에 그쳤다. 이에 따라 중국은 독일 자동차산업의 2위 수출시장에서 6위로 밀려났다. 지난해 상반기 메르세데스의 이익은 56%, 포르쉐의 영업이익은 91% 줄었다. 같은 해 EU의 중국산 자동차·부품 수입액도 대중국 수출액을 넘어섰다.
유럽개혁센터(CER)는 이를 ‘제2의 차이나 쇼크’로 평가한다. 20여 년 전 중국의 저가 제조업 제품이 몰고 온 첫 번째 충격과 달리 이번에는 자동차와 기계, 화학 등 자본집약적 고임금 산업이 직접적인 경쟁에 노출됐다. 상대적으로 가격 경쟁에서 안전하다고 여겨졌던 유럽의 주력 제조업까지 중국과 경쟁해야 하는 상황으로 바뀐 것이다. 특히 중국의 내수 부진으로 초과 생산 물량이 해외시장으로 향하면서 유럽 제조업에 대한 압박도 커지는 추세다. 이와 같이 미국처럼 직접적인 무역갈등을 벌이지 않더라도 중국의 수출 확대만으로 유럽의 주력 산업이 타격을 받을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을 상대로 입지가 좁아지는 상황은 1985년 플라자합의 이후 일본의 행보와도 맞닿아 있다. 당시 미국은 무역적자를 줄이기 위해 일본을 비롯한 주요국과 달러화 가치 하락을 유도하는 환율 조정에 합의했다. 이후 일본은 국제사회에서 영향력 확대를 꾀하기보다 미국의 핵심 태평양 동맹국으로 자리 잡았다. 유럽에도 비슷한 전략적 전환이 요구된다. 경제 규모와 산업 경쟁력은 여전히 상당하지만 이를 미국과 중국에 대한 영향력으로 연결하는 데 한계를 보이고 있어서다. 일본이 변화한 국제질서에 맞춰 역할을 조정했다면, 유럽은 27개 회원국의 이해관계를 조율해야 한다는 과제까지 안고 있다. 통상과 산업, 안보를 아우르는 공동 대응이 쉽지 않은 이유다.

달라진 위상에 맞는 ‘중견국 전략’ 필요
유럽의 변화는 이미 국방정책에서도 나타난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유럽 회원국과 캐나다는 지난해 국방비를 실질 기준 전년 대비 약 20% 늘렸다. 2035년까지 국방 관련 지출을 국내총생산(GDP)의 5%로 확대하는 계획도 추진 중이다. 이는 미국의 안보 지원을 당연시하기 어려워진 상황이 자체 방위력 강화를 앞당긴 것으로 보인다. 다만 방위비 확대만으로 대미 안보 의존도를 낮추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에 따라 통상과 산업 경쟁력, 안보를 연계한 중장기 전략이 요구된다.
기업과 투자자의 대응 전략 재검토도 필요하다. 중국 수요에 크게 의존해 성장한 독일식 수출 모델은 미·중 갈등과 중국 기업의 경쟁력 강화로 위험 요인이 커졌다. 따라서 특정 시장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동시에 주요 교역·투자 관계가 상대국의 정책 변화에 따라 재편될 가능성도 경영 전략에 반영해야 한다. EU는 여전히 거대한 단일시장과 유로화라는 경제적 기반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회원국 간 이해관계가 분산된 상태에서는 이러한 경제 규모를 대외 영향력으로 온전히 활용하기 어렵다. 유럽이 과거 일본과 비슷한 길을 걸을지는 달라진 국제질서에 얼마나 빠르게 적응하느냐에 달렸다.
유럽은 미·중 경쟁의 중심에 서 있다는 기존 인식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미국과 중국이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유럽 시장과 산업에 영향력을 확대하는 상황에서 과거의 위상만으로 협상력을 유지하기는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변화한 위치를 인정하고 이에 맞는 전략을 마련하는 것이 유럽이 직면한 새로운 과제다.
본 연구 기사의 원문은 [Europe as a Middle Power] Learning to Face the Decline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 기사의 저작권은 The Economy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