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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팬' 고질병 여전, 업계 몸살 '사생' 둔갑한 가짜 팬도 등장 콘텐츠 만들어 경제적 이득

K-팝의 위상이 날로 높아지고 있지만, 사생팬이라는 고질적인 병폐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연예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쫓던 사생들은 스타와의 거리를 좁혀 범죄 행위까지 일삼게 됐다. 불법으로 취득한 정보를 구입해 아티스트의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팬들에게 팔아 돈을 버는 방식으로 피해가 재생산되는 양상이다. 팬심을 가장한 집착과 침해를 이제 단순한 팬 문화의 일탈이 아닌, 연예인을 향한 범죄로 인식해야 한다는 사회적 경각심이 제기되고 있다.
정국 자택 침입 시도한 중국인 여성 체포
16일 연예계와 법조계에 따르면 12일 서울 용산경찰서는 방탄소년단(BTS) 정국의 자택에 무단 침입을 시도한 30대 중국인 여성을 주거침입미수 혐의로 현행범 체포했다. 이 여성은 전역한 정국을 보기 위해 한국에 입국했고, 자택 현관 비밀번호를 여러 차례 시도하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붙잡혔다. 정국은 예전부터 사생으로 인한 고충을 공개적으로 호소해 왔다. 입대 전과 군 복무 중에도 누군가가 그의 집 주소를 파악해 배달 음식을 보내거나, 체육관 등을 찾아오는 일이 반복됐고, 지난해 12월 휴가 중 진행한 라이브 방송에서는 "집에 찾아오지 말아 달라"고 직접 요청하기도 했다.
이는 비단 정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해 12월 한 20대 남성은 뉴진스의 숙소에 두 차례 무단 침입해 옷걸이, 플래카드 등 물건을 훔친 혐의로 징역 10개월을 구형받았다. 해당 숙소는 멤버들이 이미 퇴거한 뒤였지만, 사생 행위는 멤버의 동선·정보에 집착하는 방식으로 지속되고 있었다.
김재중 역시 오랜 시간 사생의 표적이 돼 몸살을 앓았다. 최근에도 그는 금융 해킹 피해를 입으며 사생활 침해의 위험이 단순히 물리적 공간에만 국한되지 않음을 보여줬다. 그는 사생으로부터 카카오페이 해킹을 당했다며 "비밀번호가 바뀌었는데, 그걸 모르면 계정 삭제가 불가능하다는 상담에 멘탈이 바사삭 무너졌다"고 토로했다.
김재중의 사생 피해 역시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밤에 누군가 집에 몰래 들어왔고, 도어락도 없는 집에서 침실·화장실 뒷모습을 촬영해 포토메일로 보낸 일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사생의 차량 추적을 피하기 위해 차량을 7~8차례나 바꿨다고도 밝혔다. 김재중은 "차 번호를 외우고 따라오니, 일부러 모르는 차를 사야 했다. 내 차를 일부러 박는 일도 있었다"고 말했다.

사진 1장당 15만원, '대리찍사'로 짭짤한 수익 창출
일부 사생은 오로지 연예인의 출입국 현장을 보기 위해 비행기표를 사기도 한다. 비행 시간이 짧은 일본 스케줄엔 높은 확률로 사생이 따라붙는다. 그런데 이를 위해선 적지 않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들이는 시간과 노력도 상당하다. 학업이나 생업에 차질이 빚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일본을 기준으로 했을 때 해외 일정을 함께 하려면 최소 1~2일 숙박을 해야 한다. 콘서트까지 본다면 이 비용은 더욱 치솟는다. 한 번 움직이는데 최소 100만원은 필요하다는 계산이다.
이들이 적지 않은 비용을 지출하면서까지 사생 활동을 영위하는 건 '대리찍사'로 활동하며 버는 수익 때문이다. 유명 홈마스터(홈마, 유명 팬계정을 운영하거나 좋은 사진·영상을 올리는 팬)가 직접 일정에 갈 수 없을 경우 대리를 고용한 뒤 데이터를 넘겨받고 보정해 자신이 찍은 것처럼 올리기도 한다. 일부는 데이터를 사다 굿즈를 만들거나 사진집을 만들기도 한다. 할리우드 등 해외에도 파파라치가 있지만, K팝의 홈마는 팬활동을 겸하는 경우가 많아 차이가 있다.
엑스(X)에선 해시태그(#) ‘데이터’, ‘사후데이터’, ‘대리찍사’, ‘댈찍’ 등으로 검색하면 판매자 수십명이 뜬다. 이들은 주로 오픈 카카오톡 등으로 영업을 하고 카카오페이, 페이팔 등으로 입금을 받는다. 팬사인회에 참여해 1대 1 대화에서 나온 이야기를 공유해 주고 돈을 받는 홈마도 있다. 아이돌이 이름을 외우는 유명 홈마들이 듣는 말이 무엇인지 일반 팬이 궁금해하면서 나온 신종 ‘사업’ 중 하나다. 이들이 공유하는 정보가 사실인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특별한 비공개 정보에 목이 마른 팬들은 지갑을 연다. 이들이 파는 데이터의 가격은 그룹의 인기도, 흥망성쇠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데이터를 팔면 원본을 지우는 것이 업계 상도의지만, 여러 명에게 팔아도 잡을 방법은 없다.
"사생은 팬 아닌 범죄자"
특히 최근 들어 유료 메시지 서비스나 개인 채널을 통한 1:1 소통 서비스가 등장하면서, 일부 팬들이 이를 실제 관계로 착각하고 연예인을 사적으로 소비하려는 망상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 이로 인해 사생의 수위가 더욱 높아지고, 피해는 점점 복합적으로 확대되는 추세다. 최근에는 사생팬이라는 이름 아래 가짜 팬들도 등판했다. 이들은 팬을 가장해 연예인 뒤를 쫓아다니며 연예인과의 친분을 과시하거나, 마치 소유물처럼 다루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이에 대해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사생은 팬이 아니라, 가짜 팬이자 범죄자"라며 "사생활 침해, 저작권·초상권 침해, 딥페이크 제작 등 다양한 방식으로 연예인과 셀럽들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으며, 일부는 그로 인해 콘텐츠를 되팔거나 유튜브를 통해 수익을 올리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사생 행위는 연예인의 정신 건강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며, 활동 중단 등 위험 요소로 꼽힌다. 김 평론가는 "이제 연예인뿐만 아니라 인플루언서, 일반인도 피해 대상이 될 수 있다"며 "팬심을 가장한 범죄 행위에 대해 강력한 법적 처벌과 사회적 제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문제는 이 같은 행동을 제지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여전히 부족하다는 점이다. 팬덤 내부에서 자정의 목소리가 커지고는 있지만, 현실적인 규제는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한 연예계 관계자는 "대형 기획사의 경우 강력한 법적 조치를 취하겠지만 영세 기획사나 신인 연예인의 경우, 법적 대응을 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사생의 보복이 두려워 피해를 묵인하거나 숨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사생팬 문제 해결을 단순히 연예기획사나 소속사의 몫으로만 둘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공감하고 대응해야 할 공적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는 분위기다. 김 평론가는 "원래는 시민단체든 공공기관이든 이 문제를 다뤄야 한다. 그런데 연예인은 왜 우리가 대변해야 하느냐는 시선이 여전히 많다"고 말했다. 이어 "대중은 인기 연예인만 생각하지만, 대부분 실질적 수익 없이 유명세만 떠안은 채 살아가는 이들이 더 많다"며 "단 한 편의 작품에 출연했다는 이유만으로 사생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수년간 정신적 고통을 겪는 이들도 많다. 그런 현실을 누가 대변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